萍 - 저장소 ㅁ ~ ㅇ/세시풍속 담론

<40〉대설(大雪)과 새봄

浮萍草 2013. 12. 9. 11:28
    차가운 눈이 보리의 이불
    엄동설한에도 싹을 간직하고 있으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봄은 늘 새봄이라 갑지만 포근해 보이는 것이 있다. 그래서 사람의 마음까지 환하게 녹이는 기운을 지닌 것… 바로 눈이다 실제로 눈 오는 날은 포근할 때가 많고 ‘눈은 보리의 이불’이라거나 ‘눈이 많이 오는 해는 풍년 든다’는 말이 전한다. 쌓인 눈이 보리 싹을 이불처럼 덮어주어 얼지 않고 겨울을 나게 되고 눈이 녹으면서 흙의 영양분과 수분을 뿌리에 고루 스며들게 하기 때문이다. 그런가하면 ‘눈 오는 날은 거지가 빨래하는 날’이라고는 말도 있다. 추운 겨울에도 눈이 내리는 날에는 따뜻하다는 뜻인데 이는 수증기가 눈으로 바뀔 때 지니고 있던 열을 방출하기 때문이라 한다. 또 혼례나 이사를 할 때 눈이 오면 잘살고 첫눈 위에 넘어지면 한 해 재수가 좋다는 속신들은 모두 눈이 상서로움을 상징한다는 것을 말해준다. <조선왕조실록>에는 눈이 오지 않아 기설제(祈雪祭)를 지낸 기록이 곧잘 나온다. 왕들은“겨울이 반이나 지났는데 따뜻하기가 봄날 같고 대설이 지났으나 한 점의 눈도 내리지 않는구나”“눈이 쌓여야 풍년이 들 텐데 세 차례 내려야할 눈을 아끼고 있으니 농사걱정이 이루 말할 수 없다. 택일하지 말고 기설제를 곧 거행하라”며 명을 내렸다. 이에 기우제를 지내던 종묘와 사직단에서 눈 내리기를 빌었으니 농사철의 비뿐만 아니라 농한기의 눈도 풍년을 위해 필수적인 포석이었던 것이다. 대설(大雪)은 말 그대로 큰 눈이 내린다는 날이다. 눈이 많이 내리기 시작한다는 것은 겨울이 본격화되고 동장군이 밀어닥친다는 뜻이다. 냇가에 살얼음이 서렸다가도 한낮의 온화한 햇살에 풀리곤 하는 나날이 음력10월이라면 11월은 온 세상이 밤낮없이 얼어붙기 시작하는 나날이다. ‘농가월령가’의 ‘11월령’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십일월은 한겨울이라 대설 동지 절기로다 바람 불고 서리치고 눈 오고 얼음 어네 가을에 거둔 곡식 얼마나 되었던가 몇 섬은 환곡 갚고 몇 섬은 세금 내고 얼마는 제 지내고 얼마는 씨앗 하고 소작료도 되어 내고 품값도 갚으리라 꾼 돈 꾼 벼 낱낱이 갚고나니 많은 듯 여긴 것이 남은 게 거의 없다 그러한들 어찌할까 양식이나 아껴보자 콩기름 우거지로 죽이라도 다행이다….” 환곡ㆍ세금ㆍ소작료에 꾼 돈과 벼를 갚고 나니 땀 흘려 지은 한해농사 끝에 남은 것이 거의 없다. 농사꾼은 한해 결산이지만 현대 직장인은 한 달 결산이라 마치 서민들의 월급봉투가 새는 것과 다를 바 없지 않은가. 그리하여 또 다음을 기약하며 허리띠를 졸라매는 것이 예나 지금이나 보통사람들의 삶이다. 어쩌면 하나의 순환에 남김없이 쏟아 붓고 다음으로 넘어가는 이치가 자연의 순환과 닮았다. 자연은 축적하지 않기에 끊임없는 되풀이를 늘 처음처럼 새롭게 펼쳐갈 수 있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문제는 남은 게 없이 되풀이되는 삶이 아니라 그 속에서 새로움을 체험하지 못하는 데 있을지 모르겠다. 바랑 하나 걸머지고 떠나는 수행자처럼 무거운 짐이 없을 때 발걸음은 온전히 새롭고 가볍다. 세상살이에 구태여 빈손일 필요는 없겠지만 남은 것에 절망하느라 새봄을 보지 못해서야 되겠는가. 엄동설한에도 차가운 눈이 보리의 이불이 돼주어 싹을 간직하고 있으면 어김없이 찾아오는 봄은 늘 새봄이기 때문이다.
    ☞ 불교신문 Vol 2967         구미래 불교민속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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