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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9〉김장의 계절

浮萍草 2013. 12. 2. 10:42
    “김치 안 먹고 살 수 있는가”>
    수행자 1년 양식이요 신도들의 공양거리 부족한 이들과 먹거리 유전자 나누는 일 “가을도배와 제사 후 이집 저집 김장하기에 내리 한가치 못했다.” 1939년에 <동아일보> 부인기자 최의순(崔義順)이 쓴 일기 한토막이다. 바깥일 하는 신여성이었지만 집안도배와 제사에 김장품앗이까지 다니느라 바빴던 일상을 기록하였다. 이 무렵 어느 신문에는 여학교기숙사에서 학생을 총동원해 김장실습을 하는 사진과 함께“조선사람이 김치ㆍ깍두기를 먹지 않고 위장의 안일을 바랄 수 있는가”라는 기사도 보인다. 김치 없이는 위장이 불편할 거라는 기자의 말처럼 김치는 우리 몸에 배어있는 유전인자라 할 만하다. 김치의 아미노산 맛이 충족되지 않으면 밥을 먹어도 안 먹은 것 같다는 토종한국인도 많다. 예전엔 김장을 할 때도 금기가 많아 손 없는 날을 받았다. 특히 김치에 여성의 음기가 들어가면 맛이 변한다고 보아 배추를 절이면서 아낙네들은 입에 창호지를 붙였다니 그 정성이 놀랍다. 배추김치와 함께 무김치도 빠질 수 없는 김장의 주인공이다. 그런데 무로 담그는 김치 가운데 깍두기는 유독 사연이 많다. 어릴 적 편을 갈라 놀 때 전체인원이 홀수이면 ‘양쪽 편에서 다 뛰는 아이’를 가리키는 말이 깍두기였다. 근래에는 편놀이의 뜻은 희미해지면서 ‘곁다리’의 의미로 즐겨 쓰이고, 언제부턴가 조직폭력배를 일컫는 은어가 되고 말았다. 조직폭력배를 상징하게 된 것은 네모난 모습에서 비롯된 것이나, 편놀이에서 쓰는 깍두기란 말은 어원이 모호하다. 이에 대해 무를 썰다가 마지막에 남은 조각으로 대충 썰어 담근 것을 깍두기라 불렀기에 정식멤버가 아니라 끼워주는 이를 깍두기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설이 있다. 그런가하면 1940년에 나온 홍선표의 <조선요리학>에 기록된 깍두기는 반대로 궁중음식 출신이다. 조선시대에 궁궐여인들이 별미를 만들어 왕실어른을 대접하곤 했는데 정조의 둘째딸 숙선옹주가 개발하여 올린 음식이 바로 깍두기라는 것이다. 당시 무김치는 주로 통째 소금물에 절였다가 썰어서 먹었는데 깍두기는 반듯하여 보기에도 좋고 한 입에 들어가니 먹는 데 품위도 지킬 수 있었을 것이다. 정조는 이에 흡족해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이 기록이 정설이라면 깍두기가 서민들이 쉽게 만들어먹을 수 있는 무김치로 일반화되면서 더 많은 정성이 필요한 다른 김치에 비해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김치로 의미가 바뀐 듯싶다. “소금기가 구석구석 온 몸으로 스며들 때 누구인들 한번쯤 이렇게 푹 젖다보면 사나흘 생각이 깊어 돌아갈 수 없는 거다 고추 마늘 온갖 양념을 한 통속에 비벼서 덥고 춥고 맵고 짠 맛을 한꺼번에 겪는 것 세상의 눈치 살피며 풀 죽을 수 있는 거다….”
    김삼환은 〈배추는 다섯 번을 죽어서야 김치가 된다〉는 시에서 팔팔하고 푸른 배춧잎이 소금에 그리고 양념에 절여져 풀 죽어가는 과정을 읊었다. 풀 죽음 뒤에 제대로 된 김치 맛을 내니 우리네 인생살이도 곰삭아 익어야 하는 게다. 이웃끼리 나누던 김장품앗이는 사라진 대신 사찰과 교회에서는 수행자의 일 년 양식이요 신도들의 공양거리인 김장을 담그는 손길이 여전히 바쁘다. 또한 추운 겨울, 나보다 조금 가진 것이 부족한 이들과 의식주를 나누는 일에서도 김장은 가장 생명력이 질기다. 우리의 먹거리 유전인자를 함께 나누는 일이기 때문일까.
    ☞ 불교신문 Vol 2965         구미래 불교민속학자 .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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