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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 의정부 문화관

浮萍草 2013. 11. 29. 19:00
    할리우드 영화 보고 ‘도라지 위스키’ 한 잔… 한 +미 ‘변종문화’ 메카
    1959년 김동원, 최은희,김지미가 주연한 영화 ‘황혼의 애상’이 상영되던 의정부시 옛 중앙로 부근에 있었던 문화관과 도라지 위스키 시음장(오른쪽 간판 없는
    건물) 전경. 한병준 씨 제공
    1970년대 서울 북부에 살던 학생들에게 의정부는 문화의 해방구였다. 서울과 동시에 개봉되는 영화를 저렴한 가격에 볼 수 있는 것은 물론 성인 영화 상영 때도 학생 출입이 비교적 자유로웠기 때문이다. 대지극장 근처에 있던 고등학교를 다녔던 필자도 친구들과 방과 후에 12번 13번 버스를 타고 의정부로 영화를 보러 갔던 기억이 어제 일처럼 생생하다. 서울에서 미성년자는 볼 수 없었던 ‘대부’ 같은 영화를 본 것도 의정부 중앙극장이었다. 나와 같은 82학번인 배우 최민식도 방송 프로그램에 나와 의정부 중앙극장에서 영화를 보던 기억을 더듬었다. 번호가 없는 좌석에 하루 종일 관람도 가능했던 검은 극장에 들어서면 커다란 스크린에서 배우들이 튀어나올 것 같았다. 세로로 쓴 손 자막은 읽다가 이내 지쳤지만 어마어마한 크기의 화면을 보고 있노라면 영화 속 장면은 현실처럼 달콤했다. 1980년이 돼서야 컬러 텔레비전 방송이 시작된 대한민국의 할리우드 키즈들에게 의정부의 극장들은 컬러 시네마스코프가 있던 꿈의 공장이었다. 중앙극장은 외화만을 틀었고 국도극장은 거의 방화만을 상영했다. 극장주가 같은 사람이었기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이 때문에 의정부 중앙극장은 할리우드 키즈들에겐 성전과도 같았다. 1970년대 의정부에는 중앙극장 국도극장은 물론 일제강점기부터 있던 평화극장과 문화극장 시민회관 등 무려 다섯 개의 극장이 있었다. 할리우드 키즈들은 영화를 따라 극장들을 순례했다. 중앙극장이 생기기 전에 중심지였던 곳은 문화관(문화극장)이었다. 1955년 문화관으로 문을 연 뒤 문화극장을 거쳐 현재는 문화콜라텍으로 바뀐 문화관은 영화와 위스키로 상징되는 미군문화의 한국화를 보여주는 역사적 공간이다. 한국전쟁이 끝나고 대규모 미군이 대한민국 전역에 주둔하면서 미군들이 즐기던 대중문화들이 뿌리내린다. 휴전선과 멀지 않은 의정부에는 8개의 미군캠프가 있었다. 텔레비전이 본격 보급되기 전인 1950년대 중반에 영화는 반공국가의 체제 안정을 위한 영상 홍보의 첨단 매체였다. 1955년 미군원조로 세워진 의정부 문화관 개관식은‘이승만 대통령 밴플리트 장군 백 내무 손 국방 이 문교 각 장과 퍼랜보 미 8군전방사령’이 참석할 정도로 중요한 국가 행사였다. 당시 영화관을 통해 상영된 대한뉴스에는 이승만 대통령이 수많은 군중 앞에서 연설하는 장면이 남아 있다. 양주시 의정부읍이었던 의정부는 이후 빠르게 발전해 1963년에는 시로 승격된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물자들이 넘쳐나자 시장을 통해 물건과 돈이 돌고 사람들이 모여들었다. 국도 3호선 국도 39호선 국도 43호선이 교차하는 교통의 중심지이자 국방의 요새였고 서울과 맞닿은 도시라는 점 때문에 의정부에는 미국의 문화와 한국의 문화가 결합된 새로운 변종 문화들이 생겨난다.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고기 햄과 한국의 김치찌개문화가 만나 탄생한 부대찌개도 의정부에서 만들어졌다. 그리고 미군들의 대중주인 위스키문화도 일상적인 문화가 되었다. 개항 이후에 서양 증류주가 중심이 된 양주 문화는 조선에 깊게 자리잡는다. 유사길(惟斯吉·위스키), 발란덕(撥蘭德·브랜디) 같은 서양의 증류주가 젊은 양반 자제들 사이에 퍼지고 있다고 1894년 조선을 여행한 비숍은 기록하고 있다. 19세기 말에 외국인이 찍은 사진에는 양주병을 개다리소반에 놓고 갓 쓴 남자가 기생인 듯한 여자와 술을 마시는 장면도 있다. 일제강점기에도 위스키 브랜디는 물론 러시아의 보드카까지 서양식 증류주는 소주와 함께 큰 인기를 얻었다. 하지만 본격적인 서양식 증류주 문화의 시작은 1945년 8·15 해방 이후에 본격화된다. 1945년 남한에 미군이 진주하자 위스키와 브랜디가 봇물 터지듯 사람들 사이에 유행한다. 미군매점을 통해 미군용 위스키가 시내에도 등장한다. 1945년에 창간된 ‘자유신문’에는 하루가 멀다 하고 위스키와 브랜디 광고가 실린다. 가장 많이 등장하는 닭표 우이스키(위스키)를 필두로 고급양주 머큐리,고래표 위스키 오림픽 위스키, 빅토리위스키 고려 브란듸, 아동브란듸 백장미브란듸 너쓰 뿌란듸 아리랑 뿌란듸 화랑 부란듸 럭키타이거 휘스키 등 곡물을 발효시켜 증류시킨 위스키와 와인을 증류한 브랜디는 수도 없이 생겨난다. 갑작스러운 서양식 증류주의 범람은 많은 부작용을 낳는다. 이때의 증류주들은 양조알코올(소주)에 수입한 위스키 향을 섞은 것이었다. 내용을 들여다보면 진짜 위스키나 브랜디는 하나도 없었다. 가짜 술은 기본이었고 사람들이 먹고 죽는 ‘살인주’들 때문에 서양식 증류주는 미 군정에 커다란 골칫덩이 였다. 1947년 5월 1일에는 군정장관 행정명령 21호로 주류판매금지가 발표되지만 큰 실효는 거두지 못한다. 1970년대 말에서 1980년대 중반까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다 사라졌던 가수 최백호는 1995년 ‘낭만에 대하여’를 발표하며 화려하게 복귀한다. ‘궂은비 내리는 날 그야말로 옛날식 다방에 앉아 도라지 위스키 한 잔에다 짙은 색소폰 소리 들어보렴’ 같은 가사와 최백호의 묵은지 같은 목소리를 들으면 ‘낭만’이나 지나간 시간에 대한 회상이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이 노래가 유행하면서 도라지 위스키에 대해 궁금해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1960, 1970년대 도시적 이미지의 멋을 상징하던 도라지 위스키는 지금 생각하면 충분히 낭만적이었지만 탄생과정을 지켜보면 도라지처럼 약간은 씁쓸한 추억을 간직한 술이다. 한국전쟁 때 미군은 일본에서 수많은 배급품을 들여왔다. 미국인들이 즐겨먹는 위스키도 예외가 아니었다. 위스키가 인기를 얻자 일본산 위스키인 도리스 위스키의 밀수가 성행한다. 일본인 항해사가 거제도에서 도리스 위스키를 매각하려다 미군 당국에 발각(1951년 5월 30일자 동아일보)되는 일까지 벌어졌다. 일본의 도리스 위스키가 아닌 한국제 도리스 위스키가 일반인에게 시판된 것은 1956년 5월 무렵의 일이었다. 1956년 5월 중순의 ‘경향신문’과 ‘동아일보’ 광고란에는 ‘UN군에게 전용판매하였음으로 애주가 제위에게 많은 불만을 드렸아오나 금후부터는 전국주류판매점에서 판매하게 되였아오니 많은 시음과 아울러 애장하여 주시기를 앙망하나이다’라는 도리스 위스키(Torys Whisky) 광고가 실린다. 제조자는 부산 토성동 3가 6번지에 주소를 둔 국제양조장이었다. 도리스 위스키는 광고에 의하면 ‘한국 최초의 양주’이자 ‘재무부 장관 특상을 수상한 최고의 위스키’였다. 도수는 45도였고 한 잔에 50환(1958년)을 받았다. 도리스 위스키는 위스키 원액이 한 방울도 섞이지 않은 이름뿐인 위스키였다. 하지만 당시 대중은 그 사실을 몰랐고 위스키를 마실 수 있다는 것 때문에 도리스 위스키를 사랑했다. 1958년 부산, 서울 대전 춘천에 있던 도리스 위스키 시음장은 1959년 말이 되자 인천과 원주 수원 동두천 의정부 대구까지 확대된다. 부산 서울 같은 대도시 외에 춘천 원주 동두천 의정부 같은 위스키 시음장이 생긴 작은 도시들은 모두 군사 도시였다. 1960년에 도리스 위스키 시음장은 도라지 위스키 시음장으로 간판이 바뀐다. 1963년 의정부 문화관 옆에 있던 도라지 위스키 시음장 간판에는 ‘INTERNATIONAL GINSENG WHISKY’와 ‘국제인삼주’라고 쓴 한국어 설명이 붙어 있다. 어떤 형태든 위스키에 씁쓸한 맛을 내는 도라지나 인삼이 들어간 것으로 보인다. 1960년 1월 15일, 돌연 도리스 위스키의 간판과 네온사인 등이 모두 철거되고 사장은 같은 해 2월 4일 출판물에 의한 명예훼손 혐의로 구속된다.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1960년 1월 15일 부산 ‘국제신보’는 ‘단두대에 선 왜색근성 제1호에 걸린 토리스 위스키 상표도용 뿌리뽑는다’라는 제목으로 장문의 기사가 실린다. 외국의 상품 그것도 일본의 ‘고도부키야의 대표인 토리스 씨의 이름을 따서 영어로 표시한 것’인 도리스 위스키는 왜색 불법 상표 도용의 본보기였던 것이다. 기사처럼 도리스 위스키는 일본에서 처음 만든 위스키였다. 고도부키야(고토부키야·壽屋)는 1899년 도리이 신지로(鳥井信治郞)가 포도주 제조 판매를 목적으로 창업한 도리이상점을 1921년에 이름을 바꾼 회사다. 고도부키야에서는 창업주의 성(姓)인 ‘도리이’를 붙인 산토리 위스키, 도리이 위스키를 발매한다. 고도부키야는 1963년 회사 이름을 일본 위스키의 대명사가 된 산토리로 바꾼다. 도리이 위스키는 1946년에 원액 5%를 넣은 제품으로 시장에 나온다. 1960년대 일본의 젊은이들에게 많은 인기를 얻었던 도리스 위스키는 지금도 판매되고 있는 롱 셀러 브랜드다. ‘국제신보’ 기사가 나간 후 국제양조장은 연일 ‘부산일보’ 같은 지역 신문에 5단의 광고 해명서로 맞대응한다. 도리스 위스키는 국내 미장 특허(38호 330호) 상표등록(1463호)을 모두 취득한 적법한 상표였다는 것이었다. 추운 겨울에 벌어진 뜨거운 보름간의 상표전쟁은 그해 2월 초부터 도리스 위스키의 간판이 도라지 위스키로 바뀌고 사장이 구속되면서 마감된다. 1960년 3월 1일자 ‘동아일보’ 광고에는 구 도리스 위스키의 자매품으로 도라지 위스키가 등장한다. 이름을 바꾼 뒤 도라지 위스키는 진격을 멈추지 않는다. 도라지 위스키 시음장을 넘어 1950년대 이후 대표적 문화공간이 된 다방에서도 도라지 위스키 몇 방울을 떨어뜨린 ‘위티(위스키 티)’ 같은 차가 계란 노른자를 넣은 ‘모닝커피’와 함께 가장 비싼 메뉴로 팔렸다. 도라지 위스키는 위티가 아닌 잔으로도 팔았다. 최백호의 노래는 그 당시 다방에서 마시던 도라지 위스키에 대한 헌사다. 도라지 위스키가 주도한 위스키 시장은 1969년 말에는 도라지 쌍마 백양 화성 오스카 등 5대 위스키 제조 메이커들이 경쟁을 할 정도로 급성장한다. 1976년 서울 낙원동 주변에만 도라지 위스키 시음장이 여섯 군데나 있을 정도로 도라지 위스키는 대중의 사랑을 받았지만 1976년 보해양조에 매각되면서 역사 속 으로 사라진다. 도라지 위스키와 함께 위스키 원액이 들어가지 않은 가짜 위스키들도 자취를 감춘다. 대한민국에서 위스키 원액이 들어간 진정한 위스키 제조는 1970년 월남전 군납용으로 청양산업이 만든 ‘그렌알바’가 최초였다. 알코올 도수 95% 이상의 순수 알코올인 주정에 물을 타서 만든 희석식 소주에 원액 20% 미만의 위스키를 섞어 만든 변형 위스키였다. 1974년 백화양조와 진로가 만든 인삼위스키는 일반인에게 판매된 최초의 국내 제조 위스키다. 1977년에는 위스키 원액 20% 이상, 1978년에는 30%, 1984년 100% 위스키 원액을 사용한 것만을 위스키로만 인정받게 된다. 1980년대 대학 시절을 보낸 사람들이라면 캡틴큐와 나폴레옹에 대한 기억이 누구에게나 있다. 1978년 탄생한 캡틴큐는 국산 주정에 위스키 원액을 20% 미만으로 섞은 기타재제주(其他再製酒) 즉 다른 여러 증류주를 혼합해 만든 술이었다. 발매 첫해에만 1000만 병 가까이 팔렸을 정도로 캡틴큐의 인기는 폭발적이었다. 나폴레옹은 코냑의 등급 이름에서 따온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브랜디로 분류됐지만 정식 나폴레옹 코냑과는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나는 저급주였다. 소주와 막걸리로 하루를 마감하던 80년대 학번들에게 캡틴큐와 나폴레옹은 어쩌다 먹는 비싼 술이었지만 이 술들을 먹고 다음날 너나 할 것 없이 숙취에 시달리던 기억을 가지고 있다. 당시에는 어떤 술인지도 몰랐지만 박정희 대통령도 자주 마시던 위스키를 마셔본다는 약간의 허영심에 누구도 캡틴큐와 나폴레옹을 마다하지 않았다. 1980년대 중반 위스키와 맥주를 섞은 폭탄주가 탄생할 정도로 위스키는 약간 고급스러운 대중술이 된다. 이 무렵부터 국내에서도 위스키 원주가 생산되기 시작했다. 국산 위스키 원주와 수입 위스키를 섞은 위스키들은 1987년부터 본격적으로 생산된다. 86서울아시안게임과 88서울올림픽을 거치면서 한국 경제는 거침없이 성장한다. 룸살롱은 접대성 손님들로 넘쳐났다. 남의 돈으로 먹는 비싼 위스키 시장은 급속하게 성장한다. 국산 특급 위스키인 패스포트, VIP, 썸씽스페셜 등도 인기를 얻었다. 1991년 주류 수입이 개방되자 유명 위스키들이 들어왔다. 외국에서는 몇 년산만 해도 귀한 위스키들이 국내에서는 12년산은 돼야 겨우 대접을 받는 이상한 일들이 벌어졌다. 세계 위스키 소비량 4위라는 통계치가 말해주듯 거품은 커져 갔고 마침내 1997년 국제통화기금(IMF)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위스키 시장의 폭주는 멈춘다. 2000년에 진정한 위스키 명품인 싱글몰트위스키가 한국 땅에 상륙하면서 맥주에 수십만 원 하는 위스키를 오로지 취하기 위해 마시던 시절에서 본맛을 즐기는 시대가 도래했다.
    Munhwa         박정배 음식컬럼니스트·‘음식강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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