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문득 돌아본 그때 그곳

<32> 신당동 떡볶이 골목

浮萍草 2013. 11. 19. 17:49
    70년대 ‘불량 고삐리’… 80년대 ‘일반 고삐리’… 매콤한 해방구
    떡볶이는 길거리 음식이다. 
    노점 좌판에서 냄비나 번철 하나 달랑 걸어놓고 팔 수 있는 음식이다. 
    그런데 언제부터 떡볶이가 길거리에서 팔렸는지에 대한 구체적인 자료가 없다. 
    역사란 늘 ‘있는 자’의 편에서 기록되니 떡볶이 같은 서민 음식에 대해 관심을 두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조선에서도 노점 좌판이 있기는 있었다. 
    종로 시전 앞에도 좌판이 놓였는데 그 좌판에 떡볶이가 있었을까? 
    그때의 쌀 수급 사정상 떡볶이는 고급 축에 드는 음식이었을 것이니 좌판에서 팔렸을 것 같지는 않다. 
    일제강점기에도 한반도의 쌀은 늘 부족하여 술 엿 떡 등을 만들지 못하게 단속하였으니 좌판에서 떡볶이를 보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광복 이후에도 쌀 수급 사정은 좋지 않았다. 
    설날에 방앗간에서 떡을 하는 것까지 단속할 정도였다. 
    그럼에도 그즈음에 떡볶이를 시장 좌판 등에서 팔거나 사먹었다는 어른들의 증언을 들을 수 있다. 
    단속의 눈길을 피해 몰래 떡볶이를 팔았을 것이다.

    반도에서 떡볶이가 길거리 음식으로 크게 번창한 것은 1970년대 중반의 일이다. 그때 무슨 일이 있었나 하면, 바로 통일벼의 재배라는, 한반도 농업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이 있었다. 한반도의 민중은 늘 배고픔에 시달려야 했다. 주곡인 쌀이 부족하였기 때문이다. 가뭄이나 수해가 닥치면 굶어 죽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였다. ‘ 이밥에 고깃국’은 유토피아를 상징했다. 1971년 인디카와 자포니카 품종을 교배하여 얻은 통일벼가 개발되었다. 기존 벼에 비해 생산량이 30% 많았다. 박정희정부는 이 통일벼 재배에 온 열정을 쏟았다. 통일벼가 맛이 없다고 농민들이 기피하자 일반 벼를 심어놓은 논을 강제로 갈아엎어서라도 통일벼를 심게 했다. 1976년 통일벼 재배 면적이 44%로 확대되어 마침내 쌀 자급률 100%를 이루었다. 한민족 5000년 역사상 처음으로 주곡을 자급하게 된 것이다. 그 후 쌀은 남아돌게 되었다. 박정희정부는 농민에게서 쌀을 비싸게 사고 도시인에게는 쌀을 싸게 파는 이중곡가제를 시행하였다. 맛 없는 통일벼이지만 어찌 되었든 싼값의 쌀이 넘쳤다. 쌀이 싸지니 이를 이용한 가공식품산업이 활발해졌다. 그중에 떡이 가장 쉬운 품목이었다. 전국의 전통시장에 반드시 있는 떡집 골목도 이즈음에 조성된 것이다. 덩달아 떡볶이 좌판도 부쩍 늘었다. 값싼 정부미를 사다 떡을 만드니 마진이 높다는 점이 떡볶이의 번창을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연탄 화로에 냄비 하나만 있으면 이 ‘사업’을 시작할 수 있다는 점도 큰 영향을 주었다. 신당동 떡볶이가 크게 번창하게 된 시점도 1970년대다. 그즈음에 한반도 전역에서 떡볶이는 길거리 음식으로 퍼져나갈 조건이 갖추어져 있었는데 신당동에서 특히 ‘폭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때의 고삐리들은 숨을 곳이 필요했다
    1979년 10월, 유신이 끝나가던 그 혼란의 시기에 나는 경남 마산시(현 창원시)에서 고등학교에 다니고 있었다. 시위대가 시내를 돌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장갑차 소리를 들었다. 드르륵드르륵 하는 그 소리만으로 시위대는 흩어졌다. 곧 위수령이 발표되었다는 말을 들었다. 친구들이 밤에 모였다. 부림시장 근처 친구 집이었다. 그 자리에 부산에서 마산으로 숨어든 선배가 있었다. 시국에 대해 나직이 이런저런 말을 하였는데 무섭다는 생각뿐 무슨 내용인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잠시 방을 나와 담 너머 부림시장 쪽을 보았다. 장갑차와 군인이 있었다. 그 앞을 지나던 중년 사내가 군인 앞에서 무슨 말인가 하였다. 이어 군인이 개머리판으로 사내의 머리를 날렸다. ‘퍽∼’ 하는 소리가 밤하늘에 울렸다. 후룩∼ 쓰러지는 사내를 보며 몸을 숨겼다. 나는, 정말 무서웠다. 며칠 후 학교 가는 길에 ‘박정희 대통령 서거’ 뉴스를 들었다. 온몸에 전기가 통하는 듯하였다. 전쟁이 나는 것은 아닌가 싶었고, 그냥 집으로 돌아갈까 하는 생각도 하였다. 온갖 걱정으로 교실에 들어서니 친구들은 신이 나 있었다. “이제 끝났어.” 나는 무엇이 끝났고 무엇 때문에 신이 나있는지 알지 못하였다. 어찌 되었든 그날 친구들은 모여 술을 마셨다. 부림시장 골목의 닭집이었다. 다락방에서 닭내장탕에 소주를 마시며 민주주의니 자유니 하며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그것들에 대해 토론을 하였다. 나랏일은 모르겠고, 나에게 닭집 다락방은 분명 자유와 민주의 해방 공간이었다. 나를 억압하는 그 모오든 현실에서 벗어나 친구들끼리 어떤 말이든 할 수 있는. 이후 가끔 그 다락방에 우리들은 숨었었다. 이듬해 나는 서울에 왔다. 전국 각지에서 고등학교 때까지 살았던 이들이 내 친구가 되었다. 나처럼 특별히 불량할 것도 없는 친구들이었다. 그런 그들도 고등학교 때에 이미 술을 마셨다고 하였다. 학교 앞 분식집, 시장 골목 순대집, 방죽 선술집 등등 가지가지였다. 그들에게도 다 그들 식의 해방구가 있었던 것이다. 신당동 떡볶이 골목은 1980년대 초 내가 대학 다닐 때에 처음 가보았다. 그 골목은 서울의 불량스러운 고삐리들이 다 모이는 곳으로 보였다. 떡볶이를 안주로 ‘대학생 형아들’이 술을 마시는데 그 옆에서 고삐리들도 소주를 깠다. 몇 살 차이가 나지 않음에도 그들의 불량기가 보기 싫었다. 박정희 시대는 끝났으나 독재는 끝나지 않았으니 그들의 심중을 충분히 읽을 수 있을 것임에도 그랬다. 밤늦게는 패싸움도 있었다. 신당동은 6·25전쟁 후 피란민들이 몰려들어 조성된 동네였고 그래서 주민들은 가난했다. 주변에는 성동고, 한양공고 무학여고 등 학교가 많았다. 시장이 가깝고, 또 그 골목에 극장이 있었다. 고등학생들을 상대로 하는 먹을거리 좌판이 있기에 딱 좋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었다. 신당동 토박이에 의하면, 6·25전쟁 직후 신당동 골목에 떡볶이 좌판이 셋 있었다고 한다. 어떤 형태의 떡볶이인지는 잘 설명하지를 못하였는데, 처음에는 번철에 볶는 형태의 떡볶이일 가능성이 높다. 그 시절에는 냄비조차 귀하였다. 이 정도의 음식으로는 신당동에 고삐리들이 몰려들 리가 없다. 무언가 다른 유혹거리가 있어야 하는 것이다. 신당동 토박이들에게 묻고 물으면 처음엔 머뭇거리다가 그 대답을 들을 수 있다. “고삐리들한테 술도 팔았고, 미팅도 하고 그랬지.” 술을 팔고 미팅도 하는 자리이려면 떡볶이가 좌판에서 팔려서는 안 된다. 신당동에 식당 형태를 갖춘 떡볶이집이 생긴 것은 1970년대 중반의 일이다. 또 떡볶이가 안주가 되려면 번철에 볶는 형태여서도 안 된다. 드럼통에 연탄불을 넣고 그 위에 냄비를 올렸다. 냄비에는 떡, 어묵, 당면, 달걀, 양배추 등이 들어갔다. 안주로 삼을 수 있고, 남는 양념에 밥이나 국수를 비벼 먹을 수 있게 하였다. 떡전골임에도 이를 떡볶이라 부르는 것에 어색해하지 않았다. 가래떡을 이용한 외식 음식으로 처음 알려진 것이 떡볶이이니 그 이름을 따른 것이다. 이 ‘냄비 떡볶이’가 신당동에서 비롯된 것인지는 알 수가 없다. 1970년대에 전국에서 동시다발로 생겼을 수가 있는데 특히 1970년대 중반 프로판가스의 보급이 이 냄비 떡볶이의 확산에 결정적 역할을 하였다. 어떻든 신당동의 냄비 떡볶이는 돈 없는 고삐리들에게 더없이 좋은 간식 또는 끼니 또 특히 안주가 되어주었다. 나와 내 친구가 닭집 다락에 숨었듯 서울의 고삐리들은 떡볶이집에 숨어들었다.
    #‘써니’의 시대는 가고
    신당동 떡볶이 골목이 불량(?) 고삐리에서 일반 고삐리로 고객이 바뀐 것은 1980년대 중반의 일이다. 그 당시 분식집에 디제이 박스를 두는 것이 유행이었는데 신당동 떡볶이집이 이를 따라하면서 분위기가 밝아졌다. 그때 대학생들의 공간으로는 음악감상실, 음악다방이 있었다. 젊음의 상징인 팝송을 들을 수 있는 곳이었다. 여기에는 고삐리가 들어갈 수 없었다. 고삐리들에게 음악감상실과 음악다방은 미래의 해방구로 보였을 것이다. 고삐리가 출입할 수 있는 분식집에 디제이 박스를 들인 일은 그들의 욕구를 정확히 파악한 뛰어난 상술의 결과였다. 분식집 디제이 박스가 바람처럼 번졌고 신당동 떡볶이집은 이 바람의 중심에 있었다. 이미 떡볶이 하나로 고삐리의 성지가 되어 있던 신당동은 그들의 해방구로 확실히 자리를 잡았다. 요즘의 신당동 떡볶이집에는 해방을 갈구하는 고삐리가 안 보인다. 대입 압박은 여전하지만 많은 부분에서 대체로 해방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 대신에, 한때 고삐리였던 이들이 옛날의 그 해방감을 맛보기 위해 신당동을 찾는다. 휴일이면 한때 고삐리였던 이들이 나이 어린 2세의 손을 잡고 신당동 떡볶이집 문을 밀고 들어온다. 극장은 사라지고 떡볶이집은 간판을 바꾸었지만 그 옛날의 떡볶이 맛은 여전하다. 값싼 식재료에 대충 달고 짜고 매운맛이 나는 게 전부다. 친구들끼리 하교하면서 200원씩 모아 한 판 걸게 먹던 그 시절의 그 떡볶이를 앞에 두고 식탁 건너의 2세를 본다. 한때 나에게도 주체할 수 없는 젊음이 있었다고 말하려다 만다. 보니엠의 ‘써니’가 흐른다. 신당동의 청춘도 그 경쾌한 음률을 따라 매끄럽게 흐른다.
    Munhwa         황교익 음식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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