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문득 돌아본 그때 그곳

<36> 낙원상가

浮萍草 2013. 12. 20. 18:08
    극장·악기점·옛맛집… 원하는 時空間 어디든 갈 수 있던 곳
    구수한 청국장과 따뜻한 잔치국수를 먹을 수 있는 재래시장이 지하에 있고 지상에는 관광버스와 자동차가 붐비는 4차로 도로와 사람이 오가는 활기찬 사거리가 있고 2층과 3층에는 온갖 빛깔의 악기가 거대한 교향악단을 이루는 악기상가가 있고 4층에는 예술 영화와 뮤지컬을 볼 수 있는 전용관이 3개나 있고 9층부터는 빛이 가득한 환상적인 중정을 은밀히 품고 있는 아파트가 있다. 최신 주상복합 분양 광고가 아니다. 1968년에 지어진 낙원상가 건물 이야기다. 한때 3층에는 볼링장이 있었고 4층 극장 건너편에는 유명한 카바레까지 있었다고 하니 춤과 음악 영화와 스포츠 등 인간의 모든 문화 예술적 욕구를 해소할 수 있는 궁극의 주상복합이라고 할 수 있다
    현재의 낙원상가. 왼쪽부터 악기상가, 실버영화관 입구, 인근에 실비식당이 즐비한 낙원상가 지하. 조한 교수 제공
    원상가가 서있는 이곳은 원래 한옥에 둘러싸인 재래시장터였다. 주변에는 술집과 요정이 많아서 악사들의 왕래가 많았고 광복 후에는 종로거리를 따라 나이트클럽이 들어서면서 연주자를 상대하는 악기점들이 일대에 자연스럽게 생겨 났다. 옛날부터 먹거리와 놀거리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낙원상가가 이곳에 세워지게 된 것은 문화 예술적 고민 때문이 아니라 서울시내 교통체증을 해결하기 위해서였다. 1960년대 들어서 차량 대수가 급격하게 증가하자, 시내에 남북 방향의 도로 건설이 절실했다. 당시 국내 최고 높이의 건물인 31층짜리 삼일빌딩을 계획하고 있던 서울시는 종로와 을지로를 연결하는 삼일로를 율곡로까지 연장하고 싶어 했다. 하지만 예산이 턱없이 부족했던 서울시는 묘안을 짜내는데 조합을 대표하는 민간 기업이 건물을 지어 시에 기부채납하고 대신 기업이 낙원상가와 아파트의 분양권을 갖도록 하는 것이었다. 낙원상가는 도로 위에 지어진 건물이 아니라 도로를 만들기 위해 지어진 건물인 것이다. 단순히 길을 뚫기 위해 시작한 건물에 주변의 길들이 층층이 쌓이면서 또 하나의 마을이 만들어졌다. 낙원상가와의 인연은 아주 어릴 때로 돌아간다. 안국동 쪽에서 낙원상가 쪽으로 가다보면 교동초등학교와 낙원떡집을 지나 낙원상가 못 미쳐 왼쪽에 종로세무서로 가는 길이 있다. 종로세무서 바로 옆에 원불교 종로교당이 있는데 바로 부모님이 인연을 맺으신 곳이다. 지금은 호텔과 오피스텔들이 들어섰지만 당시에는 한옥이 늘어선 조용한 길이었다. 3층짜리 종로교당은 어린 나에게는 거대한 공간이었고 어머니가 골목 입구 떡집에서 사주신 맛난 떡과 함께 ‘교당 가는 길’이라는 소중한 추억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하지만 이상한 것은, 그 추억의 조각에 낙원상가가 없다는 것이다. 심지어 낙원상가 너머 왁자지껄한 종로에 대한 기억도 없다. 하얀색의 낙원상가는 세상의 끝에 서있는 거대한 설산처럼 내 기억의 경계를 긋고 있는 것 같다. 교당과 떡집으로 기억되는 이쪽 세상은 조용하고 편안했다. 낙원상가의 존재를 알기 시작한 것은 허리우드극장 덕분이었다. 어린 시절 어머니와 함께 영화를 보는 것은 나에게 큰 즐거움이었는데 국민학교 1학년이던 1976년 광화문에 있던 국제극장에서 본 ‘킹콩’이 내 생애 최초의 영화였다. 같은 해 여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극장판 만화 영화인‘로보트 태권브이’를 대한극장에서 봤고 허리우드극장을 찾은 것도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무슨 영화를 봤는지는 전혀 기억이 나지 않고 어머니가 어린 동생을 등에 업고 힘겹게 계단을 올라갔던 기억만 난다. 어머니께 여쭤 보니‘스타워즈’를 본 것 같다고 하시는데, 확인해 보니 1977년 개봉한‘스타워즈’는 허리우드극장이 아니라 피카디리극장에서 개봉한 것으로 돼 있다. 어머니와 자주 찾던 국제극장이나 대한극장과 다르게 허리우드는 왠지 허름하고 지저분한 느낌이었다. 종로3가 쪽에서 버스에서 내려, 탑골공원 옆을 돌아 낙원상가로 가는 길은 포장마차와 노점이 가득했다. 낙원상가 4층에 있는 허리우드극장으로 올라가기 위해서는 돼지고기 냄새가 가득한 순대국밥 골목을 뚫고 가야 했다. 깔끔한 것을 좋아하시는 어머니나, 번잡한 것을 좋아하지 않던 나에게는 결코 유쾌한 경험은 아니었다. 즐겁게 본 영화 ‘고스트바스터즈’ 역시 어느 극장에서 봤는지 기억이 나질 않았는데 1984년에 허리우드극장에서 개봉했다고 하니 황당할 뿐이다. 가는 길이 즐겁지 않아서인지, 영화뿐 아니라 공간에 대한 기억마저 스스로 지워버린 것 같다. 나이가 들면서 영화에 대한 애정은 더 깊어졌지만 주로 인근 다른 극장을 찾으면서 낙원상가와 허리우드극장은 내 영화적 체험에서 사라진 채 아무런 깊이도 없는 길가의 거대한 영화 간판으로만 존재했다. 낙원상가를 하나의 공간으로 인지하기 시작한 것은 대학생이 돼 데이트 코스를 찾기 시작하면서였다. 나는 커피숍보다는 전통찻집을 선호했는데, 특히 시원한 미숫가루 한 그릇을 마실 수 있는 인사동 찻집을 종종 찾곤 했다. 주로 3호선 안국역에서 내려 인사동길 주변 골목길을 누비고 다녔는데 어느 날 널찍한 야외계단 앞에 우연히 서게 되었다. 낙원상가 2층 악기상가로 올라가는 계단이었다. 늦은 오후 눈부신 햇빛을 받으며 올라간 계단 위에는 새로운 세계가 펼쳐졌다. 그 넓은 공간을 가득히 메운 온갖 형형색색의 악기가 조명에 빤짝이는 모습은 테크니컬러의 진수 영화‘오즈의 마법사’의 한 장면을 보는 것 같았다. 길 양쪽에 늘어선 박스형 상점들의 악기들은 유리 속에서 보석처럼 반짝였고 가운데 아일랜드형 상점들의 악기들은 아름다운 몸매를 그대로 드러냈다. 삼거리도 있고, 골목길도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밴드음악이 전성기이던 1980년대에는 2층 상가 삼거리에 즉석 밴드 인력시장이 서기도 했다고 한다. 때로는 넘어갈 수 없는 거대한 기억의 장벽으로 때로는 내부 공간이 없는 영화 간판으로만 인지되던 낙원상가가 골목길로서 내 삶에 다시 들어온 것이다. 오랫동안 잊고 있던 허리우드극장을 다시 찾은 것은 2011년 가을이었다. 영화 ‘소매치기’를 통해 팬이 된 로베르 브레송 감독의 영화를 ‘프랑스 영화의 황금기: 1930∼1960’ 특별전에서 볼 수 있다는 소식에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았다. 주소를 보니 낙원상가 4층이었다. 평상시처럼 안국역에서 내려 인사동길을 지나 야외계단을 타고 2층 악기상가로 올라갔다. 하지만 서울아트시네마로 올라가는 길을 찾을 수 없었다. 한참을 헤매다 4층으로 올라가니 갑자기 극장 커튼이 양쪽으로 열리듯이 눈앞에 널찍한 야외 공간이 나타났다. 오른쪽에는 밋밋한 입면의 거대한 콘크리트 건물이 왼쪽에는 영화 간판 세 개가 사이좋게 붙어 있는 흰색 타일의 2층짜리 건물이 서로 마주보고 서있고 둘 사이로는 인사동 너머 고층 건물들이 시원하게 눈에 들어왔다. 드디어 서울아트시네마를 찾은 것이다. 표를 사서 로비로 들어서니, 젊은 사람은 거의 없고 노인분들만 계셨다. 옛날 프랑스 영화를 좋아하는 분들이라고 생각하고 극장 안으로 들어가니 아무도 없었다. 그 많던 분들은 도대체 어디로 사라졌는지 궁금했다. 영화가 끝나고 나오니 바로 옆 극장에서 사라졌던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나오셨다. 옆 극장은 바로 ‘허리우드 클래식: 실버영화관’이었다. 그제야 내가 거의 30년 만에 허리우드극장에 다시 돌아와 있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옛날의 허리우드극장은 아니었다. 1900석의 대한극장 다음으로 큰 1200석 공간은 세 개로 쪼개져 예술 영화 전용관 서울아트시네마 노인 전용 실버영화관 댄스 뮤지컬‘사춤’ 전용관으로 바뀌어 있었다. 1974년‘포세이돈 어드벤쳐’와 1977년 ‘타워링’ 등 한때 재난영화의 메카로 전성기를 누렸던 허리우드극장은 1989년 서울극장으로 시작된 복합상영관 바람과 1990년대 말 부터 본격적으로 밀려온 멀티플렉스 쓰나미를 힘겹게 단관으로 버텨내다 1997년에 ‘레드/그린/블루’라는 이름의 3개 상영관을 갖춘 복합상영관으로 재개관했다. 하지만 리모델링 후에도 극장 운영이 만만치 않아 결국 2005년에 필름포럼과 서울아트시네마가 2008년에는 필름포럼이 나간 자리에 다시 고전 영화 상영관인 ‘허리우드 클래식’과 ‘사춤’ 전용관이 들어왔고, 2009년에‘허리우드 클래식’은 다시 ‘허리우드 클래식: 실버영화관’으로 바뀌었다. 이곳에 정착한 각 영화관의 안타까운 사연도 참 비슷하다. 고전 및 예술 영화 등 일반 극장에서 보기 힘든 다양한 장르의 영화를 상영하는 서울아트시네마는 전용관도 없이 떠돌다 2005년에 이곳까지 왔고 관광호텔을 짓기 위해 2012년 7월에 철거된 노인 전용 극장 ‘서대문아트홀’(옛 화양극장)의 대표는 ‘허리우드 클래식 실버영화관’의 대표이기도 하다. 사회에서 소외된 노인과 극장에서 쫓겨난 예술 영화가 거대 자본과의 경쟁에서 밀려난 허리우드극장 자리에 새로 보금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실버영화관 입장료는 55세 이상은 2000원, 학생은 5000원, 일반인은 8000원이지만, 55세 이상 어르신을 같이 모셔오면 모두 2000원이다. 들어올 때 지나쳤던 야외 공간은 극장 앞 광장이자 낙원상가 4층 옥상정원이다. 중앙에 인공 잔디가 있고, 빙 둘러 목재로 마감한 느낌이 포근하다. 건너편에는 공연용 야외 스탠드도 있다. 들어올 때 오른편에 있던 건물은 낙원상가아파트다. 밋밋한 겉모습과 다르게 내부에는 아무도 모르는 빛이 가득한 중정이 숨겨져 있다. 갑자기 한 무리의 아시아계 젊은 외국인들이 엘리베이터를 나와 로비로 들어갔다. ‘사춤’을 보러온 관광객이었다. 녹색 문이 열리고, 말쑥하게 차려입으신 할아버지 할머니 몇 분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탔다. 3층에서 문이 열리고, 가죽 재킷에 기타를 멘 청년이 걸어 들어왔다. 다시 2층 문이 열리고, 이번에는 엄마와 아들이 같이 탔다. 남자아이는 한 손에 검은색 악기 케이스를 들고 있다. 1층 문이 열리고 엄마와 아들 기타를 멘 청년,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차례로 걸어 나갔다. 나가는 뒷모습을 보고 있으니 불현듯이 이렇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는 엘리베이터가 이 세상에 또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다. 길 건너편으로 낙원상가아파트로 올라가는 또 다른 로비가 보인다. 밖으로 나오니 주변 건물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낡고 허름한 박공지붕의 2층집이 눈에 들어온다. 아주 오래된 ‘소문난 집 추어탕’이라는 간판이 마치 1950∼1960년대 풍경을 연출하기 위해 만든 세트장 같다. 창에는 ‘해장국 2000원’이라고 붙어 있는데 주인분께 여쭤 보니 처음 장사를 시작하던 1955년에는 350원이었다고 한다. 1968년에 세워진 낙원상가보다 13년 전 이야기다. 이 동네 진정한 터줏대감을 만난 것이다. 1945년 프랑스 영화 ‘블로뉴 숲의 여인들’을 보러 나온 하루가 1969년에 지어진 허리우드극장을 거쳐 1955년 이래 변함없는 해장국 맛으로 마무리되고 있었다. 그 사이에 나는 고전영화를 사랑하는 노인분들과, 댄스뮤지컬을 보러온 외국인들과 젊은 기타리스트와 악기를 사러온 엄마와 아들 그리고 50년 넘게 이 자리를 지켜온 해장국집 주인을 만났다. 클로즈업된 손의 움직임이 파편화된 공간을 연결하는 브레송 감독의 영화‘소매치기’처럼, 다양한 장소와 다양한 시간을 넘나들며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나만의 영화를 만든 하루였다. 초겨울 어느 날 익선동 한옥마을을 한 바퀴 돌고 다시 낙원상가 앞에 섰다. 앞으로 가면 관광객과 젊음이 넘치는 인사동 길로 갈 수 있고 오른쪽으로 가면 떡집골목을 지나 구한말의 역사를 담고 있는 운현궁과 천도교 중앙대교당 그리고 북촌까지 갈 수 있고 왼쪽으로 가면 순대국밥 골목을 지나 삼일운동의 발상지이자 최초의 근대적인 공원인 탑골공원 그리고 종로까지 갈 수 있다. 아니면 낙원상가 지하 재래시장으로 내려가 따뜻한 국수 한 그릇을 할 수도 있고 2층으로 올라가 잊고 있던 음악의 꿈을 다시 살려 볼 수도 있고 4층으로 올라가 영화 한 편을 볼 수도 있다. 오늘은 또 어떤 시공간 속에서 나만의 영화를 만들어갈지 기대된다. 어느 길로 가야 할지, 어느 공간으로 가야 할지 어느 시간으로 가야 할지 결정을 내리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자본의 논리와 시간의 가치를 망각하는 도시미관에 대한 집착이 다양한 선택의 기회 자체를 말살하고 특정한 조망과 형태를 강요하는 요즈음, 이렇게 다양한 공간과 시간 사이에서 고민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너무 행복하다. 햇살이 따사롭다. 오늘은 이 따사로운 햇살을 따라가 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Munhwa         조한 홍익대 건축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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