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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 밀면의 고향, 부산 우암동 피란민촌

浮萍草 2013. 11. 2. 09:34
    1·4후퇴때 北실향민 정착… 부산 밀국수+함경 회국수 ‘밀냉면’엔 남북의 맛이…
    부산이 지금처럼 넓어진 데는 한국전쟁이 가장 큰 몫을 했다. 
    1950년부터 부산은 대한민국의 임시수도가 되었고 전국에서 피란민들이 몰려들었다. 
    1950년 12월, 흥남철수로 10만 명의 함경도 사람들이 거제도 등에 집단으로 정착한다. 
    1951년 1·4후퇴 때는 더 많은 북한 실향민들이 남으로 내려와 곳곳에 정착한다. 
    북한과의 전쟁이란 특수한 상황 때문에 북한 출신 실향민의 거주와 이동은 자유롭지 못했지만 연고자가 있는 사람들은 부산에도 정착이 
    허락됐다. 
    1951년부터 부산에는 북한 출신 실향민들이 차린 냉면집들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부산에 피란을 내려온 함흥지역 사람들이 하나 둘씩 냉면집을 열었다. 1954년에 촬영된 부산 중구 남포동의 자갈치시장 옆 함흥냉면. 클리포드 제공

    1951년 부산 중구 신창동의 고려정 냉면. 김한근 제공

    1953년 전쟁이 끝나자 남한 출신의 실향민들은 고향으로 돌아갔지만 북한 출신들은 남한 사회에 정착해야 했다. 부산에는 전쟁 때부터 피란민 정착촌이 세워지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살지 않던 공동묘지, 미군부대 막사 같은 터는 물론 가파른 언덕들에 정착촌이 세워졌다. 남구 우암동은 일제강점기 때 한반도의 소를 검역하고 반출하던 곳이었다. 1945년 이후에 일본에서 귀환한 동포들이 먼저 터를 잡았다. 한국전쟁 때 이곳에 ‘적기피란민수용소’가 들어섰고 전쟁 후에는 정착촌이 건설된다. 지금 우암동은 산 끝까지 집들이 빈틈없이 들어서 있다. 좁고 가파른 골목들 사이로 집들이 바위처럼 붙어있다. 집들 사이로 드문드문 오래된 목욕탕의 커다란 굴뚝이 기념비처럼 우뚝 서 있지만 여전히 영업 중이다. 부산항을 뒤로하고 걸어서 언덕을 오분 정도 오르다 보면 베이스캠프처럼 평평한 땅이 나온다. 그 땅 위로 다시 가파른 언덕이 길게 이어져 있다. 평평한 땅에는 작은 시장이 있다. 그 작은 시장 한편에 옛 모습을 간직한 채 집 몇 채가 연결되어 있는 ‘내호냉면’이 있다. 미로 같은 가게 안으로 들어서면 이 집의 창업자 이영순 할머니 정한금 할머니의 사진이 1대 2대 사장이란 설명과 함께 붙어있다. 부산을 대표하는 음식문화인 밀면은 내호냉면에서 시작되었다. 돈도 많이 벌고 유명해졌지만 내호냉면 주인들은 이곳을 떠나지 않았다. 덕분에 오래되고 복잡한 건물은 창업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비빔냉면,물냉면,비빔밀면,밀면,온면,가오리무침 같은 벽에 붙은 메뉴는 이 집의 성격을 그대로 보여준다. 북한에서 즐겨 먹는 음식과 부산에서 만들어진 음식들이다. 밀면은 함경도식 회국수 혹은 감자농마국수, 평안도의 물냉면 같은 북한식 국수와 부산의 소면(素麵)문화가 결합돼 만들어진 복합 음식 문화 체계다. 가게 이름 앞에 붙은 ‘내호’는 함경도 함흥의 내호(內湖)지역을 말한다. 내호는 원래 흥남의 비료공장 옆에 있던 지역으로 일제강점기에 번성했던 곳이었다. 흥남은 현재 함흥시로 통합되었다. 함흥과 흥남은 공업 시설이 많았던 탓에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많이 살았고 경기가 좋았다. 내호에는 한국인 가게들이 많았다. 내호냉면 분들의 이야기로는 내호냉면의 창업자 이영순 할머니는 1919년부터 내호에서‘동춘면옥’이라는 국숫집을 운영했다고 한다. 지금 함흥에는 ‘신흥관’이라는 감자농마국수의 명가가 있다. 일제강점기는 물론 한국전쟁 이전까지 함흥냉면이란 말은 사용된 적이 없었다. 일제강점기에 냉면으로 유명했던 평양에서도 냉면은 보통은 ‘국수’로 불렀지만 냉면이란 말도 제법 사용되었다. 함흥과 흥남의 국수는 ‘회국수’ 혹은 ‘농마국수’로 불렀다. 당시 회국수는 지금 남한에서 먹는 회국수와 달리 국물이 있었다는 것이 일관된 증언이다. 감자전분이나 고구마전분으로 만든 질긴 면발을 돼지고기 육수에 담아내고 꾸미로 함경도의 명물인 가자미식해를 얹은 것이 회국수다. 시인 ‘백석’(1912∼1996)은 가자미를 무척 좋아했다. 그는 신문 기사에서 ‘하기야도 내가 친하기로야 가재미가 빠질겝네 회국수에 들어 일미이고 식혜에 들어 절미지’(1938년 6월 7일자 <동아일보>)라고 적고 있는데 이 기사는 현재까지 확인된 회국수에 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이다. 돼지고기 꾸미를 얹은 것은 육(肉)국수로 불렀던 기록이 있는 것을 봐서 국수에 얹는 꾸미로 국수를 구분했던 것 같다. 이외에도 함경도의 국수는‘감저국수’(1924년 1월 1일 <개벽> 43호) ‘돼지고기 친 국수’(1924년 11월 1일 <개벽> 53호)‘전분국수’(1925년 4월 13일 <동아일보>) 등으로 다양하게 불렀다. 1954년 우암동에 정착한 이영순 씨는 내호냉면을 열고 장사를 시작했다. 첫 출발은 당연히 고향에서 먹던 회국수 같은 감자전분을 이용한 국수였다. 함경도 실향민들은 이 국수를 좋아했지만 현지인들은 질긴 면발에 매운맛이 강한 회국수에 거부감을 보였다. 어려움은 또 있었다. 재료를 구하기가 쉽지 않았다. 추운 지방에서 나는 감자 또는 감자전분을 구하기도 만만치 않았다. 게다가 가장 중요한 꾸미인 가자미는 구하기도 힘들고 가자미식해를 만드는 것도 따스한 날씨 때문에 어려움이 많았다. 내호냉면 초창기에는 그래서 북한 실향민들에게는 회국수 같은 냉면을 팔았고 현지인들에게는 밀국수를 팔았다. 일제강점기부터 부산 시내에는 일본식 마른 면인 소면문화가 구포역과 구포시장을 중심으로 만개해 있었다. 마른 면은 가격도 싸고 보관도 용이했고 무엇보다 만들어 먹기 쉬웠다. 1960년대 인스턴트 라면이 나오기 전까지 마른 면인 소면은 간편식의 대명사였다. 명, 청과의 무역과 일본과의 교역만을 제한적으로 해왔던 조선에서 부산의 왜관은 일본과의 유일한 교역창구였다. 소금을 밀가루와 섞어 반죽한 뒤 기름을 발라 말려 만든 마른 면인 건면(乾麵)은 소면이라고 불렀다. 조선시대 일본에서 소면을 들여온 기록들은 제법 남아있다. 조선시대 경상도의 물산이 모여들던 감동창이 있던 구포에 1905년 경부선 구포역이 생기자 더욱 구포는 번성하게 된다. 당시 한반도에서 밀 생산이 가장 많았던 곳은 황해도 일대였다. 특히 사리원이 유명했다. 황해도의 밀은 기차에 실려 구포까지 운반됐다. 일제강점기에 구포역 주변에는 ‘남선곡산’ 같은 밀가루 가공공장이 생겨나고 국수공장들이 들어섰다. 일제강점기부터 유명했던 구포국수는 전쟁 이후 밀려든 피란민들에게는 구원의 식량이었다. 구포의 아낙네들은 기차를 타고 부산 시내 전역을 돌며 구포국수를 팔았다. 소면을 만들기에 좋은 적합한 기후도 구포국수가 부산을 대표하는 소면으로 자리 잡게 된 원인이었다. 한국전쟁을 거치며 구포국수는 부산의 대중적인 식재료가 된다. 이후 1970년대 부산의 산업이 발달하면서 경상도 일대에서 모여든 노동자들 덕에 구포국수는 전성기를 맞는다. 하지만 1980년대 이후 식생활의 변화와 재벌 회사들의 지역 국수 공장 인수 등으로 구포국수는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현재 구포에는 국수공장이 하나만 남아있다. 구포시장 주변에 가득했던 공장들은 김해와 창원 등으로 이전했고 국수가게들도 구포시장과 주변에 몇 개만 남아있다. 하지만 구포국수의 명맥이 끊긴 것 아니다. 최근 들어 구포국수는 지역 음식에 대한 관심 덕에 판매량이 늘어나고 있다. 2012년 내호냉면을 취재할 때 내호냉면 앞 길에서 트럭에 식품을 파는 현대판 보부상을 만났다. 그의 차에 구포국수가 실려있었다. 오랫동안 그는 내호냉면 앞에서 언덕을 가득 메운 사람들에게 구포국수를 팔았다고 했다. 부산사람들이 가장 좋아하는 밀가루국수인 구포국수 문화와 전쟁 이후 구호물자의 대명사였던 밀가루의 대중화 같은 환경은 밀면 탄생의 필요충분조건들이었다. 냉면과 국수를 함께 팔던 1959년 내호냉면에서 밀가루 70%와 고구마전분 30%를 섞은 밀냉면이 만들어진다. 함경도식 전분국수와 부산식 밀국수의 장점만을 취한 밀냉면이 만들어지자마자 사람들은 열렬한 지지를 보낸다. 한국인에게 오랫동안 국수는 밀가루가 아닌 메밀이 주재료였다. 밀가루로 만든 국수인 경우에는 밀국수란 이름이 붙었다. 부산에 대거 정착한 함경도 사람들은 고향에서 먹던 국수를 회국수라고 부르기도 했지만 함흥냉면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고향을 떠난 사람들의 한결같은 이름 붙이기다. 1950년대 초반의 부산을 찍은 사진에는 평양냉면, 함흥냉면이란 문구들이 자주 보인다. 내호냉면에서는 밀가루와 고구마전분을 섞은 면을 밀냉면이라 이름을 붙였지만 사람들은 밀냉면을 밀면으로도 줄여 불렀다. 지금도 밀냉면이란 이름은 부산의 밀면집 메뉴나 간판에 남아있다. 1960년대에는 밀냉면과 더불어 경상도냉면, 부산냉면이란 말도 쓰였다. 우암동과 더불어 북한 실향민들이 대거 정착한 당감동에도 1954년 이후‘본정냉면’‘흥남냉면’이 당감시장 주변에 자리를 잡았고‘당감제일냉면’‘시민냉면’같은 집들이 여전히 영업을 하고 있다. 밀면의 1세대에 속하는 집들은 한결같이 ‘냉면’이란 상호를 사용하고 있다. 냉면과 밀국수가 밀면으로 변화하는 변화기에 세워진 집들의 공통된 특징이다. 내호냉면에서 처음 만들어진 밀면은 이후 진화와 발전을 한다. 1966년 개금동에서 문을 연‘개금밀면’과 1970년대 초 가야동에서 영업을 시작한 ‘가야밀면’은 100%로 밀가루로 만든 면을 닭고기와 한약재 등을 이용한 육수에 말아 낸 밀면을 만들어 낸다. 밀면이 냉면의 영향을 벗어나 완전하게 새롭고 독립적인 음식이 된 것은 1970년대 가야밀면과 개금밀면의 성장과 궤를 같이한다. 또 하나 밀면의 발전에 빼놓을 수 없는 것은 ‘기계식 밀면’이다. 지금도 부산에는 밀면집뿐만 아니라 중국집에서도 기계식밀면이란 단어를 쓰는 집들이 있다. 기계식밀면은 손으로 밀가루를 반죽해 기계에서 면을 뽑아내는 ‘반(半)수제밀면’을 말한다. 1970년대 이전에는 면을 방앗간에서 가져다 쓰는 경우가 많았는데 방부제를 치는 등 질이 좋지 않았다. 밀면을 뽑는 기계가 나오자 사람들이 손으로 가루를 반죽한 뒤 면을 만들면서 면발의 수준이 높아졌다. 함경도식 국수는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밀면같이 새로운 정체성을 지닌 음식으로 발전하기도 하지만 함흥냉면이란 이름을 달고 변형된 음식으로 바뀌기도 한다. 함흥식 국수 문화가 강하게 남아있는 곳으로 속초와 서울이 있다. 흥남철수와 1·4후퇴를 겪으면 대거 남으로 내려온 함경도 사람들은 고향과 가장 가까운 땅인 속초에 모여들었다. 양양군의 작은 포구였던 속초는 실향민의 비율이 지금까지도 가장 높은 곳이다. 1951년 속초의 중앙동과 건너편 아바이마을에 함경도 사람들이 터를 잡는다. 1951년 중앙동에 함흥식 국숫집인‘함흥냉면옥’이 세워져 오늘날까지 이어지고 있다. 함흥냉면으로 유명한 아바이마을에 냉면집이 들어선 것은 1970년대 초반이었다. 속초에 정착한 함경도 사람들도 고향과 다른 기후와 재료 때문에 함흥식 국수의 변형은 불가피했다. 꾸미로 가장 많이 먹던 가자미는 속초에서 잘 잡히지 않았다. 가자미 대신에 명태식해가 꾸미로 올라가고 감자전분 대신에 상대적으로 덜 졸깃한 고구마전분이 면의 중심이 되었다. 서울의 경우는 중부시장 주변 오장동에 함경도 사람들이 터를 잡는다. 중부시장은 속초의 함경도 사람들이 생산한 명태 같은 건어물을 파는 유통의 중심지였다. 서울의 함경도식 국수는 속초보다 더 심한 변화를 겪는다. 고구마전분이 중심이 된 면발은 비슷했지만 함흥의 국수보다 매운맛은 순해졌고 가자미 대신 가오리 혹은 양지머리 같은 소고기 편육이 꾸미로 올라갔다. 가장 큰 변화는 국물이 사라진 비빔냉면이 탄생한 것이다. 지금 일반 사람들이 함흥냉면 하면 떠올리는 회냉면 비빔냉면은 함흥식 국수의 변형이다. 오장동 냉면 거리는 1950년대 중반 이후에 형성됐다. 함경도식 국수는 멀리 일본에서도 남한사회와 같은 과정을 거친다. 일본의 동북부 모리오카(盛岡)에는 모리오카 냉면이 있다. 함흥에서 태어난 재일교포 양용철 씨는 1954년 ‘식도원’이란 식당을 개업하고 함흥식 냉면을 메뉴로 내놓았지만 너무 질기고 맵다는 이유 때문에 장사가 안되는 것을 넘어서 일본인들의 비난을 받는다. 이후 평양식 냉면법을 가미하고 일본인들의 입맛에 맞춘 달고 순한 냉면을 내놓아 인기를 얻어 모리오카의 명물이 된다. 1987년 재일교포 2세에 의해 밀가루에 밤가루를 섞어 단맛이 나는 면발과 걸쭉한 육수에 수박 등을 얹은 변형된 모리오카 냉면이 만들어진다. 새로운 모리오카냉면은 단맛을 좋아하는 일본인들에게 인기를 얻어 전국적인 음식이 되었다. 밀면이 걸어온 길을 고스란히 모리오카 냉면이 밟고 성공한 것이다. 음식은 고향을 떠난 사람들의 기억 속에서 시작돼 현지의 사정에 맞춰 변화 발전하는 것이다. 밀면 한 그릇에 혼돈의 현대사와 국수의 문화사가 그대로 담겨 있다.
    Munhwa         박정배 음식칼럼니스트·‘음식강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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