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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이문설농탕

浮萍草 2013. 10. 25. 10:33
    日帝때 지은 기묘한 2층 한옥… 담백한 고기국물에 숙취가 싹
    지난 1982년 1월 5일 통행금지가 해제되었다. 
    1945년 9월부터 37년간 계속된 ‘침묵의 시간’이 끝난 것이다. 
    1986년 아시안게임과 1988년 올림픽을 앞두고 내려진 조치였지만 봉인이 풀린 밤의 문화는 만개하기 시작한다. 
    심야다방, 심야극장, 심야만화방이 생겨나고 포장마차와 술집들은 술꾼들로 문전성시를 이뤘다. 
    사람들이 새벽에 움직이자 심야택시 기사들도 호황 속에 늘어났다. 
    술로 밤을 새운 술꾼들은 해장을 위해서 심야에 움직이는 사람들을 실어나르는 기사들은 허기를 채우기 위해 새벽에 해장국집과 설렁탕
    집을 들락거렸다. 
    설렁탕은 원래 남대문 밖의 새벽어시장인 칠패시장(七牌市場)에 모인 어부들과 상인들이 주로 먹던 새벽 음식이었다. 
    구한말 유행하기 시작했던 설렁탕집의 새벽이 다시 찾아온 것이다.

    일제강점기부터 있었던 서울 종로구 공평동의 이문설농탕 전경. 초대 부통령 이시영, ‘장군의 아들’ 김두한 등 유명인들의 단골집으로 유명한 이 이문설농탕은
    2011년 견지동으로 이전했다. 박정배 씨 제공
    1974년부터 시작된 강남 개발과 올림픽 때문에 강남이 본격적으로 개발되기 시작했지만 1980년대 초반 강북은 여전히 서울의 중심지였다. 광화문에서 종로로 이어지는 길 양 옆은 밤이면 젊은이들로 넘쳐났다. 1982년 대학 새내기였던 필자도 대학 친구들과 어울려 종로 바닥을 헤집고 다녔다. 새벽까지 이어지던 술자리는 청진동 해장국집에서 끝나는 경우가 많았다. 실향민 2세 친구들은 외식에 익숙했다. 술을 많이 먹은 다음날에는 ‘이문설농탕’에 들러 설렁탕 한 그릇으로 숙취를 풀었다. 집에서는 만들기도 까다롭고 제맛을 내는 것은 더 어려운 설렁탕의 은근하고 깊은 고기 맛 때문에 주머니 사정이 넉넉했던 실향민 2세 친구들에 기대어 설렁탕집을 드나드는 날이 조금씩 늘어났다. 종각사거리 공평빌딩 뒤에 있던 이문설농탕은 기묘한 모습의 2층 한옥집에서 설렁탕을 팔았다. 20세기 초에 영업을 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이문설농탕은 2011년에 재개발에 밀려 견지동 뒷골목으로 자리를 옮겼다. 공평동 이문설농탕의 한옥 식당은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지만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있다. 350석이나 되는 커다란 실내에는 언제나 사람들이 가득했다. 1980년대 초 이곳을 처음 방문했을 때 나는 그곳을 가득 메운 노인들의 모습을 보고 약간의 충격을 받았다. 견지동 이문설농탕에도 여전히 노인들은 손님의 반 이상을 차지한다. 수십 년 단골들이 담백한 고기국물에 인이 밴 입맛을 끊지 못하기 때문이다. 이문설농탕에서 30년 단골은 명함도 못 내민다. 이문설농탕은 서울 외식의 중심에 있던 설렁탕 역사의 커다란 축을 담당했던 음식문화의 살아있는 박물관이다.
    역사가 60년된 문화옥의 설렁탕
    설렁탕은 외식이 본격화한 19세기부터 항상 중심에 있던 음식이었다. 설렁탕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1897년 1월 21일 일본 요코하마(橫濱)에서 발간된 게일(Gale J S )의‘한영자뎐 (韓英字典)’에 나오는‘셜넝탕 A stew of beef intestines’(소의 내장으로 끓인 국)이다. 설렁탕은 셜렁탕 셜넝탕 설넝탕 설녕탕 설농탕(雪濃湯) 등 1950년대까지 표기가 통일되지 않고 사용된다. 구한말 당시 가장 보편적 외식은 탕반(湯飯)이었다. 고기 육수에 간장으로 간을 하고 고기를 넉넉하게 넣은‘장국밥’은 양반과 부자들의 탕반이었고 소의 모든 부위를 넣고 끓여낸 뒤 소금으로 간을 한 설렁탕은 서민 탕반의 대명사였다. 19세기말부터 널리 대중화된 설렁탕은 대규모 행사와 외식에 적합한 음식이었다. 밥을 미리 지어 놓고 국을 끓여 뜨거운 국물에 찬밥을 토렴하면 한국인이 가장 좋아하는 ‘따스한 국밥’이 완성된다. 당시 설렁탕집은 소머리 뼈를 가게 앞에 진열해 놓았다. 1920년대의 신문과 잡지들은 한결같이 설렁탕을 서울의 명물로 기록하고 있다. ‘탕반 하면 대구가 따라 붙는 것처럼 설넝탕 하면 서울(경성)이 따라 붙는다. 이만큼 설넝탕은 서울의 명물이다. 설넝탕 팔지 않는 음식점은 껄넝껄넝한 음식점이다. ’(1926년 8월 11일자 ‘동아일보’) 20세기 이전에 서울에서 설렁탕을 가장 잘 하는 곳은 남대문 밖 잠바위골(현재 중림동)이었다. 1929년 9월 27일자 ‘별건곤’ 제23호에 실린 ‘경성명물집’이란 기사에 의하면 ‘남문(南門) 밖 잠배(紫巖) (잠바위골) 설넝탕을 제일로 쳐서 동지 섣달 추운 밤에도 10여 리 밖에 있는 사람들이 마치 여름날에 정릉 물맞이나 악바위골 약수 먹으러 가듯이 쟁투를 하고 갔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남대문 밖의 잠배가 유명해진 것은 남대문 밖에 형성된 칠패시장 때문이었다. 한강에서 올라오는 어물과 삼남의 물산들은 한강을 거쳐 칠패시장을 통해 유통되었다.
    남대문 안쪽에 있던 선혜청(宣惠廳) 창내장(倉內場)과 바깥의 칠패시장을 오가는 사람들은 잠배에서 설렁탕 한 그릇을 먹고 하루를 시작했다. 잠배에는 음식점 거리가 있었다. 칠패시장은 어물을 주로 팔았기 때문에 새벽부터 장이 열렸다. 새벽에 거래가 이루어지고 남대문이 열리면 상인들과 사람들은 ‘노도와 같은 기세로’ 성문 안으로 들어가 물건을 팔았다. 그러나 번성하던 칠패시장은 1900년 경인철도 남대문정거장이 세워지면서 급속하게 몰락한다. 철도가 한강과 남대문 사이의 흐름을 막은 것이었다. 게다가 남대문 안쪽에는 남대문시장이 활성화되면서 남대문 밖의 상권은 급속도로 사라진다. 남대문에서 남산과 을지로 충무로까지 일본인들에 의한 상권이 형성되고 종로를 중심으로 한인상점들이 형성되면서 설렁탕 집들도 자연스럽게 경성 시내에 자리를 잡게 된다. 지금 시청 건너편 소공동에 있는‘잼배옥’은 당시 잠배설렁탕의 세도를 조금이나마 떠올릴 수 있게 하는 오래된 식당이다. 1933년 잠바위골에서 문을 연 후 6·25전쟁을 거치면서 몇 번 장소를 옮긴 뒤 1974년부터 지금의 장소에서 설렁탕을 팔고 있다. 칠패시장이 사라진 후 설렁탕의 명성은 종로로 옮겨간다. 서울 YMCA와 종로타워 빌딩 뒤편인 이문(里門)에는 검문소가 있었고 나무시장이 주변에 있었다. 이문 안쪽에는 ‘이문’이란 이름을 단 식당들이 많았다. 구한말에 세워졌다가 사라진‘이문옥’과 20세기 초반에 세워진 것으로 알려진 ‘이문식당’ 1920년대에 기록이 남아있는‘이문설농탕’이 모두 설렁탕을 팔던 식당이었다. 현재의 이문설농탕은 이문식당을 인수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재 이문설농탕의 대표 전성근 씨에 의하면 ‘홍’씨 성을 가진 설렁탕집 주인에게서 ‘양’씨 성의 주인이 일제강점기에 식당을 인수했다고 한다. 1960년에 전 씨의 어머니인 유원석(2002년 작고) 씨가 ‘양’씨에게서 가게를 인수한 뒤 1981년 지금의 주인인 아들에게 대물림된 것이라 한다. 이문식당은 일제강점기 내내 설렁탕의 대명사였다. 이문식당과 주인 홍종환(洪鍾煥)은 일제강점기 사회면을 여러 번 장식한다. 노동자들에게 떡국을 기증하는 등 미담의 주인공으로 여러 번 등장했고 이문식당 배달부들의 횡포와 여름철 냉면을 팔다가 종로경찰서에 단속되는 일들도 빈번했다. 설렁탕은 지금의 짜장면처럼 당시에는 대표적인 배달음식이었다. ‘설렁탕 그릇을 목판에 담아 어깨에 메고 자전거를 타고 다니며’배달을 했다. 이문식당에만 1939년에 십수 명의 배달부가 있었다. 관공서와 경찰서가 단골 주문처였다. 이문식당 근처에 있던 종로경찰서는 설렁탕을 자주 시켜먹었다. 경찰들은 물론 피의자들도 설렁탕을 먹고 ‘숨을 내쉰’ 뒤 취조를 받았다. 설렁탕 집들은 새벽부터 장사를 하거나 아예 하루종일 하는 것이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밤낮이 없는 경찰서의 단골 음식이 된 것이다. 이문식당 주인 홍종환은 일제강점기 서울의 고급 요리점을 대표하던 ‘명월관’ 주인 이시우와 어울려 당구를 즐겼다. 종로를 주름잡던 김두한은 한때 이문식당에서 종업원으로 일한 적도 있었던 이문식당의 단골이었다. ‘이문식당’과 더불어 당시 유명했던 종로 1가의 설렁탕집 ‘일삼옥’의 운영자는 홍종화였고(1925년 7월 18일자 ‘조선일보’에는‘일삼옥’ 주인이 홍순구로 나옴), 종로 4가 ‘이남옥’ 주인은 홍종관이었다. 이름을 보면 이문식당, 일삼옥, 이남옥의 주인들은 형제이거나 친인척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최근까지 공평동에서 영업을 하던 이문설농탕의 자리는 원래 이문식당이 있던 자리가 아니었다. 음식 에세이로 유명한 홍승면 선생은 ‘백미백상’에서 원래 이문식당은 공평동 이문설농탕 자리와는 조금 떨어진 주차장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1960년대에도 이문설농탕은 유명인사들의 단골집이었다.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영웅 손기정과 이시영 부통령 같은 여러 계층의 사람들이 가리지 않고 사람들 틈에 섞여 설렁탕을 먹었다. 1980년대에는 운동선수들이 뻔질나게 드나들었다. 식당 앞에 있던 YMCA에는 당시 체육관이 있었다. 이곳을 드나들던 유도선수들이 이문설농탕을 들락거렸고 유도선수들의 소개로 레슬링 복싱 선수들이 차례로 단골이 되었다. LA올림픽 금메달리스트 하형주나 1980년대 한국 복싱 전성기를 이끈 돌주먹 문성길도 이 집의 단골이었다. 1982년에는 운동선수들을 중심으로 ‘이문회’란 친목단체를 만들어 활동했을 정도로 운동선수들과 이 집 주인 전 씨와는 친분이 깊었다. 1990년대 인사동에서 출판사를 운영할 때 난 이 집을 대학시절보다 더 자주 드나들었다. 천장이 높은 목조 한옥과 그 공간을 가득 메운 사람들 틈에 끼어 테이블마다 놓인 김치와 깍두기에 양지, 우설, 지라, 이리 같은 수육과 담백한 설렁탕 한 그릇에 소주를 곁들이며 할아버지들이 왜 그리 이 집을 자주 들락거렸는지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설렁탕은 지금도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외식 중 하나이지만 설렁탕의 전성기는 일제강점기였다. 당시 종로와 청계천 주변에는 설렁탕집들이 빼곡하게 있었다. 1920년 경성 내외에 25군데(1920년 10월 8일자 ‘매일신보’) 정도였던 설렁탕집은 1924년에 100군데(1924년 6월 28일자 ‘동아일보’, 경성부재무당국조사)로 급격하게 늘어난다. 1920년대 중반이 되자 ‘민중의 요구가 답지하고 조선사람의 식성에 적합한 설렁탕은 실로 조선음식계의 패왕’(1924년 10월 2일자 ‘매일신보’)으로 불렸다. 전성기를 구가하던 서울의 설렁탕은 6·25전쟁 이후 된서리를 맞는다. 19세기 후반에 최초의 기록이 남아있지만 설렁탕은 그전부터 먹어왔을 것이다. 설렁탕이 어떻게 시작되었는지에 대한 이야기에 가장 많이 등장하는 것은 선농단 제사관련설이다. 선농단(先農壇)에서 세종대왕이 제사를 지낼 때 큰 비가 내려 발이 묶이자 배고픈 사람들을 위해 임금이 명을 내려 제사 지냈던 소를 잡아 선농단에 참석한 사람들과 나눠먹었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1937년 10월 22일자 ‘매일신보’에 처음으로 등장한다. 이 기사 말고는 어느 자료를 근거로 했는지가 불분명한 탓에 선농단의 설렁탕설은 믿기 어렵다. 설렁탕의 어원과 기원에 관한 이야기는 선농단설 말고도 많다. ‘고기 삶은 물’을 뜻하는 ‘공탕(空湯)’의 몽고말인 ‘슐루(슈루)’가 음운 변화를 거쳐 ‘설렁’이 되었다는 설, 개성의 ‘설령(薛鈴)’이라는 사람이 고려 멸망 후 한양으로 옮겨 탕반 장사를 시작하면서 그의 이름 설령에서 설렁이 유래했다는 설, 일본의 역사학자이자 언어학자이면서 이두 전문가였던 아유카이 후사노신(鮎貝房之進)이 1938년에 쓴 ‘잡고(雜攷)’에 ‘설넝은 잡(雜)이다’라고 말한 ‘설렁 잡설’까지 설렁탕의 어원과 기원에 관한 이야기는 많고 다양하다. 외식이 본격화한 19세기 말 한성에서 경성으로, 다시 서울로 수도의 이름이 변하는 격랑의 시대 속에서 설렁탕은 서울 외식문화의 중심에 있었다. 설렁탕은 6·25전쟁 이후 화학조미료와 분유를 넣은 짝퉁 설렁탕에 치이고, 서양 음식에 길들여진 젊은 입맛에 밀려 침체가 계속되고 있다. 하지만 탕과 밥을 먹는 한민족의 음식문화가 지속되는 한 설렁탕도 살아 남을 게 분명하다. 강북의 도심에는 이문설농탕, 잼배옥 같은 오래된 설렁탕집들도 아직 남아있고 강남에는 유기농 설렁탕, 최고급 한우 설렁탕 같은 새로운 설렁탕이 등장하고 있다. 2013년 초 공평동 이문설농탕 건물 옆 음식골목에서 불이 나 오래된 식당들이 한순간에 사라졌다. 오래된 식당 하나가 사라지면 그곳을 거쳐간 수많은 사람들의 추억과 거리를 가득 메웠던 이야기도 함께 사라진다.
    Munhwa         박정배 음식칼럼니스트·‘음식강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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