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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9> 60년대 쇼무대 지존 워커힐호텔

浮萍草 2013. 10. 12. 09:57
    루이 암스트롱 목말 타고 노래한 윤복희… 酒黨들엔 ‘꿈의 성지’
    1960년대 초반 서울에 거주하는 남성 애주가들이 순례할 만한 물 좋은 유흥업소는 어떤 곳이 있었을까? 
    유흥가의 중심지 명동에 다방 다음으로 많았던 것이 ‘바’였다. 
    바걸이 동석해 양주를 따라주는 비교적 소규모 업소였다. 
    음악은 양주에 어울리게 재즈나 샹송 등 수준 높은 음악이 음반으로 재생됐다. 
    바의 매력은 등받이가 높은 좌석이 있어서 바걸과 은밀한 행위도 가능하다는 점이었다. 
    여기서 적당히 취하면 입가심 차원에서 갈 수 있었던 곳이 비어홀(또는 맥주홀)이었다. 
    바보다는 규모가 컸던 이곳은 여종업원이 술을 따라주지만 바걸보다는 학력이 높았고 손님 좌석에 앉지 않고 서서 따라주는 점이 바와는 
    달랐다. 
    비어홀은 소규모 악단을 고용해 생음악을 들려주었으니 달아오른 취기를 한 박자 늦추면서 다음 차수를 도모하는 중간과정이라고 볼 수 
    있었다.
    그 다음은 본격적으로 눈요기를 하며 몸을 풀 수 있는 곳으로 가야 하는데 그곳은 바로 카바레였다. 
    카바레는 6·25전쟁 이후 우후죽순처럼 생겨 이미 1960년대에 그 전성기를 맞이했다. 
    ‘춤바람’이라는 주홍글씨로 지탄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은 여성의 경우였고 남성들은 혼자 가더라도 전속된 여성 파트너를 사서 춤을 즐길 수 있었으며 반나체의 선정적인 쇼걸의 
    쇼를 감상하거나 풀밴드의 생음악을 제대로 감상할 수 있는 성인들의 종합유흥업소였다.

    사진 왼쪽부터 시계방향으로 1966년 워커힐호텔의 2중 회전무대에서 선정적인 복장으로 화려한 쇼를 펼치는 허니비 가무단.1963년 워커힐 호텔에서 열린 재즈
    거장 루이 암스트롱(왼쪽) 내한공연, 1966년에 나온 영화 ‘워커힐에서 만납시다’ 포스터. 문화일보 자료사진

    1970년대 워커힐 호텔 전경. 한강이 내려다보이는 서울 광장동의 아차산 자락에 여러 건물이 들어서 있다. 문화일보 자료사진
    기서 주량과 체력이 달리는 주당들은 귀가했겠지만 혈관에 스며들기 시작한 알코올의 유혹이 시작된 주당들은 뭔가 아쉬움이 남아 더 화끈한 다음 차수를 갈망 했을 것이다. 그 소망은 주한외국인 전용호텔로 1963년 4월 8일에 개관했던 워커힐호텔 나이트클럽으로 이뤄졌다. 여기를 가려면 일단 택시를 타고 한강변을 달려 당시에는 서울 외곽이었던 성동구의 아차산 자락으로 새로운 지리적 이동을 해야 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도착한 워커힐호텔 나이트클럽 쇼의 수준은 국내에서 볼 수 없는 특급이었고 시설 또한 눈의 휘둥그레질 정도였으니 서울의 주당들에겐 꿈의 유흥 업소로 자리 잡아갔다. 1962년부터 박정희 정권이 시작했던 경제개발 5개년계획은 시작부터 자본 부족 문제에 봉착했는데 이것을 타개하기 위한 방편으로 관광사업이 떠올랐다. 관광사업은 일반 제조업종에 비해 절차와 과정이 간단하고 빠르다는 장점이 있었으므로 관광사업을 통해 경제개발의 종잣돈을 마련해보자는 계산이었다. 당시에 확실한 관광사업의 고객이었던 3만 명의 주한미군 유엔군 장병들의 휴가여행을 국내로 끌어들이기 위해 1961년 9월에 워커힐 건설계획이 수립됐다. 신축호텔 부지는 성동구의 아차산 자락으로 결정됐다. 이곳은 뛰어난 주변 산세와 한강과 강나루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탁월한 전망으로 서울시내 제일의 명당으로 꼽혀왔던 곳이며 이승만의 별장이 있을 만큼 휴양공간 으로서의 입지조건이 이미 평가받고 있었다. 호텔명은 6·25전쟁 당시 주한 유엔군 사령관으로 맥아더와 함께 인천상륙작전을 지휘했으며 낙동강전선을 사수하는 등 6·25전쟁의 영웅이었던 워커(Walton H Walker) 장군의 이름을 따서 워커힐(Walker Hill)로 정해졌다. 이 시설 안에 들어선 5개의 호텔 이름도 같은 취지로 명명됐다. 더글러스(맥아더) 머슈즈(리지웨이) 맥스웰(테일러) 라이먼(렘니처) 제임스(밴플리트)였다. 모두 6·25전쟁 때 활약한 미국 장군들의 이름으로 명명됐다. 워커힐 설계의 특징은 자연경관 등 지형과 도로 형태를 최대한으로 살려 자연과 건축물이 조화를 이루게 한 공간미의 창출에 있었다. 건축물을 주변 경관에 알맞게 배치하고 건물높이를 4층 이하로 제한한 것도 그 때문이었다. 워커힐호텔의 설계는 한국의 대표적 건축가들이 자신의 건축이념을 각각 구현한 한국건축사의 작품으로서 한국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될 만한 가치를 지닌 건물들 이다. 건물 설계를 맡은 6명의 건축가들은 각자의 설계사무소와는 별도로 공동설계사무소를 만들어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워커힐의 상징물인 힐탑은 김수근 주건물과 나이트클럽은 김희춘, 한국민속관은 엄덕문 더글러스 하우스는 강명구의 의견이 채택돼 시공됐다. 13개의 빌라는 지역별로, 또 각 설계위원이 나누어 설계했기 때문에 각기 특이한 외형을 하고 있었다. 전체적인 시설은 아차산의 산세와 주변 경관이 조화를 이를 수 있도록 20만 평의 부지에 26개의 시설이 분산돼 건설됐다. 메인빌딩 외에도 역삼각형 모양의 전망대, 한국민속관, 5동의 호텔, 13개의 빌라가 있었다. 국내 최고의 나이트클럽 쇼를 제공하기 위해 나이트클럽에는 특별한 장치들이 설비됐다. 무대장치는 앞부분을 둥글게 하고 무대 맨 뒤에 좌우로 이동하는 슬라이딩 장치와 무대 한가운데에 상하로 올라갔다 내려가며 회전을 하는 이중무대로 가설했다. 공중에서 가수가 곤돌라를 타고 내려올 수 있도록 했고 입체음향장치, 특수조명 등이 설치됐다. 개관기념공연으로 당시에 세계적인 재즈의 거장으로 추앙받던 루이 암스트롱의 초청공연이 2주일간 하루 2회씩 계속됐는데 여기서 극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15세의 소녀가수 윤복희가 이 공연에 초대돼 암스트롱과 함께 노래를 하게 된 것이었다. 본래 윤복희는 에이원쇼라는 쇼단에 소속돼 미8군 무대에 출연하고 있었는데 거기서 암스트롱의 흉내로 유명했다. 그 모습을 보게 된 암스트롱이 재능에 감탄해 같이 무대에 설 것을 제안한 것이었다. 쇼단의 최말단 가수가 선배들을 제치고 암스트롱의 게스트로 초청됐으니 에이원 쇼단에서 난리가 나버렸다. 쇼단장은 윤복희의 모든 스케줄을 취소시키고 무대에 세웠는데 윤복희는 그의 독특한 손수건과 트럼펫을 흉내 내며 큰 무대를 종횡무진 누비면서 그와 한 곡 한 곡 주고받았다. 막이 내리기 전 암스트롱은 윤복희를 번쩍 안아 그의 어깨에 목말을 태우고 같이 노래를 부르는 장면을 연출했다. 부모가 모두 유명한 연예인이었던 윤복희의 집안 내력과 1967년 귀국 이후 윤복희가 한국사회에 몰고 왔던 연예계 열풍을 고려하면 암스트롱이라도 반하지 않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이렇게 윤복희에게 넋이 나간 암스트롱은 윤복희에게 로또와 같은 제안을 했다. 본국으로 돌아간 암스트롱이 초청장을 보내왔는데 그 내용은 숙식 제공에 주급 400달러의 조건으로 자신과 함께 전 세계 공연에 출연하며 음악학교에도 입학시킨다 는 입학허가서까지도 첨부된 것이었다. 그러나 이 운명의 갈림길에서 윤복희는 미국행을 택하지 못했다. 그 이유는 어린 몸으로 해외에 나간다는 것이 두렵기도 했고 일찍이 부모를 여의고 오빠인 윤항기를 끔찍이도 생각했던 윤복희는 불광동에 오빠 이름으로 집 한 채를 회사에서 미리 가불해서 사놓고 오빠가 제대하기를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워커힐호텔의 나이트클럽이 주당들의 꿈의 코스로 각광을 받은 이유는 국내에서는 전혀 볼 수 없었던 쇼의 수준 때문이었다. 일명 허니비쇼(Honey Bee Show)라 불린 댄서들의 현란한 쇼가 적당히 취기가 오른 주당들의 말초신경을 자극했다. 한국인으로서 평균 이상의 글래머 몸매를 지닌 댄서들이 말 같은 엉덩이와 머리에 닭털과 타조털을 붙이고 살랑살랑 흔들면서 일렬종대로 일사불란하게 열을 맞춰 터질 듯한 허벅지와 쭉쭉 뻗은 다리를 허공으로 쫙쫙 들어올리면 제아무리 근엄한 남성이라도 이성이 마비될 지경이었다. 이러한 댄서들의 선정적인 집단 라인댄스는 이후 한국의 극장쇼 무대에 받아들여져 일반화되게 된다. 허니비로 선발되기 위한 신체적 조건은 162㎝ 이상의 신장과 고졸 이상의 학력 18∼21세의 나이로 엄격했다. 허니비는 선발과 함께 연구생이 돼 6개월에 걸쳐 발레, 고전무용 국악 등 전반적인 부분을 모두 배우고 이것이 숙달되고 1년이 지나면 허니비 가무단에 편성돼 1시간 동안 민속 라인댄스 뮤지컬 등 다양한 쇼를 보여줬던 것이다. 이런 허니비 가무단은 연구생이 70여 명이고 무대에 서는 현역은 35명 정도 규모였다. 허니비 가무단은 여기에 그치지 않고 가무단원의 질을 높이기 위한 일환으로 동남아 순회공연을 시도하기도 했다. 워커힐호텔의 나이트클럽에 출연한다는 것은 일급 연예인이라는 징표가 됐기에 한국의 연예인들에게도 선망의 대상이었다. 펄시스터즈, 윤복희, 김상희, 패티김, 정훈희, 조애희, 쟈니브라더스 등도 워커힐호텔 무대를 이용해 자신의 몸값을 높여나갔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워커힐호텔을 배경으로 영화가 만들어졌다. 1966년 한형모 감독이 제작한 ‘워커힐에서 만납시다’가 그것인데 워커힐이라는 대중의 호기심을 충족시켜주기 위해 워커힐에 출연하는 음악인들의 모습을 보여준 뮤지컬 코미디 형식의 영화였다. 트위스트김 구봉서 남정임 서영춘 곽규석 등의 코믹연기자들과 키보이스 쟈니브라더스 아리랑시스터즈 이미자 현미 한명숙 이금희 박재란 정원 김상국 위키리 등 12명의 음악인이 대거 출연한 이 영화는 아세아극장에서 개봉돼 5만 명의 관객이 관람했다. 그러나 워커힐호텔은 애초의 기대만큼 경영 수익을 올리지 못했다. 그 이유는 유엔군 장병들이 예상과는 달리 워커힐에서 휴가를 즐기지 않았으며 일본 언론에 의한 과장보도로 워커힐은 몸을 파는 색시들로 채워져 있다고 오해한 미국에 있는 가족들이 워커힐에서의 휴가를 달갑게 생각하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이용료는 비싼 반면, 쇼 이외에 부대시설이 충분치 못했던 것이다. 무엇보다 미군 장병들로서는 본국의 미녀 못지않은 한국의 반나체 미녀들이 늘씬한 다리를 뻗어올리는 쇼를 감상했지만 결국 아가씨 없이 밤을 외롭게 보내야 한다 면 괜히 왔다는 생각이 들 수밖에 없었다. 19만 평이라는 광대한 부지에 30개에 달하는 건물과 각종 시설이 흩어져 있어 효율적인 관리가 어려웠고 인건비도 많이 들어갔다. 게다가 서울시 외곽에 급하게 새로 만들어진 휴양지다 보니 도로 규모가 뒤따르지 못해 접근이 어려웠다. 이 문제를 해결한 사람은 1966년 부임한 김현옥 서울시장이었다. 그는 성동교에서 워커힐에 이르는 너비 10m의 도로를 30m로 확장했고 김포공항에서 워커힐까지 강변도로를 건설해 서울의 동부에 해당하는 왕십리, 마장동, 광나루 일대를 완전히 바꿔놓았다. 오늘날 서울의 동부지역 광진구에 많은 인구가 모여 살게 된 직접적인 원인은 바로 워커힐호텔 건설이었다. 워커힐호텔이 경영난에 처하자 정부는 민영화를 결정하고 1973년 선경그룹에 호텔을 매각하게 된다. 6·25전쟁 이후 섬유산업으로 시작한 선경그룹은 1973년을 새로운 도약의 해로 삼고 1973년 2월 MBC가 방영하기 시작한 ‘장학퀴즈’의 후원을 맡고 이어서 워커힐 호텔이라는 서비스산업에 진출하면서 사업 다각화를 시도해나갔다. 선경그룹은 객실 500개 이상의 호텔을 신축하고 쇼무대를 700석으로 확장하고 1500명을 수용할 수 있는 국제회의장을 신설해나갔다. 저렴한 가격으로 아늑한 교외에서 좋은 부대시설을 이용할 수 있는‘허니문 플랜’이라는 신혼여행 상품을 개발한 이후 워커힐호텔은 온양온천 이후 신혼여행지로 각광받았다. 이후 선경그룹은 1977년 미국의 호텔기업인 쉐라톤과 프랜차이즈 계약을 하고 ‘쉐라톤워커힐호텔’로 개명하고 그 면모를 일신해나갔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1970년대에 워커힐호텔에 대한 외부의 도전은 거셌다. 애초에 계획했던 국제회의는 새롭게 신축한 조선호텔에 많이 뺏기게 됐다. 또한 고고춤 붐이 일어나 물 좋은 나이트클럽의 지위도 조선호텔, 풍전호텔 대연각호텔 등에서 더 새로운 시설의 고고클럽을 운영하기 시작함에 따라 흔들리기 시작 했다. 따라서 젊은 층은 완전히 시내중심가를 활동무대로 삼고 성인들 상당수도 워커힐호텔에 가는 발길을 더욱 줄이면서 워커힐호텔은 나이트클럽 쇼무대의 지존이라는 지위를 상실하고 변방으로 밀려나게 된다. 1963년 주한미군을 위한 워커힐호텔의 건립은 해방과 더불어 시작된 ‘미국’이라는 표준이 1962년 시작된 경제개발계획과 더불어 경제를 넘어 문화의 단계에 도입되기 시작했음을 의미한다. 미8군 무대에서 한국의 연예인들이 연마했던 첨단 미국대중문화는 워커힐호텔 무대에서 검증을 받아 TV 쇼무대로 진출했다. 1964년 개국한 최초의 민방 TV TBC-TV의 야심찬 개국 프로그램이 한국 TV쇼 프로그램의 금자탑이었던 ‘쇼쇼쇼’였다. 이렇게 ‘쇼쇼쇼’가 1950년대부터 미국의 TV에서 명성을 떨치던 쇼프로그램을 모방한 것이었다는 사실은 우연이 아니다. 이런 영향은 국내 극장쇼무대로 확산됐고 이러한 것들이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켜 국내 연예계에 미국 대중문화가 표준으로 자리 잡게 된 것이다.
    Munhwa         김형찬 대중음악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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