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왕실원당 이야기

<556.끝〉 조선의 마지막 원당, 백운사 (下)

浮萍草 2013. 11. 13. 09:46
    왕실여인들, 억불시대의 ‘바람막이’
    윤황후, ‘송광사 도인’ 향봉스님에 의탁 강릉 백운사에서 황후 위패 지금도 보전
    정효황후의 유언에 적힌 도인 스님이 정확히 누구를 가리키는 것인지 확인할 수가 없지만 송광사 향봉스님을 지칭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백운사 주지 법안스님에 의하면 황후가 서거한 직후 국상 준비위원회에서는 향봉스님에게 염불과 천도재를 부탁했다고 한다. 평소 향봉스님을 깊이 존경했던 순정효황후는 스님을 ‘탈속도인(脫俗道人)’이라고 칭송했다고 한다. 그래서 향봉스님을 ‘도인 스님’이라 칭했던 것이 아닐까 추측할 따름이다. 향봉스님은 1940~1950년경 선학원에 거하고 있었는데 황후는 청정하고 엄격한 선기(禪氣)로 이름 높았던 향봉스님을 매우 존경했다고 한다. 향봉스님의 상좌인 송은스님에 따르면 황후는 선학원으로 상궁들을 보내 향봉 스님의 법문을 받아 적어오게 한 다음 그것을 읽는 것을 큰 낙 으로 여겼다. 또한 매년 봄가을 향봉스님에게 약을 지어 올렸는데, 한번은 대만의 장개석 총통이 황후에게 선물로 한약재를 보내자 이 약재로 스님의 약을 지어 보내기도 했다. 향봉스님이 정화개혁 당시 조계사에서 철야농성을 할 때에는 상궁들을 통해 담요를 보내 응원하기도 했다.
    향봉스님은 강릉 백운사로 간 후에도 1년에 한두 번은 서울로 올라와 황후를 친견하곤 했다. 한번은 스님이 상좌를 보내 인사를 전하자, 황후가 낙선재에서 키우던 모란 한 그루를 보내 스님의 방 앞에 심게 했다는 일화도 전해진다. 이같은 인연으로 향봉스님은 1966년 순정효황후의 국상 때 만장 제작 등 장례의식을 상당부분 주관했고 국상이 끝난 후에 당시 스님이 주석하고 있던 강릉 백운사로 황후의 위패를 모셔갔다. 그리고 그곳에서 황후의 49재를 치렀다. 순정효황후의 위패는 지금도 백운사의 대웅전 경내에 모셔져 있다. 황후가 세상을 떠난 후 그를 모시던 상궁들은 모두 낙선재를 나왔다. 이 가운데 박상궁과 김상궁은 친척집으로 갔지만 막내인 성옥염 상궁은 동대문 밖 보문사의 시자원으로 들어갔다. 원래는 황후의 위패가 안치된 백운사로 가려했지만 사정이 여의치 않아 비구니절인 보문사로 들어간 것이었다. 살아생전 성상궁과 박상궁은 매년 백운사에 제사비용을 보내 황후의 기신재를 치러주길 부탁했다고 한다. 이들은 “죽어서도 황후 마마를 모실 수 있도록 내 위패를 강릉 백운사에 안치해달라”는 유언을 남겼다. 그래서 지금도 백운사에서는 순정효황후와 성상궁 박상궁의 제사가 매년 치러지고 있다. 조선의 마지막 황후로, 조선의 마지막 궁녀로 평생토록 고단한 삶을 감내했던 이들은 백운사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평온한 휴식을 취하고 있다. 조선 최초의 왕비 신덕왕후로부터 마지막 황후 순정효황후에 이르기까지, 왕실 내의 불교신앙은 단 한번도 꺼지지 않은 채 이어져왔다. 억불의 시대에 불교가 왕실에서 500년을 이어올 수 있었던 힘은 무엇일까. 아마 그것은 불교보다 더 커다란 귀의처를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조선왕조 500년간 불교는 권력이 필요한 왕실여성에게는 스스로를 컨트롤 할 수 있는 내면의 힘을 위로가 필요한 여성에게는 따뜻한 의지처를 삶이 막막한 여성 에게는 내세에 대한 약속을 선사해 주었다. 그리고 그 선물을 받은 여성들은 스스로 불법(佛法)의 수호자임을 자처하며 억불시대에 커다란 바람막이가 되어 주었다. 비록 그들이 남긴 기록은 거의 남아있지 않지만 지금도 불화나 불경의 한 귀퉁이에는 그네들의 흔적이 희미하게 자리잡고 있다.
    ☞ 불교신문 Vol 2961         탁효정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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