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왕실원당 이야기

52 대법사 (上)

浮萍草 2013. 10. 24. 09:13
    미륵님전 치성 공덕 왕비를 낳다
    민씨, 특유의 결단력.슬기로 대원군 축출 친인척들 요직에 기용해 세도정치 ‘급급’ 성황후 민씨는 매우 한미한 집안의 고아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외척들의 세도정치에 진절머리가 난 흥선대원군이 고아 처녀를 데려다 며느리로 삼았다는 것인데 하지만 이는 상당부분 틀린 이야기이다. 명성황후의 친정인 여흥 민씨 가문은 한미하다고 말하기에 너무 쟁쟁한 집안이었다. 비록 세도정치기에 중앙정계에서 물러나 있기는 했지만 이 집안은 숙종비 인현왕후를 배출한 조선후기 노론의 핵심세력이었다. 이후 경종이 즉위하고 신임사화가 발발하면서 여흥민씨 집안은 정치적 표적이 되었다. 이에 명성황후의 4대조인 민익수는 가솔들을 모두 데리고 민유중(인현왕후의 아버지)의 무덤이 있는 여주의 선산으로 낙향했다. 명성황후의 생가가 여주군에 위치한 것은 이 때문이다. 명성황후는 고아라고 알려져 있지만 그녀가 왕비로 간택될 당시 어머니는 살아있었고 양오라비인 민승호도 있었다. 하지만 친형제가 한 명도 없는데다 아비인 민치록은 민씨가 9살 때 세상을 떠났다. 게다가 여흥민씨 집안은 안동김씨가 득세하던 100여 년 간 중앙정계에 발을 붙이지 못했기 때문에 정치적 영향력 또한 미미했다. 이는 흥선대원군 입장에서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사돈의 조건이었다. 노론 핵심에다 왕비까지 배출한 명문가이지만 외척정치를 할 만한 형제나 아비가 없는 것이 특히 마음에 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대원군의 기대와 달리, 민씨는 매우 야심만만했고 고종을 쥐락펴락 할 정도로 총명했다. 그녀가 처음 궁에 들어갔을 때만 해도 고종은 이씨라는 궁녀에게 빠져 있었다. 하지만 몇 년 새에 민씨는 고종의 마음을 완전히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고종이 직접 쓴 <행록>에는 명성황후를 일컬어 “착하고 간사한 것을 판별하고 옳고 그른 것을 밝혀내는 데는 과단성이 있어서 마치 못과 쇠를 쪼개는 듯이 하였고, 슬기로운 지혜를 타고나서 기틀을 아는 것이 귀신 같았다”고 전한다. 소심하고 우유부단했던 고종이 민씨의 매력에 빠져들었던 것은 바로 그녀 특유의 결단력과 총명함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종이 성인이 될 무렵 민씨는 고종을 부추겨 운현궁에 집중돼 있던 권력기구들을 모두 와해시키고 대원군을 하야시키는 한편 고종의 친정(親政)을 이끌어냈다. 여흥민씨의 집성촌, 여주군 가남면 안금리에 위치한 대법사는 명성황후의 원당으로 전해진다. 안금리에는 인현왕후의 오빠인 민진후와 그의 후손들의 묘가 있으며 명성황후의 아버지 민치록의 묘소 또한 이곳에 위치해 있다. 필자는 수년전 여주 명성황후 생가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민씨의 원당이 있다는 소식을 듣고 직접 대법사와 여주문화원을 찾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아쉽게도 대법사에 관한 문헌 기록은 전혀 찾을 수가 없었다. 다만 대법사 주지 대원스님과 마을 사람들의 구술을 전해들을 수 있었다. 구전에 의하면 원래 이곳은 절이 아니라 안금리 마을을 수호하는 미륵이 서 있던 곳이었다고 한다. 명성황후의 어머니 이씨는 여러 자식들이 모두 요절하자, 집에서 약 10리 정도 떨어진 미륵당에서 매일 기도를 올리며 아들 낳기를 발원했다. 하지만 결국 딸을 낳고 말았는데 그 막내딸이 바로 명성황후이다. 1866년 민씨가 왕비로 간택되자 어머니 이씨는“미륵당에서 100일 기도를 올려 부처님께서 너를 내려 주셨으니 그곳에 절을 지으라”고 청했다. 명성황후는 그 미륵당을 절로 조성하고 절 이름을 원당사(願堂寺)라 칭했다. 이후 1970년대에 들어 비구니 대원스님이 원당사를 중창하면서 절 이름을 현재의 이름인 대법사로 개칭했다.
    ☞ 불교신문 Vol 2955         탁효정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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