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왕실원당 이야기

54 조선의 마지막 원당, 백운사 (上)

浮萍草 2013. 11. 5. 11:38
    왕실불교의 마지막 등불, 순정효황후
    망국 멍에 쓰고, 역사도 외면한 가련한 국모 기구한 일생 오직 불보살님께 의지하며 버텨 리는 ‘조선’이라는 나라의 마지막 모습을 기억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조선이 외세에 멸망했다는 콤플렉스 때문에 어쩌면 조선의 마지막을 우리의 기억 속에서 애써 밀어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것은 순종과 순종비에 대한 무관심에서도 극명히 드러난다. 명성황후가 조선의 메타포인양 미화되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조선의 마지막 황후였던 순정효황후에 대한 사회적 관심은 극히 미미하다. 명성황후에 대한 수백편의 논문과 저술이 쏟아져 나오는 것과는 달리 순정효황후는 일대기를 정리한 짧은 글조차 없는 실정이다. 하지만 불교사의 입장에서 볼 때 순정효황후는 반드시 기억하고 조명되어야 할 인물임에 분명하다. 조선불교의 마지막 등불을 끝끝내 놓지 않았던 그의 삶은 조선 500년간 이어져온 왕실불교의 저력을 보여주는 증거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순정효황후는 1906년 황태자비로 간택되어 20살 연상인 순종의 두 번째 부인이 되었다. 한일합방 당시 병풍 뒤에서 어전회의를 듣고 있던 황후가 조약 체결을 막기 위해 치마 속에 옥쇄를 감추었다가 친일파이자 숙부인 윤덕영에게 빼앗겼다는 일화가 전해 진다. 1926년 순종이 세상을 떠나고 홀로 된 황후에게는 자식조차 하나 없었다. 해방 후 조국에는 봄이 찾아왔건만 황후에게는 더 추운 겨울만이 기다리고 있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부산으로 피난을 가서 경남도지사 관사에 들었는데 이승만 대통령에게 밀려나고 말았다. 곧이어 부산의 한 포교당에 방 1칸을 빌려 살았으나 이마저도 뒤따라 내려온 의친왕에게 내어주고, 묘지기 방을 전전해야 했다. 서울 수복 후 상경한 황후에게 이승만 정권은“창덕궁이 국유재산으로 귀속되었으니 궁에서 나가라”고 통보했고 결국 정릉의 수선제로 내쫓겼다. 1960년에 다시 창덕궁 낙선재로 돌아왔지만 망국의 죄를 뒤집어 쓴 채 유배 아닌 유배생활을 하면서 지냈다. 순정효황후는 대지월(大地月)이라는 법명을 받고 불교에 귀의한 것으로 유명하다. 황후에게 대지월이라는 법명을 내려준 계사는 대각사의 용성스님이었다. 황후를 모시던 최상궁과 엄상궁이 대각사의 신도였는데 이들을 통해 황후 또한 용성스님을 알게 된 것이다. 현재의 대각사는 최상궁이 사저(私邸)를 보시해 조성된 절로 알려져 있다. 용성스님의 한글역경사업 또한 왕실 여성들의 보시에 크게 힘을 입어 이루어진 것이었다. 순정효황후는 용성스님에게 법명과 계를 받은 후 거의 비구니와 다름없는 생활을 했다. 황후의 머리맡에는 용성스님이 한글로 번역한 <화엄경>이 항상 놓여져 있었으며 매일 새벽 3시에 일어나 하루종일 참선과 염불을 행했다고 한다. 순정효황후는 세상을 떠나기 1년 전 다음과 같은 유언을 남겼다. “남은 여생을 오직 불전에 귀의하여 세월을 보내던 중 뜻하지 않은 6.25 동란을 당하자 한층 더 세상이 허망함을 느꼈던 중 내 나이 70여 세 되오니 부처님 세계로 갈 것 밖에는 없다. (중략) 형편에 따라 장례일은 하되 염불소리 외는 조용히 하며 소리 내 우는 자는 내 뜻을 어기는 자이며 장례 후에는 유언대로 도인스님께 영가를 태우고 일주년에 마치게 하길 부탁한다.” 순정효황후가 유언을 남긴 시점은 을사조약이 맺어진 후 꼭 60년이 지난 1965년 을사년이었다. 황후가 남긴 유언에는 불보살에 의지하며 버텨온 고난의 세월이 그대로 묻어나오는 듯 하다.
    불교신문 Vol 2958         탁효정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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