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왕실원당 이야기

51 보덕사 (下)

浮萍草 2013. 10. 16. 09:56
    안으로는 ‘급진개혁’, 밖으로는 ‘극보수’
    아들 등극하자 남연군묘 앞산에 절 세워 ‘보은’ ‘이유 있는’ 쇄국이었으나 역사의 평가는 ‘혹독’
    설화의 어디까지가 사실인지 아닌지 확인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남연군묘가 가야사 절터에 세워졌으며 그 시기가 헌종과 철종의 교체기를 즈음해서라는 사실이다. 흥선대원군이 남연군의 묘를 이장(移葬)한 1849년은 헌종이 죽고 철종이 보위에 오르는 1849년이라는 것이다. 어쩌면 흥선대원군은 스스로 왕이 되기를 꿈꾸었던 것일 수도 있다. 이미 왕손이 끊어진 왕실에서 흥선군이라고 왕위에 오르지 못하리란 법은 없었다. 하지만 이장의 효과는 예상보다 뒤늦게 나타났다. 남연군묘를 옮긴 지 20여년 뒤 고종이 왕위에 오르자 흥선대원군은 남연군묘 인근에 보덕사(報德寺)라는 절을 세웠다. 여기에는 은덕을 갚는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절을 세우기 3년 전인 1868년(고종 5) 남연군묘는 독일 상인 오페르트에 의해 도굴 되는 수난을 당했는데 이때 사람들은 흥선대원군이 절을 불태운 업보를 받는 것이라고 수군댔다. 업보를 갚기 위해서였는지 실제로 은덕을 갚기 위해서였는지 알 수 없지만 흥선대원군은 남원군묘가 바라보이는 앞산에 보덕사를 세워 왕기 서린 명당을 내준 부처님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고종이 왕위에 오름과 동시에 흥선대원군은‘왕위의 왕’이 되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다.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을 펼침으로 조선이 문호를 개방해야 할 타이밍을 놓치게 만든 보수주의자로 알려져 있지만 그는 곰팡내 나는 성리학 신봉주의자들과 거리가 멀었다. 오히려 내정에 있어서는 과격한 개혁주의자였다. 흥선대원군의 대표적인 업적인 호포법과 서원철폐는 당시 기득권층인 양반의 권리를 한꺼번에 무너뜨리는 정책이었다. 전국 수천 개의 서원들 가운데 500개를 제외하고 모조리 철폐함으로써 양반들의 세력기반을 붕괴시켰다. 또한 호포법을 통해 양반들에게까지 세금을 부과함으로써 ‘양반의 경제적 특권’을 무너뜨렸다. 이는 이전의 그 어떤 권력자도 시도하지 못한 파격적인 정책으로, 흥선대원군이 자신의 목을 담보로 걸고 단행한 일이었다. 과격한 개혁주의자임을 자처했던 대원군은 하지만 대외적으로는 극보수 성향의 쇄국정책을 펼쳤다. 청이 서구에 자의반 타의반으로 문호를 개방하고 일본에서는 서구 유럽에 유학생을 보내 신문물을 적극 수입하던 시기에 대원군은 커다란 우물을 파놓고, 스스로 우물 안의 제왕임을 자처하고 있었던 것이다. 수많은 학자들이 대원군을 비판하는 이유는 조선이 가장 위태롭고 어려운 시기에 최악의 선택을 함으로써 국가와 백성 모두를 불행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내정에서는 그토록 개혁적이었던 대원군이 왜 대외적으로는 쇄국정책을 펼쳤던 것일까. 당시 대원군은 청국이 아편전쟁을 치르면서 만신창이가 되었다는 정보를 입수했고 그로 인한 청나라의 혼란한 정국을 보고받는 상황이었다. 흥선대원군은 통상을 요구하는 서구열강들이 대포 몇 대로 물리칠 수 있는 상대가 아님을 어느 정도 파악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흥선대원군은 쇄국정책이라는 극약처방을 쓴 것은 조선이 힘을 비축할 수 있는 시간이 아직은 필요하다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대원군의 판단이 옳았건 옳지 않았건, 대원군의 실각 이후 조선은 최악의 문호개방 수순을 밟았고 결국 수십 년 뒤 일본의 식민지로 전락했다. 하지만 한 시대의 역사적 책임은 응당 당대의 최고 권력자가 질 수밖에 없다. 그것이 아무리 한 개인이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이었다고 해도 말이다. 시절이 하 수상하던 시절, 쇄국정책을 편 대원군은 망국의 책임을 질 수밖에 없는 이유 또한 여기에 있다. 그런데 천하를 호령하던 흥선대원군을 무너뜨린 것은 집권양반들도 프랑스나 일본 같은 외세도 아닌 자신의 며느리였다. 그것도 스스로 간택한 한미한 집안출신 규수에 의해.
    ☞ 불교신문 Vol 2953         탁효정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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