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왕실원당 이야기

53 대법사 (下)

浮萍草 2013. 10. 30. 09:51
    명성황후, 누가 그녀를 조선의 표상이라 하랴
    ㆍ참혹한 최후, 조선의 운명과 비슷하지만 친족 등용한 정치.부패의 한계 못 벗어나 성황후 민씨 최근 10여 년 간 브라운관을 휩쓸고 다니는 그녀의 명대사는“나는 조선의 국모”이다. 그런데 정말 명성황후는 조선의 국모로 살다가 조선의 국모로 죽어갔을까. 명성황후는 일본 낭인들의 칼에 맞아 죽은데다, 시신 또한 불태워지는 참혹한 최후를 맞이했다. 민씨의 마지막 순간이 마치 조선이라는 나라의 최후와 너무도 비슷해 영화나 TV에서는 마치 그녀를 민족의 고통과 슬픔을 담고 있는 아이콘인양 묘사해 왔다. 하지만 그의 죽음이 지극히 비극적인 것이었다고 해도 나머지 모든 삶이 조선에 대한 희생인양 비춰지는 것에 대해서는 재고할 필요가 있다. 명성황후는 조선시대 아니 한국 전역사를 통틀어 그 누구와도 비견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권력을 가진 여성이었다. 그녀만큼 왕을 완벽히 손아귀에 넣었던 여성도 시아버지와 싸워서 이길 정도로 힘이 있었던 여성도 외세를 저울질 할 정도로 정사에 깊숙이 관여한 여성도 없었다. 장녹수 조귀인 장희빈 등 한때 조선을 치마폭에 담았던 여성들도 그 중 한두 가지만 가졌을 뿐 모든 것을 송두리째 가진 여자는 없었다. 반면 명성황후는 왕의 사랑을 독차지 하는 여자였을 뿐만 아니라 여흥민씨라는 대단한 집안 출신이었고 내명부의 수장인 왕비였다. 하지만 그녀의 삶은 ‘경국지색’이라는 시시껄렁한 이름으로 불리는 이들보다 크게 나을 것이 없었다. 대원군을 몰아내고 민씨가 가장 먼저 착수한 일은 자신의 친혈족들을 앞세워 조정을 장악하는 것이었다. 민씨는 자신의 양오라비인 민승호를 절대적으로 신임했는데 민승호가 반대파의 폭탄테러로 사망하자 그 다음에는 민씨 집안의 봉사손으로 들어온 민영익에게 절대 적인 신임을 쏟았다. 또한 민규호 민태호 민영휘 등 민씨 척족들이 조정의 요직이란 요직은 모조리 독점했다. 이들의 집 앞에는 관직을 사고자 하는 이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고 민씨 척족의 부정부패는 적자에 허덕이던 국가 재정을 더욱더 악화시켰다. 강화도조약 이후 일본 프랑스 미국 영국 러시아가 차례차례 한반도에 발을 들여놓고 조선이라는 나라가 바람 앞에 등불 신세가 되었음에도 민씨 일족들은 호시절인양 계속 제 배를 불려 나갔다. 이들 중 일부는 일제강점기에 귀족 작위까지 받아가며 호의호식하였다. 1930년대 조선 최고의 부자로 꼽히던 민영휘는 ‘민씨 척족’의 수장으로 꼽히던 인물이다. 이 모든 것들이 민씨가 살아생전 만들어둔 ‘여흥민씨 독재체제’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세상의 모든 권력자들은 스스로 최고의 권력이 되고 싶어 하고 그 권력을 혼자서만 독점하고 싶어 한다. 하지만 그 힘의 향방에 따라 성군이 되기도 나라를 말아먹은 폭군이 되기도 한다. 을미사변 당시 민씨가 고종에게 남긴 마지막 말은 “종묘사직을 보전하시라”였다고 한다. 그녀에게 있어서 종묘사직이란 무엇이었을까. 역사학자의 입장에서 가장 안타까운 점은 명성황후처럼 명석하고 뛰어났던 여자가 왜‘이씨’왕조와 여흥민씨만을 위해 살았을까 하는 것이다. 그녀는 역사속의 팜프파탈들과 달리 보다 큰 꿈을 꿀 수 있는 위치에 서 있었다. 모든 이들이 우러러 보는 국모의 자리에서 그녀의 꿈은 왜 만백성과 함께 기쁨을 누리는 것이 아닌 시아버지를 몰아내고 친정의 척족들을 심고 자신의 부귀영화를 키우는 데만 그치고 있었을까. 명성황후가 조선이라는 나라의 표상이 될 수 없는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다.
    ☞ 불교신문 Vol 2957         탁효정 한국학중앙연구원 전임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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