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문득 돌아본 그때 그곳

<28>) 마포강 ②-밤섬의 추억

浮萍草 2013. 10. 4. 17:35
    돼지 올라탄 초가집이 통째로 둥둥 떠내려오던 마포강
    1960년대 초 소설가 안정효(오른쪽 첫 번째)씨와 친구들이 밤섬에서 당시에 유행하던 춤인 트위스트를 추고 있다.안정효 씨 제공

    지금의 밤섬 전경. 1999년 생태경관보전지역으로 지정돼 ‘서울의 허파’역할을 하고 있는 밤섬에는 일반인의 출입이 금지되고 있다. 뉴시스
    포나루에 황포 돛대가 빼곡하게 죽창들처럼 들어차고는 했던 시절은 전쟁이 터지기 전이었다. 국토가 남북으로 갈라지고 인천과 강화에서 들어오는 임진강 뱃길이 막힌 다음 언제부터인가 생선 배들이 나의 어린 시야에서 사라졌다. 그래도 새우젓 가게들은 한참 더 버티면서 무당들의 집결지였던 마포는 ‘무당골’보다는 오랫동안 ‘새(우)젓골’이라는 이름으로 더 널리 알려졌었다. 덕택에 마포에서는 포구를 통해 들어오던 생선이 흔했고 여름에는 날마다 찬밥을 물에 말아 흔하고 값싼 굴비를 죽죽 찢어가면서 점심을 먹었던 기억이 새롭다. 양미리 또한 엄청나게 많이 밥상에 올라왔다. 마포 전차 종점에서 진흙탕이 퍽 질퍽했던 포구로 내려가려면 굉장히 높고 큰 철문을 통과해야 했다. 아마도 장마철에 강물이 불어나면 홍수를 막기 위해 막아놓은 문이었으리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강물이 불어났다 하면 마포 사람들은 너도 나도 강둑으로 몰려가 ‘물구경’을 했다. 실제로 큰 홍수가 났던 기억은 없고 사람들이 분명히 ‘물구경’이라고 했으니 마포강의 유유한 물 또한 당시 동네 사람들에게는 대단한 구경거리였던 모양이다. 장마철이면 돼지를 초가지붕에 얹은 집이 통째로 강물에 둥둥 떠내려 오기도 했으니 말이다. 쌀쌀한 봄과 서늘한 가을이 되어 헤엄치기가 마땅치 않으면 마포강은 ‘물레방아’로 굵은 자연산 뱀장어를 잡아내는 낚시터가 되었다. 하지만 답답한 낚시질을 싫어했던 아이들에게는 기찻길과 전찻길이 주요 활동 무대였다. 전차 종점에서 시작된 새우젓 저잣거리의 끄트머리에는 소방서가 홀로 우뚝했고 그 뒤로는 전차‘묘지’가 있었다. 나중에 한국 최초의 아파트먼트 단지가 들어섰고 지금은 가든 호텔이 위치한 바로 그곳이다. 전차를 수리하고 정비하는 이 차고는 줄지어 늘어서서 꼼짝도 하지 않는 차량들 때문에 꼭 묘지처럼 보였다. 전차가 이곳을 드나들려면 도로 한복판에 설치한 전철기(轉轍機)를 조작해야 했다. 평상시에는 전차들이 노선을 따라 운행했지만 뚜껑을 열어 전철기를 젖혀놓으면 레일이 다른 방향으로 연결되었고 그래서 신나게 공덕동으로 달려오던 전차들이 방향을 바꿔 쫄랑거리며 마포 차고로 들어가기 마련이었다. 아이들은 전철기를 돌려놓고는 차고에서 몇 백m 시내 쪽으로 떨어진 기찻길로 올라가 철둑에 나란히 엎드려 이 재미난 광경을 구경하고는 했다. 하지만 자꾸 이런 짓을 계속하다 보니 전차 차장들이 경계를 하기 시작했고 속는 경우가 점점 줄어들었다. 어떤 차장은 미리 눈으로 레일을 확인하고는 아예 전차를 길바닥에 세워놓고 기찻길로 우리들을 잡으러 달려 올라왔다. 그러면 전차에 탄 손님들은 창가에 몰려 늘어서서 때 아닌 추격전을 구경하고 우리들은 동막(=새우젓 독을 굽는 마을 ‘독막’)으로 줄행랑을 놓고는 했다. 전찻길 레일에 사금파리나 작은 돌멩이를 늘어놓고는 전차가 밟고 지나간 다음에 납작해진 가루를 종이에 쓸어 담아 풀로 개어 실에 먹이고는 연줄을 얼레에 감아 기찻길로 올라가서 연싸움을 벌였다. 때로는 대못을 레일에 놓고 전차로 눌러‘아이구찌(匕首를 뜻하는 일본말)’를 만들기도 했는데 지금 생각하면 단 한 번도 탈선 사고가 나지 않은 것이 정말로 천만다행 이었다. 이런 못된 장난을 일삼았던 악동들이 지금은 다 어디서 점잔을 빼며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아가는지 가끔 궁금해지고는 한다. 장바닥에서 성장한 ‘할리우드 키드’의 인맥으로 치자면 휴전 직후였던 이 무렵에는 구두닦이와 신문팔이 아이들이 주류였다. 우리 집은 공덕동 434번지의 5호, 공덕시장 한가운데였다. 지금은 롯데캐슬이 버티고 선 곳이 나의 출생지요 본적지다. 내가 대학을 졸업할 때까지만 해도 이곳은 모두 아직 시유지였고 상수도 시설을 집집마다 갖추지를 못한 실정이었다. 그러니 큰 빨래를 할 물을 동네 공동 수도에서 길어다 대기는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고 그래서 여의도는 해마다 봄철 한때 거대한 빨래터가 되었다. 날씨가 화사하게 풀리면 마포 엄마들은 겨우내 밀린 빨래를 피난 보퉁이처럼 싸서 이고 나룻배로 강을 건넜고 어린 우리들은 빨래판과 비누와 양잿물 따위 이것저것 챙겨 들고 엄마의 여의도 나들이를 도왔다. 그러면 엄마는 모래밭에 솥을 걸어놓고 꿉꿉한 이부자리 따위를 푹푹 삶아 빨아서 개선장군처럼 휘둘러가며 모래사장에 여기저기 하얗게 널어서 말렸다. 그러면 마포강의 봄날은 나른하고 눈부시게 따뜻했다. 여의나루 빨래터에서 별로 멀지 않은 모래밭에는 누가 경작했는지 모르겠지만 넓은 땅콩밭이 있었다. 아마도 밤섬(栗島) 사람들이 그곳을 오가며 농사를 짓지 않았나 싶다. 여의도 건설 공사를 위해 모래와 바위를 채취하느라고 1968년에 섬을 폭파하고 주민들을 강 건너 창전동으로 이주시키기 전까지 밤섬은 500명가량이 17대에 걸쳐 마을을 이루고 양과 염소를 방목하며 살았던 버젓한 유인도(有人島)였다. 서울로 천도한 이후 배를 만드는 사람들이 정착해서 살았던 이곳에 세종과 성종 시대에는 나라에서 약초와 뽕나무를 심어 키웠다니 밤섬은 잠실(蠶室)의 형님뻘이 아닐까 싶다. 더 옛날로 거슬러 올라가면 고려 시대에 나라에서 못된 죄인들을 이곳으로 귀양살이를 보냈다고 한다. 잡배들의 아전인수 만년 싸움터가 되어버린 우리나라 국회를 통째로 어디론가 귀양을 보내고 싶다면 ― 이렇듯 아주 편리하고 가까운 위치에 우리 조상들이 훌륭한 유배지를 일찌감치 마련해 두었다. 지금부터 반세기 전에는 겨울이 되면 밤섬은 마포강 아이들이 놀이터 영토를 넓히려고 탐험을 나가던 신천지였다. 하늘이 매연으로 두껍게 썩기 이전이었던 1950년대 서울의 겨울은 아침이면 세숫대야나 문고리에 손가락이 쩍쩍 달라붙을 정도로 추웠고 그래서 한강이 겨우내 꽁꽁 얼어붙었다. 솜바지에 털벙거지를 쓴 할배들이 큰 썰매를 타고 앉아 강 한가운데 여기저기서 잉어 훌치기낚시를 했고, 마포 아이들은 얼음을 지치러 마포강으로 몰려 나갔다. 마포 썰매는 좀 특이했다. 넉넉한 집 아이들은 스케이트 날 두 개를 장착한 썰매를 탔다. 자동차로 치면 ‘중형’ 급이겠다. 하지만 우리들 대부분은 가운데 쇳날이 하나뿐인 쪽썰매를 탔다. 겨우 두 발로 디딜 만큼 좁은 정사각형 쪽썰매에 올라서서 균형을 잡기란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었지만 우리들은 꼬챙이 또한 하나만 사용했다. 꼬챙이의 길이는 1m가 훨씬 넘었는데 아이들은 이것을 안짱다리처럼 벌린 가랑이 사이에 끼고 일어선 채로 밀면서 얼음을 지쳤다. 물론 썰매와 꼬챙이는 아이들이 저마다 집에서 직접 만들었다. 앉아서 짧은 꼬챙이 두 개로 밀어대는 스케이트 썰매보다 외날 쪽썰매는 속도가 대단히 빨랐다. 그래서 우리들은 마포에서 밤섬을 왕복하는 장거리 썰매를 자주 타고는 했다. 그렇게 우리들의 마포강 겨울은 씽씽 달렸다. 마포강 아이들의 어린 시절은 참으로 건강했고 그래서 칠순을 넘겼어도 내 머리는 백발이 되지를 않아 염색을 해본 적이 없다. 거의 날마다 새벽 4시부터 컴퓨터 앞에 일어나 앉아 이렇게 부지런히 글을 쓰는 기운을 얻은 것 또한 다 흐르는 강물의 덕택이 아니겠느냐고 나는 생각한다. 해빙기가 되어 얼음을 타기가 위험해지면 아이들은 어서 봄이 되어 강물이 풀리기만을 기다렸다. 그러고는 희뿌연 빛으로 물이 녹으면 아이들은 경쟁적으로 강으로 나가서 아직 너무 추워 내복을 입은 채로 물에 들어가 헤엄을 쳤다. 금년에는 누가 가장 먼저 물에 들어갔느냐 하는 것 또한 우리들 사이에서는 무척 중요한 경쟁 종목이었다. 1951년 이른 봄 강물이 녹은 다음 아버지와 함께 내가 서울로 ‘잠입’한 통로 또한 밤섬이었다. 서울을 재탈환하려는 국군이 공덕동 기찻길을 사이에 두고 공산군과 치열한 교전을 벌였을 때 패주하던 인민군이 집집마다 불을 질러 우리 동네가 홀랑 타버렸다. 그래서 갈 곳이 없어진 우리 가족은 소사(지금의 부천시)의 외할머니 집에서 지냈고, 아버지 혼자 먼저 서울로 잠입하여 집을 짓기 시작했다. 아버지는 목수였다. 1·4 후퇴를 거쳐 다시 서울이 수복된 다음에는 한때 무슨 작전상의 이유에서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지만 피난을 갔던 시민들의 서울 진입이 자유롭지를 않았다. 그래서 집을 대충 지어놓은 다음 아버지는 소사로 가서 장남인 나 하나만 먼저 서울로 데리고 왔다. 가족이 한꺼번에 이동하기가 쉽지 않아서였던 듯싶다. 서울에서 한강을 건너는 유일한 교량이었던 인도교가 폭파된 다음이었으므로 초등학교 3학년인 나는 아버지와 함께 밤섬으로 갔다. 초가집 몇 채가 있었고 검문소 비슷한 움막 초소 부근의 모래밭에서 어떤 사복 군인이 심심해서인지 찌그러진 깡통을 놓고 권총 사격 연습을 했다. 나는 아버지와 함께 어느 집에서 낯선 여러 남자 어른들의 틈에 끼어 새우잠을 자고 나서 동이 트기 전에 야음을 틈타 널빤지로 엉성하게 엮은 궤짝 나룻배를 타고 강을 건넜다. 당시에는 이런 불법 쪽배를 ‘야밋배(일본말로 闇船)’라고 불렀다. 어쨌든 숨을 죽이고 대여섯 명이 함께 도강했는데 요즈음 두만강을 건너는 탈북자들 모습을 텔레비전에서 보면 그날의 새벽 탈출이 자꾸 머리에 떠오른다. 훗날 서강대학교에 다니던 무렵 나는 방학 동안에도 학교에 나와서 도서실에 앉아 열심히 공부하는 다른 아이들을 가끔 꾀어 서강나루에서 밤섬으로 건너가 같이 놀기도 했고 고등학생 시절 막냇동생을 데리고 여의도에서 백사장을 횡단하여 밤섬까지 가서는 그곳 넓은 웅덩이 물가에 우뚝 솟은 거대한 바위에서 나의 출중한 다이빙 솜씨를 과시했었다. 마포강 아이들의 다이빙 자부심은 언제나 대단해서 우리들은 언제쯤 한 번 광나루로 함께 출정을 해서는 광진교 중간쯤 난간에 나란히 서서 버스를 타고 지나다니는 다른 동네 사람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단체로 다이빙을 하자고 용감하게 떠들어대고는 했지만 틀림없이 신문에 났을 만한 이 행사는 끝내 열리지 못했다. 광진교 단체 다이빙이나 마찬가지로 미완성으로 끝난 한강 모험이 나에게는 또 하나 있다. 그것은 춘천에서 마포까지 뗏목을 타고 내려오는 여행 계획이었다. 60년 전에는 춘천댐이나 의암댐은 고사하고 팔당댐조차 없어서 청평댐만 무사히 넘으면 거칠 것이 없었다. 여름방학을 이용하여 뗏목에 조그만 천막을 하나 치고 맑은 강물을 따라 흘러흘러 마포까지 내려오겠다던 중학생의 꿈은 뗏목을 해체하여 청평댐을 돌아 내려오는 걱정을 두고두고 하다가 지금까지 끝내 실현하지 못하고 말았다. 이제는 댐과 보가 너무 많이 생겨나서 꿈조차 꾸기 어려운 모험이 되어버렸다. 밤섬은 무척 뼈아픈 사연도 우리들에게 하나 남겼다. 집필실과 사무실 등 활동 공간을 가난한 문화인들에게 무료로 마련해주고는 했던 어느 착한 30대 기업인이 1956년 8월 19일에 제1회 문화인 사육제를 밤섬에서 개최했다. “전쟁의 악몽을 잊고 미래를 위한 활력을 찾아야 한다”는 취지였다. 작가 화가 음악가 국악인 무용가 배우에다 한글학자들까지 무려 300명의 문화인들뿐 아니라 인근 지역의 구경꾼들까지 200여 명이 아침부터 밤섬 모래밭으로 몰려 들었다. 오전 11시에 “어린애처럼 놀자”는 선언문을 누군가 낭독했다. “거룩한 육체에 걸친 반만년의 옷은 너무도 지루하고 문명을 가중시킨다”는 해방 선언과 더불어 내로라하는 한국의 예술인들은 옷을 벗어던지고 수영복 바람으로 신나게 하루를 놀았다. 어느 신문은“늙은이들이 보기에는 전례 없는 미치광이 대회”라고 비아냥거리는 시선을 보내기도 했던 행사는 밤 8시에 끝났고 집으로 돌아가는 사람들을 실어 나르던배 한 척이 마포나루 50m 앞에서 뒤집혀 여섯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래서 제2차 사육제는 영원히 열리지 못했다. 고향이라고 하면 사람들은 도시에서 멀리 찾아가야 하는 시골을 생각하기가 쉽지만 서울 아이들에게도 구슬치기나 딱지치기를 하고 제기를 차고, 자치기를 치며 놀았던 고향이 이렇게 엄연히 있었다. 그것은 지리적인 고향은 아닐지언정 시간적인 고향이었던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칠순 노인이 어린 소년이었던 그때는 한여름 소나기가 지나가면 서울 하늘에 무지개가 뜨고 뭉게구름이 둥실둥실 피어올랐으며 밤하늘에는 맑은 별들이 총총했었다. 그래서 칠순 노인은 방송국에 출연할 일이 생기거나 하여 마포 강변을 따라 차를 몰고 가노라면, 건너편 무인도에서 몽땅 사라진 광활한 백사장을 그리워하고는 한다.
    Munhwa         안정효/소설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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