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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마포 강 ① - 무인도의 여름탐험

浮萍草 2013. 9. 27. 17:37
    벼랑창서 무인도까지 헤엄쳐 건너기… 50년대 악동들의 ‘통과의례’
    6·25전쟁 시절에 우리들이 그곳을 ‘마포강’이라고 불렀던 이유는 간단하다. 
    원효로 개천이 흘러 들어오던 지점에서 시작하여 하류의 당인리 발전소와 물 건너 밤섬에 이르는 지역의 한강 한 토막은 마포 사람들의 
    정신적인 영토였다. 
    마포강은 우리들의 강이었고 사시사철 마포 아이들의 드넓은 놀이터였다. 
    여름 내내 그곳은 우리들의 수영장이었다. 
    당시 한강에는 최상류로 올라가서 광나루와 뚝섬 그리고 노량진 건너편 인도교 밑에 관리형 수영장이 넓었다. 
    그래서 서울 사람들은 부유층이 아니고는 대천이나 동해안이 아니라 웬만하면 한강변에서 여름철 휴가를 보냈다. 
    강물로 그냥 쌀을 씻어 밥을 해먹을 정도로 깨끗했으니 사실 먼 길을 가느라고 고생할 필요가 없었다.

    1968년 본격적인 개발이 착수되기 이전의 서울 여의도 전경. 50년 전 여의도는 한강물이 넘치면 섬의 절반이 잠기는 모래섬이었다. 문화일보 자료사진

    소설가 안정효(왼쪽) 씨가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인 1950년대 말, 동네 친구 안재풍 씨와 함께 인적이 없는 여의도 백사장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있다.
    안정효 씨 제공
    무리 눈을 감으면 코를 베어가던 서울이라고는 하지만 물론 수영장에서는 입장료를 받지는 않았다. 수영복을 갈아입고 옷을 맡기는 탈의장 그리고 머리를 감거나 모래를 씻어내는 유료 샤워장을 갖춘 상류 해수욕장들은 물놀이 기구를 빌려주거나 냉차와 군것질 거리를 파는 사람들이 장사를 했다. 마포강에는 수영장이라고 불러줄 만한 그런 쉼터가 따로 없었다. 맨발로 밟는 모래사장이 강 건너편 무인도에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 ‘무인도’의 이름은 여의도였다. 전쟁으로부터 한참 숨을 돌린 다음까지도 무인도에는 편의 시설이 전혀 없었다. 그러다가 언제부터인가 마포에서는 여의도로 나룻배가 건너다녔고 뱃삯을 감당할 능력이 있는 어른들은 그곳으로 건너가 적당히 탈의를 하고는 모래밭에 옷을 묻어 놓고 놀았다. 마포 ‘뽀드장’에서 놀잇배를 빌려 타고 건너가 여름을 즐기는 청춘남녀 또한 슬금슬금 늘어났다. 당시 리버티 늬우스와 대한 늬우스에서는 이승만 대통령이 외국에 나갈 때마다 여의도 비행장에서 출발했다는 소식을 전하고는 했지만 어린 우리들은 그 여의도가 이 여의도인 줄을 알지 못했다. 나는 그곳에서 비행기가 뜨고 내리는 것을 본 기억이 없었다. 그리고 물론 우리들은 여의도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를 알지 못했다. 알려고조차 하지 않았다. 백사장 너머를 탐험하여 우리들의 영토를 확장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마포 아이들에게는 놀이터가 넉넉했기 때문이었다. 우리들의 단골 수영장은 지금 마포대교 북쪽 진입로가 시작되는 지점에서 원효로 쪽으로 몇 백m 올라가서 박태선 장로교의 전도관이 위치했던 부근이었다. 바위 절벽이 깎아지른 그곳의 이름은 무시무시하게 ‘벼랑창’이었다. 마포 나루 쪽은 대부분 시커먼 개흙이 기분 나쁘게 질퍽거려서 아이들은 물가에서 수심이 깊은 곳까지 발이 푹푹 빠져가면서 걸어 들어가는 대신 바위로부터 직접 물로 뛰어들어 헤엄을 치는 곳들을 찾아다녀야 했다. 당인리 발전소 앞 축대와 벼랑창이 바로 그런 만만한 곳이었다. 지형적인 이유에서였겠지만 벼랑창 옆 펌프장 부근의 후미진 안쪽에는 가끔 익사체가 한강 인도교 쪽에서 떠내려 오다가 뭍 위로 밀려 올라왔다. 그래서 우리들은 누군가 거적을 덮어놓은 송장을 며칠씩 저만치 곁에 두고 수영을 했다. 익사한 사람이 남자라면 엎어져서 시체가 떠오르고 여자는 자빠져서 떠오른다는 묘한 자웅 원칙의 사실을 우리는 이곳에서의 관찰을 통해 알게 되었다. 한강 물이 더러워지기 전에는 ‘한강 다리(인도교)’에서 세상을 비관하고 생활고에 시달리던 사람들의 투신자살이 빈번하여 다리 밑에는 한때 그들을 구조하는 작은 배가 늘 대기하기까지 했었다. 그러다가 서울 인구가 늘어나고 강물이 오염되면서 한강의 자살이 급격히 감소했는데 이왕이면 죽을 때만은 깨끗한 곳을 원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 때문이었겠다. 그러다가 요즈음 한강에서 투신 ‘소동’이 다시 늘어나는 현상을 보니, 더러움보다는 편리함을 훨씬 중요시하는 세상이 되지 않았나 씁쓸한 생각이 들기까지 한다. 내가‘할리우드 키드’라는 이름을 붙여준 세대가 어렸을 적에는 우리들이 벼랑창에서 강 건너를 보면 인도교에서부터 밤섬까지 눈부신 백사장이 끝도 없이 펼쳐졌었다. 요즈음 강화도로 낚시를 가느라고 일산대교를 건널 때마다 나는 하류 쪽으로 한강을 절반쯤 뒤덮은 넓고 넓은 모래밭을 굽어보면서 가끔 속이 상한다. 온갖 오물이 스며들고 쌓여 거대한 더껑이처럼 시커멓게 펼쳐진 풍경은 서서히 진행되는 도시와 인간의 죽음을 예고하는 한 폭의 지저분한 그림을 연상시키기 때문 이다. 더럽게 오염된 그곳 김포의 모래사장이 샛노랗게 깨끗해진다면 아름다운 여의도 백사장의 그리운 풍경이 그곳에서 되살아나겠지만 어디를 가나 세상은 날이 갈수록 때를 입기만 할 뿐이다. 우리 강변 아이들은 초등학교를 졸업하기 전에 벼랑창에서 무인도까지 헤엄쳐 강을 건너가는 통과의례를 일종의 성년식으로 삼았다. 이쪽 절벽의 바위틈에 옷을 숨겨놓고 네댓 명씩 무리를 지어 강물을 헤치며 건너가는 아이들의 밤톨 같은 뒤통수 모습은 며칠에 한 번씩 벼랑창에서 벌어지는 모험 이었다. 아직 자신이 없어서 따라가지 못하는 꼬맹이들은 부러운 눈으로 그들을 지켜보면서“나도 언젠가는 건너가야지”라며 인생의 첫 야망을 키웠다. 족히 한 시간이 걸려 피안에 상륙한 아이들은 모래밭에서 한참 게으름을 피우며 놀다가 기운을 차린 다음 다시 강을 헤엄쳐 건너와서 집으로 밥을 먹으러 갔다. 우리들이 별로 힘들지 않게 마포강을 헤엄쳐 건너다녔던 까닭은 당시의 강폭이 지금보다는 절반밖에 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여의도 백사장은 그토록 넓었다. 아마도 그토록 많았던 황금 모래는 여의도를 개발하고 서울의 고층건물들을 짓느라고 모두 퍼갔거나 준설 공사로 인해서 사라져버렸으리라. 내가 처음 마포강을 헤엄쳐 건넌 것은 초등학교 5학년 때였으리라고 기억한다. 굉장히 햇빛이 쨍쨍했던 늦은 아침이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다. 지금의 원효대교 중간쯤 되는 지점에 이르면 큰 모래톱이 펼쳐졌고 갑자기 강폭이 줄어들면서 그곳에서 강의 흐름이 휘돌았다. 벼랑창에서 강을 3분의 2쯤 건너가면 원효로 모래톱을 돌아 내려온 물살이 빨라져서 한참동안 급류를 이루었다. 이곳의 물은 빠른 흐름 때문이었는지 심장이 덜컥할 정도로 무척 차가웠다. 그래서 나는 200m가량 남은 모래밭까지 헤엄쳐갈 자신이 갑자기 없어졌고 기운 또한 한꺼번에 빠져버렸다. 내가 숨이 차서 미적거리는 꼴을 보더니 다른 녀석들은 다람쥐처럼 쪼르르 속력을 내어 섬으로 도망쳤다. 물에 빠진 사람을 건져주려다가 덩달아 죽는 어리석은 짓을 마포강 아이들은 절대로 하지 않았다. 그래서 혼자 뒤처진 나는 저만치 떨어져 뱃놀이를 하는 젊은 남녀에게 도와달라고 손을 흔들어 보였지만 그들은 힐끔 한 번 쳐다보고는 그만이었다. 강을 거의 다 건너온 내가 전혀 위험해 보이지를 않았던 모양이다. 몇 차례 더 배를 부르려는 시도를 했다가 실패로 끝나자 나는 금방 물에 빠져죽기라도 할 듯 꼬르륵 물밑으로 들어갔다가 다시 나와 손을 흔들어댔다. 위기를 과장하기 위한 연극이었다. 하지만 마포강 아이들이 워낙 그런 장난을 자주 했던 터라 물에 빠진 양치기 소년의 외침에는 아무도 귀를 기울이려고 하지를 않았다. 결국 기운만 더 빠진 다음 나는 나머지 거리를 허우적거리며 끝까지 헤엄쳐 건너야 했다. 스스로 노력하여 목표를 달성하기가 힘겹다며 남의 덕을 보려고 요령을 피우면 결국 고생만 더 한다는 인생의 진리를 나는 그날 목숨을 걸고 톡톡한 대가를 치르며 터득했다. 여름방학으로 접어들면 벼랑창에서는 거의 날마다 또 하나의 특별한 행사가 벌어졌다. 다이빙 시합이었다. 절벽 앞에는 수심이 얕고 물속에 울퉁불퉁 바위가 많아서 아이들이 다이빙을 하다가 자칫하면 이마가 깨져 피투성이가 되고는 했다. 그래서 우리들은 벼랑창 맞춤 다이빙 기술을 개발했다. 절벽에서 뛰어내려 몸이 수면에 닿는 순간 몸을 뒤집는 방법이었다. 그러면 추진 방향이 꺾여 몸이 강바닥으로 내려가지를 않고 어뢰처럼 수면을 타고 나아갔으며 몸을 돌리는 순간에 ‘송장헤엄(배영)’ 자세를 잡고 벼랑창 쪽을 보면, 내가 뛰어들어 솟구친 물기둥이 아직 그대로 정지동작처럼 멈춰 있었다. 이렇게 수면을 타는 기술이 익숙해지면서 우리들은 강바닥에 이르지 않고 안전하게 어뢰가 되기 위해 조금씩 더 높은 바위로 계속 올라가며 다이빙을 했다. 까마득한 기억으로는 아마 10m까지는 올라갔지만, 더 이상은 위험해서 모두들 포기했다. 어쨌든 누군가 벼랑창 절벽 높이 올라가 서서 다이빙 자세를 취하면 위쪽 찻길에서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던 사람들이 하나둘 멈춰 서서 구경을 하려고 기다렸다. 그래도 우리들은 좀처럼 물로 뛰어들지를 않았고 나룻배로 강을 건너 오가는 사람들이 저만치서 모두 쳐다볼 때까지 한참씩 기다렸다. 그러다가 만장한 관객의 시선이 벼랑창으로 쏠렸음이 확실해진 다음 우리들은 바위를 차고 하늘로 솟구쳐 오르고는 했다. 정말 무척 잘난 체했던 시절이었다. 나는 대부분의 마포강 아이들과 마찬가지로 여름방학 동안에는 거의 하루 종일 벼랑창에 나가서 살다시피 했다. 그래서 아현동이나 효창동에 사는 학교 친구들이 낮에 놀러 오려면 집으로 찾아오지를 않고 아예 곧장 강변으로 내친 걸음을 했을 정도였다. 그래서 우리들은 밤에 장터 골목에서 만나면 새까만 얼굴이 서로 잘 보이지를 않고 물방개 등딱지처럼 두 눈만 반짝거렸다. 이렇게 많은 추억이 깔린 여의도였기에 나는 베트남에서 전쟁을 끝내고 돌아와 신문기자로 서울시청 출입을 하게 되자 여의도 개발을 위한 윤중제 공사를 신이 나서 아주 열심히 취재했다. 언젠가는 한 면을 통째로 화보를 곁들여 획기적인 특집을 만들기까지 했다. ‘한 면을 통째로’가 어째서 획기적이었는지를 설명하겠다. 1950년대까지만 해도 서울의 일간지들은 하루에 네 쪽이 전부여서 1면은 정치 2면은 경제 및 외신 3면은 사회 4면이 체육과 문화를 담당했다. ‘근하신년’이 되면 청전 이상범 화백의 그림이 담긴 한 장짜리 달력이 신문의 부록으로 배달되고는 했는데 마포의 웬만한 집 안방 벽에는 이 달력 한 장이 유일한 장식 품이었다. 그리고 세상 또한 그때는 단순해서 그만하면 웬만한 소식이 네 쪽 안에 다 들어가고는 했다. 내가 신문사에서 문화부장 노릇을 할 때는 지면이 여덟 쪽으로 늘어나기는 했지만 국가에서 추진하는 여의도 개발 같은 사업을 ‘선전’하느라고 통째로 한 면을 내 주기가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획기적인 ‘한 면을 통째로’ 화보가 실리자, 깜짝 놀란 시청의 어느 공보관은 고맙다는 뜻으로“공사가 끝나면 지금의 문화방송 자리 근처에 200평 정도 땅을 사도록 편의를 봐주겠다”고까지 했었다. 지금보다는 부동산 규제가 훨씬 어수룩했던 50년 전의 얘기다. 당시에는 여의도 땅이 인기가 없어서 잘 팔리지를 않았다. 그런데다가 평당 2만 원이라고 하는 땅을 사기에는 봉급이 1만2000원이었던 기자로서는 꿈도 못 꿀 일이었다. 물론 은행 융자를 받는다든가 투자자를 구할 요령은 26세밖에 안 된 나로서는 꿈도 꾸지 못할 일이었다. 그래서 나는 미래지향형 투기를“고맙지만 사양하겠다”며 얼른 포기했다. 그러고는 30여 년 동안 두고두고 술자리에서 나는“그때 만일 내가 그 땅을 샀더라면”이라는 주제의 전설을 안줏거리로 삼았다.
    Munhwa         안정효/소설가·번역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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