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문득 돌아본 그때 그곳

<26> 정동길

浮萍草 2013. 9. 14. 10:32
    구한말 굴곡과 연인들 蜜語… 역사와 낭만이 흐르는 길
    칠세부터 부동석까지는 아니어도 내가 청소년기를 보낸 1970년대는 남녀 간 구분이 무척 엄격하고 살벌했다. 덕수궁 벤치에 여학생과 단지 함께 앉아 있었다는 ‘죄상’으로 1주일 정학을 맞은 친구 녀석도 있다. 지금은 동아리로 명칭이 바뀐 그때의 학교 밖 서클은 그런 점에서 해방구라고 할 만했다. 1주일마다 회관에 모여 여학생과 떳떳하게 싱어롱도 하고 포크댄스도 춘다. 나는 10여 개 남녀 학교가 모인 문학서클 ‘서우회’ 멤버였는데 모임 장소가 정동 젠센기념관이었다. 정동교회 부속건물로 지금은 사라져 버린 단아한 2층 벽돌건물이다. 모임이 있는 금요일마다 학교만 파하면 번개처럼 달려가곤 했는데 늘 보던 풍경이 있었다. 흰 수염을 길게 늘어뜨린 두루마기 차림의 할아버지가 언제나 수많은 일행을 몰고 본당을 향해 가고는 했다. 누군가 말해줬다. “저 할아버지가 함석헌이라고 한국의 간디라는 사람인데 대통령이 무지 미워한다더라.”
    친구와 연인들이 덕수궁 돌담길을 걷고 있다. 연인이 덕수궁 돌담길을 함께 걸으면 헤어진다는 속설은 주변에 있는 서울가정법원(현 서울시립미술관)에서 이혼
    한 부부들이 이 길을 오갔기 때문에 생겼다. 뉴시스
    교 2학년생에게 정기 강연을 하러 오는 ‘씨알의 소리’ 함석헌이 누구인지 관심이 있을 턱이 없었다. 기념관의 주인공인 선교사 젠센이 한국인을 위해 어떤 고초를 겪었는지, 인근의 경운궁이 어떤 저의로 퇴영적인 덕수궁이라는 이름으로 개명되어야 했는지 전혀 관심이 없었다. 고리타분한 역사와 시국 문제보다는 덕수궁에서 경향신문사까지의 호젓한 길을 여학생과 이야기하며 걷는 일에 끌렸다. 정동길 중간쯤에 있는 ‘밀크홀’에서 음료수를 마신다거나 덕수궁 돌담길을 연인이 함께 걸으면 반드시 헤어진다는 전설 따위가 당시의 주된 화제였다. 지난 2009년 늦봄, 덕수궁 돌담길에 다시 서 있게 되었다. 그 다음 해에도 또 다음 해에도 이번에는 엄청나게 많은 행렬과 함께였다. 비운에 간 대통령을 추모하기 위한 분향의 행렬이었다. 서거 첫해, 둘째 해까지의 인파는 정말 엄청나서 대한문 앞 분향소에서부터 정동길 전체를 다 채우고도 광화문 방면까지 사람들이 늘어섰다. 서너 시간씩 기다리는 줄에 서서 잡담을 하는 사람도 없고 비가 온다고 자리를 피하는 사람도 없었다. 다들 묵연한 얼굴로 역사의 일부가 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정동길 전체가 역사 체험관과 같다. 구한 말 러시아, 미국 공사관을 필두로 마치 상하이(上海) 조계지처럼 열강들의 공관들이 모여 들었고 이화학당, 배재학당 같은 선각의 본거지가 자리잡은 곳이기도 했다. 기미년 만세운동의 상징적 장소로 대한문이 있고 건국 후 한국정치를 쥐락펴락했던 미대사관저 하비브하우스가 한복판에 있기도 하다. 이처럼 굴곡 많은 역사를 증언하면서도 동시에 정동길은 호젓하고 품위 있는 데이트 명소이기도 하다. 이문세는 우리들의 정동길을 광화문 연가에서 이렇게 불렀다. ‘언젠가는 우리 모두 세월을 따라 떠나가지만 언덕 밑 정동길엔 아직 남아있어요. 눈 덮인 조그만 교회당….’
    정동길 로터리의 구 러시아 공사관을 가리키는 안내푯말. 정동길은 근대사의 아픔이 서려있는 곳이다. 임정현 기자 theos@munhwa.com

    덕수궁 돌담길에서 정동극장∼이화여고∼경교장
    으로 이어지는 정동길은 역사탐방로이기도 하다.
    사진은 고풍스러운 이화여고 돌담길. 임정현 기자
    정동이라는 지명의 내력은 조선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태조 이성계의 계비 신덕왕후 강 씨의 묘소 정릉이 그 자리에 있었다고 한다. 능은 지금의 성북구로 옮겨 갔지만 이름을 남겼다. 그 후 정동을 강렬하게 기억시키는 이름들은 아관파천의 고종 손탁호텔의 손탁 여사와 베베르 러시아 공사 이화학당의 메리 스크랜턴, 배재학당의 아펜젤러, 유관순 열사 등등인데 보다시피 외국인 이름이 많다. 극동의 변방국가에서 세계사의 일부로 귀속되는 과정에 정동이 중심지였기 때문이다. 당시 우리 선조들 모습은 어땠을까. 구한 말에 이 땅을 다녀간 서양인들이 남긴 기록은 가혹하다. ‘티베트만큼 알려지지 않은 나라’로 불리는 곳을 방문한 영국의 지리학자 이사벨라 버드 비숍은 조선을 두고 ‘중국의 열등한 카피’라고 단언했다. 조선인은 한결같이 게으르고 더럽고 거짓말을 잘한다는 기록도 있고 북유럽의 어떤 신문기자는 ‘조선 여자는 너무나 못생겼고 음식들은 끔찍하게 맛이 없다’는 기록도 남겼다. 최초의 기록을 남겼던 하멜의 표류기에도 읽기 민망한 내용이 무척 많다. 과연 그것뿐인가? 정동길을 오갔던 서양인들 시선에 포착된 조선인 상에 대해 우리 자신이 대단히 잘못된 정보를 갖고 있다는 연구가 나타났다. 작가 박수영은 2006년 유럽사를 공부할 요량으로 스웨덴 웁살라대로 유학을 떠난다. 미셸 푸코가 공부했던 바로 그 도서관에서 고서들을 뒤적이다가 본인 표현을 옮기자면 “어? 어?” 하며 놀라는 체험을 했다. 스웨덴 기자 아손 그렙스트의 1904년 조선 체류기를 읽는데 우리가 전혀 몰랐던 생생한 당시 풍속 기록 속에 조선인들의 면모가 놀랄 만큼 긍정적으로 그려져 있었던 것이다. 그걸 계기로 영국 독일 러시아 미국의 탐험가나 지리학자 외교관들의 기록을 두루 찾아 읽어보고는 장탄식을 했다. 주로 일제강점기에 소개되어 우리들의 고정관념으로 남게 된 찌질한 조선인 상과는 딴판의 서술이 압도적 으로 많다는 사실을 확인한 것이다. 한국 남자들이 잘생겼다는 것 다른 아시아인에 비해 체구가 훨씬 크다는 것, 기질이 자연스럽고 당당하며 자유분방하고 호탕하다는 것 머리가 명석하고 일을 잘한다는 것 평온하면서 분노를 감추고 있다는 것, 유럽인의 두세 배는 될 정도로 엄청나게 많이 먹는다는 것 등등 타자의 눈에 비친 우리 자신이 전혀 꿀릴 것이 없다는 점을 조목조목 확인했다.
    필명 이숲으로 펴낸 ‘스무 살엔 몰랐던 내한민국’이라는 신간은 그렇게 나왔다. “나이 먹으니 내 나라가 최고다 하는 국수주의에 빠진 것 아니오?” 하는 내 놀림에 박수영은 정색을 했다. “절대 그렇지 않아요. 정말로 공정하게 다양한 자료를 섭렵했는데 우리가 우리 선조를 잘못 알고 있었던 거예요!” 식민 강점을 당한 역사의 패배자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멍청한 고종,교활한 민비(명성황후) 고집불통 대원군 식의 이미지는 정말로 잘못된 것임을 당시 외국인들이 증명하고 있다는 것. 무엇보다 평범한 거리의 조선인에게서 그때의 서양인들이 보았던 공통점은 ‘대단히 매력적인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타인의 평가와 시선에 과도하게 얽매일 필요는 없겠지만 그 시선 속에 자기 정체성이 확인되는 것은 사실이다. 박수영이 말하고 싶어한 핵심은 최근 30여 년간의 경제적 성취와 K-컬처의 확산이 우연의 소산이 아니라 우리에게 내재된 잠재력의 발현이라는 점이다. ‘내한민국’을 읽고 정동길을 다시 떠올려 보게 된다. 내게 강한 인상으로 남는 역사 속 인물은 손탁 여사다. 러시아 공사관 베베르의 처형이라는데 5개 국어를 자유자재로 구사했고 한국말도 금방 익혔던 재원이란다. 고종 황제에게 커피맛을 알려줬고 하사받은 땅에 최초의 서양식 호텔인 손탁호텔을 세운 인물이다. 그 호텔 1층이 ‘정동구락부’였다. 그 구락부에서 오갔을 각국 외교관들의 음모와 배신 대한제국 관료들의 우국과 매국의 회합들이 떠오른다. 위로는 황제부터 황후, 신료들을 쥐락펴락했다는 외국인 여걸 손탁의 활약상이 마치 영화의 한 장면처럼 그려진다. 그 건물, 그 속의 그 테이블, 집기들과 메모들 하나하나가 모두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지난 4월에 무척 중요한 손님을 맞이한 일이 있다. 오랫동안 책을 통해 사숙하던 일본인 작가 나나오 준 선생과 1988년부터 인연이 생겨 양국을 오가며 만나왔고 그 아들 이토 요분과도 친분을 이어오고 있는데 이토의 어린 두 아들과 연로한 어머니까지 삼대를 잇는 일가의 방한이었다. 이토의 부인은 교육학 교수이면서 한국역사에도 밝다. 어디로 데려갈지 고심이 컸는데 최종 결정지가 바로 정동길이었다. 서울시립미술관의 화사한 앞마당에 도착해 안내를 하다가 잠시 이상한 심경에 사로잡혔다. 날씨는 화창하고 사람들이 해맑게 웃고 있는데 문득 유럽의 어느 곳 가령 파사드가 멋진 오스트리아 어떤 미술관 앞에 서있는 듯한 착각에 사로잡힌 것이다. 다음 장소로 찾아간 덕수궁 경내는 의외로 차분하고 평온했다. 마침 입구에서 떠들썩한 수문장 교대식을 관람하고 들어가서인지 빌딩숲에 둘러싸인 궁내의 평온함이 더 과장되게 느껴졌다. 나는 지금 일본인 일가족에게 내 나라의 대표적인 명소를 안내하고 있는 중이다. 그들의 선조들이 우리를 식민지로 삼았고 그 후예들은 친구가 되어 즐거운 담소를 나누는 중이다. 이토네와 우리 가족 사이의 갈등이 있을 리 없었지만 그 친분에 앞서 내가 사로잡혔던 조금 이상한 기분의 정체를 나중에 깨닫게 됐다. ‘잘 살고 우월한 일본’ 대 ‘가난하고 못난 한국’의 구도가 내 안에서 완벽히 깨져 있었고 그것이 새삼스럽게 다가왔던 모양이다. 50대 중반 나이인 나의 조국은 2만 달러 소득 운운해도 여전히 누추하다는 고정관념 속에 있다. 그런데 어느덧 전형적인 일본 지식인 중산층 일가족과 한국 관광을 하면서 전혀 꿀리지 않는 나 자신이 좀 이상하게 여겨졌던 것이다. 정동길의 건물 하나하나가 이처럼 평범한 사람에게도 역사를 환기시켜 준다. 거창한 국가의식이나 민족정신 같은 것으로 비화시키지 않아도 내가 어떤 존재로 선대부터 내려와 지금에 도달해 있는지 생각을 하게 만든다. 대한문 앞에 즐비한 시위대 현수막과 농성 중인 천막들조차 그러하다. 굽이치는 역사가 흐르고 흘러 해소되지 않는 이념갈등 빈부격차 노동권의 외침까지 대한문 앞에 다 모여 있다. 그리고 그 대문에서 한 치만 옆으로 벗어나 올라가면 아름다운 미술관과 유서 깊은 학교들이 호젓한 산책로를 만들며 연인들을 부른다. 그런 정동길 허리쯤에 손탁호텔 못지않게 긴 역사성을 지닌 하남호텔이 있었다. 작고 아담한, 가정집 규모의 숙소지만 우아했다. 누구도 역사성에 관심이 없었던가. 1990년대 중반 어떤 반대도 없이 하남호텔은 무참하게 철거돼 버렸다. 그리고 그 자리에 거창한 현대식 규모의 캐나다 대사관이 들어섰다. 당신은 지금 정동길에 우람하게 들어선 그 대사관 건물이 아름답다고 여겨지는가. 역사의 기억을 보존한다고 여길 수 있는가. 제발 부수지 말라. 제발 허물고 새로 짓지 말라. 정동길만이라도 지금 모습 그대로 고종의 무거운 발걸음, 유관순 열사의 외침을 기억하게 하라.
    Munhwa         김갑수 시인·문화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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