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세시풍속 담론

<18>여름비

浮萍草 2013. 6. 25. 22:25
    ‘고우<苦雨>’ 아닌 감로비 되길
    예나 지금이나 길게 이어져 피해도 커 실내서 차분히 기운 모으는 지혜 필요 학작품에 주로 등장하는 비는 봄비ㆍ가을비이고 겨울비 또한 스산함의 미적 표현으로 드물지 않게 눈에 띈다. 이에 비해 ‘장마’라고 할지언정 ‘여름비’라는 말은 잘 쓰지 않는다. 여름에 내리는 비는 너무 흔한데다 민폐가 커서 그리 환영받지 못하고 정서적 감흥도 불러일으키지 못하는 듯하다. 그런데 폐해만 잠시 접어둔다면, 비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여름비만큼 빠져들게 하는 게 없다. 온 우주공간을 채우듯 줄기찬 기세로 내리는 여름 빗줄기는 도무지 이 세상의 일 같지 않은 것이다. 비에 대한 옛사람들의 표현도 재미있다. 그 뜻을 가늠하기 힘든 것으로 ‘여름비는 소 잔등을 가른다’는 말이 있다. 국지적으로 쏟아지는 여름비의 특성 때문에 소의 잔등조차도 비가 오는 부분과 오지 않는 부분이 있다는 뜻이다. 또 봄비는 풍년을 불러 인심이 후해진다 해서 “봄비 잦으면 지어미 손이 크다”고 하는가 하면 가을비는 잠깐 내리다가 그치는 때가 많아 “가을비는 시아버지 수염 밑 에서도 긋는다”고 표현했다. 계절에 따라 비의 얼굴도 달라진다. 비가 오면 봄에는 바빠지니 ‘일비’요 여름에는 낮잠 자기 좋은 ‘잠비’ 가을에는 떡 해먹기 좋아 ‘떡비’ 겨울에는 농한기라 한잔하기 맞춤인 ‘술비’였다. 자연과 함께 살아가는 이들이기에 자연을 해석하는 진솔하고 낙관적인 태도가 잘 읽혀진다. 우리 삶에는 공부하기에 좋은 세 가지 여가(讀書三餘)가 있다고 한다. 한 해의 여가인 ‘겨울’, 하루의 여가인 ‘밤’, 그리고 시(時)의 여가인 ‘비오는 때’이다. 에너지를 발산하는 여름에는 밖으로 돌기 쉬우나 실내에서 차분히 기운을 모으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말도 양기(陽氣) 충만한 여름에 음기(陰氣)의 비가 많은 이치와 통하는 듯하다. ‘ 독서삼여’라지만 글공부도 마음공부를 떠나지 않는 것이니 글공부ㆍ마음공부 모두 삼여의 공부거리 아니겠는가. 사대부의 글쓰기 틀을 깨고 ‘대수롭지 않은 것들’을 써서 신선한 바람을 일으켰던 고려 말의〈역옹패설〉도 비오는 날 탄생했다. 저자 이제현은 서문에서, 달포 가까이 내리는 여름비에 하릴없이 앉았다가 처마 밑 빗물을 받아 벗들과 나눈 편지조각들을 이어 붙이고 뒷면에다 생각나는 대로 글을 적은 뒤 마지막에 ‘역옹패설’ 이라 썼다고 한다. ‘비가 오기에’ ‘편지지의 뒷면에다’ 썼다는 표현으로 별거 아닌 듯 스스로 작품의 가치를 낮춤으로써 오히려 별것이 되는 데 성공했던 것이다. 예나 지금이나 여름비는 길게 이어져 피해가 크다. ‘장마’는 길 ‘장(長)’과 물을 뜻하는 ‘마’가 합해 생겨난 말이다. 물의 고어인 ‘무르(마라)’가 ‘말’로 축약되어 ‘마’, ‘말갛다’, ‘ 맑다’는 표현들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에 장마를 고우(苦雨)라 불렀다. 조선 중기의 장유(張維)는 “석 달 가뭄은 그래도 견디지만 사흘만 비 내려도 감당하기 어려운데 열흘 넘게 쏟아지는 빗줄기 벽장 속까지 푸른 이끼 생겼구나 간밤엔 천둥치고 바람 불며 초가집을 온통 들어 엎을 듯 아침녘에 일어나 하늘 보니 구름 속에 노기가 아직도 서려 있네”라고 ‘고우’를 읊었다. 여름비가 고통스러운 고우가 아니라 부처님의 자비와 가르침처럼 은혜로운 택우(澤雨)가 되기를 가뭄 끝의 달고 단 감우(甘雨)가 되기를….
    불교신문Vol 923         구미래 불교민속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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