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한자 실전인문학

<1> 우리 말 속에는 그 말의 뜻 담겨있다

浮萍草 2013. 5. 30. 19:12
    21세기 첨단 시대에 한자에 주목하는 이유
    근본 잃은 현실... '한자'는 한글로 표기되는 수많은 우리말 定意 담은 辭典 1. ‘진실(眞實)’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속에는 무엇이 진실인지‘진실’에 대한 정의가 담겨 있으므로 ‘진실’이라는 말은 쓰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가 하나의 기준에 입각해서 ‘진실’을 이해하고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오늘 우리는 ‘진실’이 말하는 정의(定意)가 무엇인지 알지 못합니다. 무엇이 진실인지 모르다 보니 각자 ‘진실’의 기준이 다르고 다른 기준으로 ‘진실’을 말하다 보니 아무리 진실이라고 말해도 믿지 못하는 세상이 되어 버렸습니다. ‘바르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 속에도 역시 무엇이 바른 것인지에 대한 정의가 담겨 있습니다. 그래서 ‘바르게 말해라’하면 모두가 하나의 기준에 의해서‘바르게’ 말할 수가 있어야 하는데 우리는 ‘바르다’라는 말의 본래의 의미를 알지 못합니다. 무엇이 바른 것인지 모르다 보니 각자 자기 나름의 기준에 따라‘바르게’행동했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착하다’ ‘선하다’‘아름답다’라는 말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말 속에는 이미 그 말의 뜻(의미)이 담겨 있습니다. 말의 뜻을 담아 문자를 만들었기 때문에 문자를 통해 말의 뜻을 알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선하다’라고 말을 하면 무엇이 선한 것인지 듣는 사람이나 말하는 사람이 동시에 하나의 기준을 떠 올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오늘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합니다. 말의 속뜻은 잃어버리고 껍질만 습관적으로 사용하는데 익숙해졌기 때문입니다. 우리 사회가 혼란한 이유는 가치관의 혼란이 원인이며 가치관의 혼란은 언어와 문자의 근본을 잃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우리말의 원래의 뜻을 회복하면 가치관을 정립할 수 있고 그렇게 되면 우리사회의 혼란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하게 해주는 문자가 ‘한자(漢字)’입니다. ‘한자’는 한글로 표기되는 수많은 우리말의 정의(定意)를 담은 ‘사전(辭典)’이기 때문입니다. 2.
    한자에 대한 문제는 굳이 여러 말을 필요로 하지 않습니다. ‘배우면 도움이 되는 줄은 알지만 배우자니 어렵고…, 그렇다고 포기할 수도 없고…, 많은 시간을 들여 어렵게 배워도 금방 잃어버리고…’ 등등 문자는 일부러 어렵게 만드는 것이 아닌데, 왜 한자는 어렵게만 느껴질까요? 이제 그 원인을 비롯해서 한자를 새로운 관점에서 보아야할 근거를 마련했습니다. 한자는 자체로 문명사적인 배경을 가진 발명품입니다. 한자에는 문명의 여명기 우주적 자각에 대한 집단의 체험이 담겨 있습니다. 때문에 한자 자체가 학문의 대상이어야 합니다. 한자로 쓰인 저작물을 읽기 위해서가 아니라 한자를 만든 사람들의 생각을 읽는 것이 한자 학습의 목적이 되어야 합니다. 그들의 생각이 오늘 우리가 가진 생각의 뿌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삶의 목표로 생각하고 추구하려는 대부분의 것들이 그 안에 담겨 있기 때문입니다. 한자 자체가 이미 고대 지성의 지혜를 담고 있는 ‘교과서’인 것입니다. 이제 이 교과서를 통해서 우주적 가치 체계를 다시 수립할 수 있습니다. 삶의 철학과 우주적 질서, 가치 체계를 배우고 익힐 수 있습니다. 근원적이며 우주적이며 가치지향적인 안목을 기를 수 있습니다. 가치관이 바로 서면 우선 자아(自我)를 찾고 바로 세울 수가 있으며 거짓 지식을 가려내고 무엇이 진리인지 분별할 수가 있게 되는 것입니다. 3.
    ‘한자’는 익히기도 어렵고 기초를 익혔다 하더라도 동양의 고전이라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을 읽고 속뜻을 깨우치기란 전문가가 아니면 거의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혹 전문가라 하더라도 종종 번역 문제로 논쟁이 일어나는 것을 보면 한자를 완전히 깨우친다는 것이 얼마나 어렵고 힘든 일인가를 생각하게 됩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우리 자녀들에게 한자 익히기를 요구합니다. 900자, 1800자, 3500자 등 배워야할 한자의 수를 정해주고 따라오기를 기대합니다. 적어도 그 정도는 배우고 익혀야 한다는 것일까요? 그것이 하나의 기준이라면 과연 우리 사회에서 3500자는 그만두고 900자라도 제대로 읽고 쓸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요? 아니 그렇게 많은 한자를 읽고 쓴다고 해서 그의 인생에서 과연 무엇이 달라질까요? 공감하실지 모르겠지만 내가 느끼기에 한자는 늪입니다. 한번 빠지면 헤어나기 힘든 늪입니다. 만일 한자에 답이 있다면 천자문(千字文)을 시작으로 평생 한자와 더불어 살았던 조선조의 선비들은 무언가 진리에 대한 답을 찾았을 것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조선조 선비들 중에 그 답을 찾은 이를 보지 못했습니다. 그럼에도 다시 한자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아니 그래서 다시 한자를 이야기하려 합니다. 한자 학습은 무조건 써보고 또 써보는 것만이 방법이라고 외치는 이들에게 우리의 미래를 맡길 수 없습니다. 개념도 모르면서 수천 개의 한자를 통으로 외우는 단순 작업에 동원된 우리 어린이들을 구해야 합니다. 왜 그런지,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도 모르면서 남이 가니까 따라갈 수밖에 없는 안타까운 현실을 외면할 수 없습니다. 대한민국 한자 학습의 목표와 방법을 바꿀 전환점이 필요한데 이 글이 바로 그 계기가 될 것입니다. 이제 대한민국의 한자 학습은 변하게 될 것입니다. 한자가 변하면 가치관이 변하고 가치관이 변하면 삶이 변하게 될 것입니다. 한자는 새 변화를 이끌어 낼만큼 충분한 역량을 갖추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21세기 인류가 지향할 가치가 출현한다면 그것은 한자를 통해서 일 것입니다. 한국에서 미래 인류의 지도자들이 배출된다면 그것은 한자를 통해서일 것입니다. 우리에게 남은 최후 최고의 마지막의 고전이 ‘한자(漢字)’이기 때문입니다. 한자에는 세상을 어떻게 볼 것이며 어떻게 보는 것이 가장 근원적인가를 알 수 있는 내용이 가득 차 있습니다. 한자는 글자 하나 하나가 그대로 한 권의 교과서입니다. 인류 문명이 열린 이래 어느 저자도 도달하지 못하고 누구도 체험해보지 못한 높은 경지를 담은 저서입니다. 120개의 한자를 배운다는 것은 120권의 인문학 저서를 읽을 것과 같습니다. 120개 기초한자는 우주 자연의 질서를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120여개의 한자를 배우면서 자연스럽게 우주자연의 질서와 체계를 익힐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이 한자는 현재 우리 한국인이 사용하는 우리말과 직결되어 있어 한자를 익히는 과정에서 지금껏 어느 고전에서도 볼 수 없는 새로운 지혜를 체험하게 될 것 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다시 시작하려는 한자의 위력입니다. 작게 생각하면 한자를 조금 쉽게 익히는 정도로부터 크게는 인생의 목표와 삶의 가치를 우주적 본질에 다시 뿌리를 내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이 한자 속에 우주적 존재로써의 자각과 자각을 통한 깨달은 이의 폭넓은 안목을 가질 수 있기 때문입니다. 4.
    이제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언어와 문자에 대한 기본적인 의미들을 살펴보는 것으로부터 우리가 희망하고 꿈꾸는 이상적인 세상을 위한 첫걸음을 시작하려 합니다. 우리 언어와 문자에 담긴 내용을 공감하는 분들의 자각이 쌓이면 잔잔한 변화가 일어날 것이고 우리 겨레의 인류사적 위상을 회복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이 생각에 공감하시리라는 믿음으로 용기를 얻어 편지를 씁니다. 이 편지가 우리 주위에 잠자는 의식들을 깨워 일으키는데 도움이 되기를 희망합니다.
    환타임스         조옥구 한자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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