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세시풍속 담론

<14> 보릿고개와 하안거

浮萍草 2013. 5. 27. 07:00
    나누어줄 줄 알아야 불교가 산다
    만암스님 “중생이 굶주리면 승려도…”
    스님들 마음공부 보리 익듯 무르익길
    
    ‘보리는 망종 전에 베라’는 말이 있듯이 이즈음 농촌 들녘은 보리수확이 한창이다. 
    “보릿고개 험하기가 태산같이 험하여라. 
    단오명절 지나서야 보리추수 시작이네. 
    풋보리죽 한 사발을 어느 누가 가져다가 비변사 대감에게 맛보라고 나눠줄까.” 
    정약용이 옛 포항에서 유배생활을 할 때 지은 장기농가(長?農歌)의 한 구절이다. 
    곡식은 떨어지고 햇보리는 여물지 않아 기아에 허덕이는 백성들에게 보릿고개는 태산을 넘듯 힘겨워 함께 아파하는 그의 마음이 
    담겨 있다.
    특히 지주와 소작농으로 양극화의 골이 심화된 일제강점기는 보릿고개가 구조적으로 정착된 시기였다. 
    당시 춘궁기에 초근목피로 연명하는 농가가 반을 웃돌아 풀뿌리든 나무껍질이든 먹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이든 끓여먹었다. 
    정약용이 비변사 대감에게 풋보리죽 한 사발을 먹이고 싶었듯 백성이 힘들어도 권력과 재력 있는 이들은 나 몰라라 하는 것이 세상
    인심이기도 하다. 
    성경에“부자가 천국가기란 바늘구멍에 밧줄 들어가기보다 어렵다”고 했던가. 
    그러나 우리에게도 어느 시절에나 의로운 권력자 자랑스러운 부자들이 많았다.
    ‘경주 최부잣집’은 300년간 12대에 걸쳐 만석지기로 이름 높았지만 당대는 물론 오늘날에도 부자의 귀감이 되고 있다. 
    ‘사방 백리 안에 굶어죽는 사람이 없게 하라’,‘만석 이상의 재산은 쌓지 마라’,‘흉년에는 땅을 늘리지 말라’는 가훈을 지키며 공동체와 
    더불어 살아왔던 것이다. 
    그러한 가르침이 있었기에 후손 최준은 일제강점기에 자신만 부자로 사는 것을 부끄럽게 생각하고 거액의 재산을 독립운동자금으로 
    지원함으로써 한결같은 모습으로 12대를 이어갈 수 있었다.
    그런가하면 백양사 만암스님은 선(禪)과 교(敎)를 두루 겸비한 선지식이면서 선농일치의 사상을 널리 펼치고 몸소 실천하신 분으로 
    이름 높다. 
    당시 보릿고개로 고통 받는 이들에게 사찰양식을 풀고‘나누어줄 줄 알아야 불교가 산다’,‘중생이 굶주리면 승려도 굶어야 한다’고 
    설파하며 중생과 고통을 함께 나누었던 것이다.
    미얀마의 만달레이 수도원에서도 놀라운 모습을 본 적 있다. 
    마을주민들이 올린 탁발공양으로 음식과 과자를 받아든 스님들을 따라가 보았더니, 
    승방의 주변에 그것을 다시 얻어가는 이들이 있는 게 아닌가. 
    그들을 주로 노인 아기를 안은 어머니 아이였는데 그저 앉아서 두 손을 내밀었고 스님들은 자연스레 자신의 몫을 나누어주었다.
    수행에 힘쓰는 스님을 공경하며 공양하는 것은 당연한 일일뿐더러 어렵고 굶주린 중생을 돕는 일 또한 당연하다. 
    물질의 오감은 일방적인 것이 아니라 필요한 곳에 물 흐르듯 가는 것이 세상살이의 이치임을 깨닫는 순간이었다. 
    공양을 받고 그것을 다시 베푸는 선순환…. 
    거기에는 이미‘누가 누구에게’공양한다는 구도를 떠나있었다. 
    억불(抑佛)시기의 조선 초기에 관리들이“여름안거에 들어간 승려들에게 백성들이 다투어 공양한다”고 통탄하며 이를 금하도록 
    상소를 올렸다. 
    이에 세종은 명쾌한 답변을 내린다. “승려도 나의 백성이라 절에서 살면서 아니 먹을 수는 없을 터, 
    그들이 굶주린다면 국가가 모른 척 하겠느냐. 그러니 민중이 다투어 공양함은 해로울 것이 없다.”
    하안거에 든 스님들의 마음공부가 보리 익듯 무르익기를 여러 선학들처럼 핵심을 찌르는 명쾌한 자비심으로 무르익기를….   
    
    불교신문 Vol 2915         구미래 불교민속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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