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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연등의 보편성

浮萍草 2013. 5. 10. 09:43
    불교와 민간 ‘만남의 고리’
    고려 말 이후 확산 ‘민속축제화’…조선시대 집집마다 장대에 연등 단 것도 민간 ‘영등신앙’과 다르지 않아 “부젓가락 잡고 불전의 등잔 돋울 제 심지는 수미산이요 기름은 대해를 이루는구나….”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 가운데 등공양이 최상임을 노래한 광수공양가(廣修供養歌)는 고려 초에 균여대사가 지어 널리 전파한 향가 이다. 등을 공양하는 중생의 정성어린 마음이 수미산처럼 높이 솟아 밝게 비추고 바다처럼 넓고 모자람 없기를 바라는 염원이 담겨 있다. ‘등을 켠다’,‘등을 밝힌다’는 뜻의 연등(燃燈)은 불교문화권에서 널리 성행되어온 불교의식으로 알려져 있다. 석가모니 부처님이 열반에 들면서 ‘스스로를 등불로 삼고 진리를 등불로 삼으라(自燈明法燈明)’는 가르침을 남겼듯이, 등을 켜는 것은 곧 무명을 밝히는 지혜를 상징하는 것이었다. 이에 연등은 불보살께 올리는 핵심적인 공양행위가 되었고 중생들은 일상의 등공양이 대규모의 축제적 연등회로 확대될 때 더욱 환희심을 느끼며 축제를 즐겼다. 이렇듯 불교의 연등이 오랜 역사를 통해 사상적.신앙적으로 전승되어왔지만 의식행위로서 불 밝힘은 물론,‘연등’의 의미 또한 불교 만의 것이 아니라 광범위한 기반을 지닌다. 국가의례로 연등회가 성행하기 이전부터 민간의 연등은 늘 따로 또 같이 전승되어왔던 것이다. 우리의 세시풍속을 보면 만월(滿月)의 보름에 불 밝히는 민속이 더욱 성행했는데 밤의 어둠을 환히 밝혀줄 뿐만 아니라 풍요와 생명 력을 상징하는 달(月)과 불(火)이 만나 벽사기복의 의미가 상승되었던 셈이다. 달의 변화로 삶의 주기를 인식했던 시대에 농경사회의 대보름은 대축제의 날이었고 일련의 불놀이에 의한 생산축원이 광범위했다. 연등회 또한 불교력(佛敎曆)과 무관한 정월보름에서 비롯되어 2월 보름을 거쳐 사월초파일로 옮겨갔다. 고려시대에 2월 보름 연등회가 정착된 것은 부처님 열반절이기도 하거니와 2월초하루를 ‘머슴날’이라 부르듯 본격적인 농사일이 시작되는 2월의 시기성과도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 민간에서 이달 외지에서 찾아드는 내방신을 용등.용동.영등이라 부르며 신맞이 장대(神竿)를 세우고 음식을 장만해 정성을 들였다. 신라의 석탈해전설에서 동해의 여왕이 아들인 탈해, 곧 용동(龍童)을 인도해 바다에서 도래하는 구조를 지니고 있어 ‘용동+연등→ 영등’의 뿌리 깊은 결합양상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연등의 전승양상을 보면 불교와 민간의 상호교류가 흥미롭다. 가장 불교적인 초파일연등이 고려말 이후 민간에 확산되어 불교적 의미는 희석되면서 민속축제화 되는가하면,민간의 2월 ‘영등’ 처럼 본래 불교와 무관하던 것이 일련의 연등민속과 연계되어 영등할미를 제석할미.연등(燃燈)이라 하고 2월을 제석달(帝釋月) 이라 부르며 불교적 색채가 짙어지기도 한다. 조선시대 초파일 민속에서 집집마다 장대를 세우고 연등을 단 것도 민간에서 신간을 세우던 영등신앙과 다르지 않아,초월적 존재를 경건하게 맞는 중생의 심성이‘등’을 매개로 넘나들었던 것이다. 오늘날 전국의 사찰마다 연등이 꽃피고 환희로운 연등축제가 자리 잡을 수 있었다면,본래의 의미에 대한 끊임없는 성찰과 더불어 연등은 늘 중생과 함께 삶을 밝혀왔다는 전승맥락을 되새길 만하다. 부처님 앞에 오롯이 불을 밝히며 삼보에 귀의하고 복된 삶을 누리고자 한 중생의 마음이 초파일 연등의 맨 앞에 놓여야 할 것이다.
    불교신문 Vol 2911         구미래 불교민속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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