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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호태왕 비문 신묘년 기사의 바른 해독 (4부)

浮萍草 2013. 5. 21. 22:37
    단재 신채호선생의 해석에 대한 비판
    3. 호태왕비문 원문의 바른 해독
    렇게 원본이 찾아져도 사문을 알지 못한다면 사실문으로 쓰인 그 내용을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게 된다. 조소앙 선생이 찾은 원문을 바탕으로 구체적인 사례를 들면서 비문의 바른 해독법에 대해 살펴본다. 1) ‘屬民觀’의 바른 해석 단재 신채호(1880∼1936) 선생은 성균관 박사(正七品) 출신이다. 선생께서 설파한 한국사에 감명 받지 않은 자가 없을 만큼 유명한 역사가께서도 광개토대왕 비문을 오판하여 후학에게 곤란을 겪게 한 부분이 있다. 필자는 단재 선생을 폄훼할 목적으로 이 말을 하는 것이 아니지만 실수가 있음이 안타까워 3년 동안 책을 덮고 글 한 줄 쓰지 않을 정도로 충격을 크게 받았음을 실토한다. 그러나 한국사의 발전을 위해 틀린 부분은 틀렸다 말하는 것이 도리일 것 같아서 작심한 바 2012년도에 부분적으로 그 사실을 발표 하였다. 오늘 발표될 글에 이 사실을 다시 환기시켜 후일을 대비해 선생께서 실수하고 오판한 부분을 언급하겠다. 속민관(屬民觀)이라 칭하는 부분은 비문 내용 중 한일 간 다툼이 되는 부분이자 일본인들이 임나일본부설을 주장하는 근거로 제시 하는 소위 신묘년 기사로 1면 중간 하단부에서 시작되는 아래와 같은 내용이다. 百殘新羅 舊是屬民 由來朝貢而 倭以 辛卯年來渡海 (백잔신라 구시속민 유래조공이 왜이 신묘년래도해)
    단재는 바로‘백제와 신라는 고구려 속국민이니 조공을 해마다 바쳤다….’라고 해석하므로 뒤에 연결되는‘倭(왜)는 辛卯年(신묘년) 부터 조공을 가지고 바다를 건너왔다.’는 부분을 ‘왜가 바다를 건너와 멸망한 백제·신라를 쳐서 신민으로 삼았다.’라고 주장하는 일본 측의 해석을 도와주는 격이 되었다. 그러나 아래와 같이 단어의 뜻을 바르게 찾아 해석해보면 전혀 뜻이 다름을 알게 된다. - 백잔(百殘) : 백제의 잔재라고 보는 것은 아직 이르다. 한자의 의미로 <새벽에 남은 별들>이라는 의미도 있으니 격조높은 어휘가 되며 아직 백제가 망하지 않은 상태이므로 잔재라는 용어도 적절하지 않다. 특히 문정창은 백제와 전혀 다른 부족국가라고 주장한다. - 신라(新羅) : 새 터에 조상의 묘를 옮겨 얼을 빛내다. 고구려는 신라를 확실하게 국호로 썼다. 신라를 높여서 예우하고 있는 것이다. - 속민(屬民) : 권속과 구민(舊民)의 뜻. 백잔은 고구려의 직계친족 간이고 신라는 옛터를 지키고 있는 구민이니 조상 때부터 동족 이라는 뜻이라 결코 고구려의 속국민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참고 : 가야만 초기에 신라의 속국이었고 삼국은 어떤 나라도 속국민이 된 때가 없었다.) - 이신묘(以辛卯) : ∼부터 하라 (명사 앞에 以는 부사격이다) - 구시(舊是) : 옛 이곳. 옛부터 이곳에 (살다) - 유래(由來) :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음 (풍습·전통) - 년래도해(年來渡海) : 해마다 바다를 건너옴 이런 뜻을 바탕으로 우리가 평소에 말하는 순서에 따라 본문을 해석해보면 ‘백잔과 신라는 옛날부터 이곳에 살던 권속과 구민이니 조상의 풍습을 물려받아 조공을 거래했고 왜는 신묘(년)부터 조공을 가지고 해마다 바다를 건너왔다.’ 라고 해석된다. 위의 문장 주제는 조공(朝貢)이므로 ‘而’ 때문에 후속 문장도 조공을 뜻한다. 곧 조공을 반복해 사용하라는 문장의 약속이다. 그러므로 왜는 조공을 하기 위해 바다를 건너왔고 전쟁하려고 바다를 건너왔다는 해석은 거짓이다. ‘而’가 바른 해석을 밝히는 근거가 되었다. 서투른 해석자가 조사나 부사를 무시하고 명사나 동사·형용사 등만 가지고 해석을 하다보면 이와 같이 엉뚱한 문장을 만들게 된다는 사례다. 그리고‘辛卯’는 간지의‘年’을 붙이지 않아도 신묘년이라고 읽는다는 것은 상식이다. 그런데 뒤에 붙어‘年來渡海’로 쓰일‘年’을 앞으로 끌어다가‘신묘년에…’라고 해석하는 것은 부사격 서술어‘以’의 ‘~부터’라는 쓰임을 무시한 것이다. 분명히 문장에는 ‘以辛卯’로 해석하게 되어있는데 ‘以’를 생략하였으므로 서술어가 없는 문장으로 변질되었다. 또‘年來渡海’여야 할 문장에서‘年’을 떼어냄에 따라‘來渡海’가 되었고 문장의 격을 채우기 위해 다음 문구에 붙어‘破百殘…’이 되어야 할‘破’를 끌어다가 來渡海破라는 우스운 글을 만들었으니 이는 완전한 엉터리 글이다. 來渡와 海破는 시어(詩語)에 쓰일 수 있는 관념문의 글인데 비문의 전체 문장은 사실문이기 때문에 엉뚱하게 시어가 등장할 부분이 아니다. 그런데 당연히 연도를 가리키는 간지에‘年’을 붙여서 해석하니 웬만큼 글을 보는 사람도 속았던 것이다. 일본의 학자들이 100여 년 동안 이렇게 문장을 조작하고도 아직까지 부끄러워하기보다 큰소리를 치는 것은 피해 당사국인 우리나라 학자들이 이러한 의도적 왜곡을 구체적으로 집어내어 반론을 못했기 때문이다. 이 사례는 웃음꺼리로서 일본인들에게는 회심의 미소를 줄 내용이지만 우리나라 사람으로서는 일본인들에게 농간을 당하고 있었던 것이 끝없이 창피한 일이다. 이제는 이러한 무지(無知)에서 벗어나야 한다.
    비문의 조작한 글자에서 횟물이 흘러나오고 있다.

    단재의 이런 실수는 단순한 오판으로 끝나지 않았다. 위와 같은 실수는 민족의 수난기에 광개토대왕을 위대한 대왕으로 높여서 아시아에도 알렉산더 대왕 같은 인물이 있다는 민족의 자긍심을 심어주기 위해 고구려 정통론을 주장하느라 저지른 고의적인 실수인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족 간의 싸움을 강조한 이런 해석은 일본인들에게는‘조선인은 단결보다 분열의 민족성을 가졌다’고 주장할 수 있게 했고, 북한에게는 동족상잔을 일으킬 할 수 있는 명분을 제공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비문 전문을 잘 짚어보면 태왕은 동족을 정복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분쟁이 있을 곳은 미리 토벌하여 사전에 큰 전쟁을 예방했다. 그러므로 ‘토벌’한 이유와 상황을 설명하였고,동족이 살고 있는 땅에 다른 족속들이 횡포를 부릴 때는 과감하게 정복의 길을 떠나서 평정했으며,터를 지켜온 구민(舊民)들에게 편하게 살도록 보살피고 조상의 묘를 잘 지키라 당부하는 말을 잊지 않았다. 대왕은 실제로 이렇게 동족을 아끼고 위무했는데 단재는 대왕을 잃어버린 땅을 회복하는 큰 뜻을 가지고 있어서 그렇게 하는 데 걸림돌이 될 자국 동족도 때로는 희생을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고 해석한 것이다. 이런 주장은 단재 개인적인 역사관 내지 영웅관(英雄觀)으로서 식민지 생활을 하던 한국인에게 크게 영향을 끼쳐 대일항쟁 의욕과 용기를 불어넣은 공로는 있다. 그리고 호전적 후학에게는 청량제가 되었다. 그러나 누가 알았겠는가? 안타깝게도 광복이후 남북이 단일정권으로 수립되지 못한 이유에 바로 이 단재 선생의 동족정복 옹호론이 불씨가 될 줄을…. 북한이 정권 수립과정에서 독자노선을 주장한 이면에는 바로 단재의 역사관에 그 뿌리가 있으며 서슴없이 남한의 동족을 협박하고 오만을 떠는 것도 단재의 ‘위증’이 빚어낸 결과라고 개인적으로 판단하고 있다. 광개토대왕이 진정한 민족의 영웅이 된 까닭은 동족을 지배한 영웅이 아니라 동족끼리의 싸움을 차단하고 구민과 유민을 정착하여 안심하고 살게 한 것 때문이라는 것을 바로 대왕의 비문에 나타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훌륭한 민족지도자를 잘못 이용될 수 있도록 해석한 역사가의 실수는 새롭게 조명되어야 한다. 단재의 그런 해석은 당시 일제치하서 신음하던 우리나라 사람들의 마음에 용기를 일으키게 할 목전의 목적이었지 광복이후 동족 상잔까지는 내다보지 못한 단견적 충정의 결과였다고 정리하고 싶다. 나는 단재만한 역사가가 더 있기를 바라고 단재만한 애국자가 더 있기를 기대하면서‘왜 단재께서 이런 실수를 했을까?’하고 한 때는 경악하였지만 일제시대에 저항정신을 일으키기 위한 고의적 실수였다고 애써 변명해 보았고 그럴 수 있다고 본다. 그러나 민족분열을 초래하는 데도 기여했다는 잘못에 대해서도 논의가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한편 민족정신을 저해하고 사상이나 종교적 이론을 앞세워 민족을 혼란으로 빠뜨리는 이념주의나 종교주의자에게는 단재와 같은 ‘증언’이 치유의 약이 될 수도 있으나‘위증이 아닌 진짜 민족정신’이 대왕의 비문에 유훈으로 고스란히 있음을 분명하게 찾아내어야 하며 나는 이 자리에서 그것을 확실히 증언할 수 있다.
    Greatcorea         김덕중 (사)삼균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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