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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호태왕 비문의 원본을 찾아서 (2부)

浮萍草 2013. 5. 21. 21:43
    변조 전 비문의 탁본을 찾아야 올바른 고구려 역사를 찾는다
    2) 광개토호태왕비문의 원본 ⑴ 원본을 찾지 못하고 있는 주류 학계의 연구 1880년대 초에 광개토호태왕비가 재발견된 이후 130여 년 동안 비문을 연구한 국내외 학자들의 연구논문은 한국과 중국·일본 등 에서 무려 1,000여 편이 넘는다고 한다. 논문과 서책이 주류를 이루지만 어떤 자료를 가지고 연구되었는가 하는 것이 중요하다. 실제로 비석 앞에 가서 아무리 살펴봐도 해독할 수 있는 글자 수는 많지 않다. 그러므로 탁본을 하여 탁본문을 살펴야 하는데 문제는 앞에서도 살펴보았듯이 현재 일본인에 의해 변조된 후에 퍼뜨린 탁본들이 많이 나돌고 있는 데 있다. 따라서 비문의 원문을 알기 위해서는 변조 이전에 비문을 탁본한 정탁본(精拓本 또는 正拓本)과 변조 후의 조탁본(粗拓本)을 비교 연구하여 현재 없어진 260여자의 결자를 찾아 원문에 가까운 석문을 만들어내어야 한다. 글자들이 오랫동안 마모되어 정탁본만으로도 판단이 어려운 글자가 있고,조작이 많은 조탁본은 신뢰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참고로 정탁본이란 ‘原石 精拓本’의 약자로서 비문에 일체의 손을 대지 않고(변조되기 이전의 상태일 가능성이 높다) 탁본한 것을 말하는데 북경대학에서는 正拓本이라고도 한다. 북경대학에서 현재 정탁본 3질과 조탁본 5질의 탁본을 보유하고 있다고 하는데 경희대학 도서관에서 1, 2면 정탁본만 최근에 입수 했다는 보도가 있었다. 조탁본이란 석회를 발라서 한 탁본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그간 연구한 국내외 대부분의 학자들은 260여자에 달하는 결자(缺字)를 찾아 채우지 않고 일본이 배포한 석문이나 탁본을 근거로 연구서를 쏟아내었다. 이처럼 출처가 불명한 자료를 바탕으로 한 글이 근간을 이루고 해석이 어려운 결자 부분은 중국이나 일본식인 관념적 해석으로 어물쩍 넘어가니 광개토호태왕 비문을 바로 알려는 연구는 거의 없고 일인들이 변조한 탁본을 가지고 그들이 해석한 방식으로 해석 함으로써 일본의 역사왜곡 의도를 돕는 결과가 되고 있는 것이다. 비문의 원탁본이 제법 있으나 판독이 어렵고 쌍구가묵본(雙鉤加墨本) 등의 조탁본은 의도에 따라 많은 변조가 되어 내용이 동일 하지 않다보니 비문에 없는 말까지 덧붙여 해석문을 쏟아낸 것이다. 이 중에는 본문에도 없는 글을 후세에 쓰인 역사서와 비교하여 이러 저러한 구실을 붙여 비문의 신뢰를 떨어뜨리는 글도 적지 않다. 단재 신채호를 시작으로 문정창 이진희 등이 1970년대에 일본인에 의한 비문의 변조에 대해 연구를 하고 구체적인 증거까지 제시 하면서 발표를 하였으나 원본을 찾는 연구는 부족했으며, 이들의 변조론이 상당한 주변의 공감대를 형성해가고 있던 1980년대에 중국인 왕건군(王健群)이 “일본은 석회도포 변조를 하지 않았다.”고 일본의 주장을 옹호하는 책을 발표하고 일본학계로부터 초청을 받아 여러 번의 국제학술대회를 하면서 우리나라 학자들의 변조론도 입지가 크게 약화되었으며 원문을 찾겠다는 노력이 더 힘들어 졌다.
    쌍구가묵본은 일본이 의도적으로 위조했을 가능성이
    크다 ©편집부
    ⑵ 외면 당하고 있는 소수 연구자들이 찾은 원문 국내외에서 발표된 천여 편의 글 중에서 결자를 복원한 완전한 해독문을 발표한 것은 찬집청 사관을 그만두고 중국으로 건너간 김택영 선생이 처음 이다. 창강(滄江) 김택영(1850∼1927)선생은 찬집책임자 박용대에게 사직서를 던지고 1904년 중국으로 이주해버렸다. 그는 대왕비가 있는 회인으로 바로 달려가서 비석을 관찰했고 20여년 간 현지에서 탁본과 지인들로부터 구한 자료를 비교 연구하여 일본인들이 전해준 호태왕비문의 내용이 변조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원본 석문을 완성하여 고국에 전하기 위해 돌아오는 길에 을사늑약을 당했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즉시 멸망한 조국의 역사를 집대성하여 지인들의 도움으로 1922년에 중국 에서 간행한『한국역대소사(韓國歷代小史)』에 실어놓았다. 이러한 일을 하신 창강 선생은 과거시험을 통해 관료가 된 문사출신인 사관 이었으며 성균관 교사로서 많은 문집을 남겼고 후학을 양성하였는데,그의 제자에는 단재 신채호와 소앙 조용은도 있다. 따라서 선생의 금석문에 대한 안목은 당대 최고라 해도 될 것이다. 참고로 1922년 중국 한묵림서국 축간 김택영 저<한국역대소사> 28권 9책에 실려 있다. 그러나 고국으로 보낸 그의 책은 일제에 의해 압류되었는데, 압류 당한 『한국역대소사』에는 대왕의 비문을 해독하여 결자가 없는 전문을 수록해 두었다. 다만 해석문이 없고 부분적으로 선생도 변조한 흔적이 있어 후학에게는 혼란을 일으킬 부분이 있었던 것 같다. 창강 선생의 변조부분을 조소앙(趙素昻)선생이 수정, 재편집하여『한국 문원』에 수록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다음으로 창강 선생의 연구서가 출처라고 밝힌 소앙 조용은 선생 연구서 가 온전한 두 번째 자료라 할 수 있다. 다만,소앙 선생은 창강 스승으로부터 직접 받은『한국역대소사』와 중국 현지에서 구한 호태왕비 정탁본을 비교해 보고 창강 선생이 자의적으로 몇 곳을 변조한 부분을 확인하여 삭제하고 누구나 읽기 쉽도록 구두점을 찍어 재편집하여 1938년 남경에서 발행한『역조한국문원(歷朝韓國文苑)』 에 남겼다. 그러나 아쉽게도 창강 선생의 것은 총독부가 도서를 압류함으로써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고 소앙 조용은 선생의 것은 80년대까지 금서 대상이어서 대중에게 알려질 수 없는 비운을 가지고 있었다. 세 번째 원문 복원자 이유립은 관학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여기서는 생략 한다.
    광개토호태왕 비문의 여러가지 해독문

    특히 창강 선생은 원문 석문과 함께 비문을 어떻게 해독할 수 있었는가를 밝혔다. 그가 현지에 갔을 때‘1882년 중국 문사 왕언장(王彦莊)은 석비를 찾아가 보았으나 해독할 수 없어 만주인 장백산인(長白山人) 영희 조봉(榮禧 莜峰,1854∼)에게 설명하고 그에게 해독하도록 요청했다. 장백산인(長白山人)이 탁본해 살펴보고 고구려의 비문이라 했고 중국에는 찾아볼 수 없는 북방지역 한문 형식이며 고구려 기록문 이라 했다.’고 들었다. 그러나 이후로는 중국 측 연구진에 장백산인의 이름은 없다. 그 후 뜻밖에 만주지역에 주둔하는 일본군의 통역관으로 활동하다가 일본군으로부터 첩자라는 죄명으로 옥고를 치르고 나서“중국과 일본이 자신을 배신했다는 한탄을 자주하였다.”고 했다. 여기에는 한국인만 모르는 어떤 내막이 있는 듯하다. 장백산인을 통해 일본 주둔군으로 넘어간 탁본이 얼마나 되는지 알 수 없으나 최소한 두 벌은 더 되는 듯하다. 일본정보원은 영희(榮禧)를 통해 대왕의 비문에 관한 설명을 들었고 일본 정보원은 더 정확한 자료를 입수하기 위해 온갖 협박과 회유를 가한 것 같다. 영희와 창강 선생은 어떤 경로로 교분을 갖게 되었는지 설명은 없으나 창강은 영희로부터 비문의 결자 부분을 받았고 영희는 창강 으로부터 고구려를 비롯한 동북아시아에 대한 역사를 설명 듣고 동족의식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일본은 이후로 영희(榮禧)를 첩자라면서 감옥에 두고 회유한 듯하다. 그러다 결국 일본 측에서는 그를 ‘미친 소리 하는 자’,‘소설을 쓰는 자’라고 모함을 하였다. 이와 같은 배경을 볼 때 영희가 일본 측에 넘긴 자료는 온전한 비문이 아닌 듯하며 창강에게만 온전한 전문을 전달한 듯하다. 그 이유가 바로 중국과 일본으로부터 배신당했던 섭섭함을 동족인 한국 사람에게 베풀었다고 판단된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그를 재평가해야 할 것이다.
    Greatcorea         김덕중 (사)삼균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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