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타/고구리ㆍ대진

광개토호태왕 비문 원본의 바른 해석 (1부)

浮萍草 2013. 5. 21. 21:15
    우리의 무관심으로 일제가 '임라일본부설'로 활용
    김덕중(사)삼균학회
    이사
    1. 서론 1900년대 초 우리나라에 알려진 광개토호태왕비문은 대부분 일본인들에 의해 의도적으로 들어오게 되었다. 비석이 우리 유산이면 제도권 학계와 전문인들이 그 내용을 진작 밝혔어야 했고 정부는 그것을 보호·관리 하고 그 가치를 홍보하는 후속조치를 했어야 했다. 그러나 소위 재야의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원탁본과 조탁본들을 비교·연구 하고 다양한 석문의 연구를 통해 그 비문의 원본을 찾으려는 노력이 거의 전무한 채 일본인이나 중국인들에 의해 주어진 석문을 가지고 해석 상의 문제나 이견을 제기하는 수준의 연구가 주류를 이루어왔고 정부에서도 그곳에 큰 관심을 보이지 않음 으로써 우리의 귀중한 역사적 자료가 오히려 일본에 의해‘고대 일본의 한반도 지배설’을 뒷받침하는 자료로 활용되어온 것이 안타깝지만 현 실정이다. 반면 일본은 광개토호태왕의 비문을 금과옥조(金科玉條)로 삼아 국민들의 사기를 드높이는 자료로 활용해 현대의 강국을 일구어내었다. 1883년 만주지역 정보원으로부터 태왕의 비문을 일찍 입수한 일본은 많은 학자를 동원해 해석해보고는 소스라치게 놀라 밀실에서 대책을 고민한 끝에 임나일본부설 등 자신들에게 유리한 역사를 만들어내었다. 그리고 현장에 가서 비문의 글자를 이 틀에 맞추어 변조하고는 자신들의 논리에 맞추어 왜곡된 해석을 할 수 있는 탁본과 석문을 만들어 세상에 공개하였으며 우리나라에도 적극적으로 전파하였다. 이렇게 국책문서로 확대하여 일본인이면 누구나 대륙으로 가서 야망을 펴도록 했다. 우리의 역사적 자산인 대왕의 비문을 보는 관료들의 역사관과 국가를 생각하는 국가관의 이러한 차이에 따라 우리나라는 일제의 식민지가 되었고 일본은 건국 이래 최대의 부강과 호사를 누리면서 러시아와 중국을 밀어내고 아시아의 새 주인으로 등장하게 만들었다. 과연 도대체 대왕의 비문에 무엇이 있어서 한국과 일본 두 국가의 운명을 바꾸게 되었을까? 1903년에 발표된 만주인 영희(榮禧)의 석문은 전체적으로 15자 정도 결자밖에 없는 거의 원문에 가까운 것이며 우리나라에도 창강 김택영(滄江金澤榮)이나 소앙 조용은(素昻趙鏞殷) 등 비문의 원본을 찾으려고 노력한 사람이 있었고 조소앙처럼 우리식 한문을 이해한 사람도 있었다. 반면에 동북아역사재단처럼 지금도 국민의 세금을 사용하면서‘고구려가 중국과 대등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라는 식의 중화사상이나 퍼뜨리는 교육을 하고 있는 곳도 있다. 주체적 역사의식을 널리 폈던 단재 신채호 선생도 지나치게 고구려를 높이는 고구려 정통론과 나라 찾는 민족의식을 드높이려고 호태왕을 높이 평가하여 비문에 나오는 민족 내부 쟁패를 당연한 것으로 만들어놓고 보니 단기적으로는 나라에 크게 기여를 했으나 장기적으로는 민족의 분열을 부추긴 결과가 되기도 했다. 지금도 실제 진실이 무엇인지 제대로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에 의해 연구서는 날아다니고 드라마가 제작되고 소설이 나오니 국민 누구나 다 광개토호태왕을 잘 안다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일본학자는 무엇을 믿고‘고대사 부분에 하나도 고칠 것이 없노라!’큰소리치면서 냉소를 하고 중국은 자기네 것이라 하면서 문화유산으로 등재했다. 광개토호태왕의 비석과 비문은 과연 누구의 역사가 기록되어 있는 것인가? 우리들에게 ‘그것은 우리의 것’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용기는 있는가? 이처럼 작은 일인 것 같지만 광개토호태왕 비문이 제대로 찾아져 해석된다면 우리 민족이 오랜 옛날 천제국(天帝國)에서부터 비록 삼국으로 나눠지면서도 한 덩어리라고 생각하고 그렇게 노력했던 민족정신을 찾을 수 있을 것이며 일본의 자만심을 누르고 중국의 동북공정을 잠재우면서 21세기 세계의 주도국으로 나설 수 있는 기반을 닦을 수 있을 것이다. 바로 새로운 한류의 샘이 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한다. 원본을 찾는 문제에 대해서는 오늘 앞에서 상세하게 발표를 했으므로 여기서는 간단히 줄이고 원문의 바른 해석이라고 할 수 있는 조선 사문(朝鮮詞文)에 따라 우리의 민족정신이 깃든 비문해석에 초점을 맞추어 발표를 하고자 한다.
    중국과 일제가 쪼아내고 새겨넣은 조작한 비문에서 흘러내리는 빗물
    2. 광개토호태왕 비문 원본과 바른 해독방법 1) 『증보문헌비고』에 실린 일본 변조 비문 1903년 대한제국 고종황제는 홍문관에 찬집청을 두고 법무대신 박용대(1849∼?)를 책임자로 명하여 발간을 중단했던 <동국문헌 비고>를 속간하게 하였다가 1907년(융희2)에<증보문헌비고>로 개정,16고 250편을 완성했는데 이 책 권36 여지고 24에 호태왕비문 의 석문 전문과 비석의 크기,위치,발굴관련 내용을 간단하게 기술하고 있다. 이것이 우리나라 공식 역사책에 처음으로 실린 광개토호태왕 비문이다. 그런데 그 내용에 문제가 있다. 그 비문이 무엇을 근거로 한 것인지 자료를 전해준 자가 누구인지 자료의 출처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없고 자료가 인쇄문이었는지 탁본인지도 기록이 없으며 현지 확인여부나 비교검토를 했다는 내용도 없다. 내용도 높이가 1장 8척이라 하여 실물보다 1m 정도 낮게 기술되고 편년과 내용 중에 일치하지 않는 부분도 있고 빠진 결자도 200자 가 넘으며 오자(誤字)도 많았는데, 일본인들이 소위 임나일본부설의 근거로 제시하는 신묘(辛卯)년 기사만은“百殘(百濟也) 新羅舊盡屬民由來朝貢而倭以辛卯年來渡 海破百殘(三字缺)羅以爲臣民以六年丙申王躬率水軍討任殘…”(백잔과 신라는 다 쇠퇴한 지 오래여서 고구려의 속국이 되어 조공을 바치니 왜가 신묘년에 바다를 건너와 백잔을 파하고 신라를 신민으로 삼았다)고 일본이 의도적으로 해석한 대로 해석될 수 있도록 편집해놓은 것이다. 그리고 이것을 판독한 사관이 “멸망한 고구려 고씨의 유적이다.”고 할 정도로 민족사에서의 가치를 낮게 평가하였다. 누가 보아도 납득할 수 없는 이 출처불명의 문서는 사실상 일본 정보원이 전해준 것이니 한 민족의 역사를 와해하려는 공작문서가 버젓이 홍문 관의 문서에 기록되어 우리 정사의 한 부분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대한제국 사관(史官)들은 최고의 실력을 갖춘 문사(文士)들로 구성된 당대의 대표적 지식인들이었으므로 그들이 비문을 검토한 결과 결자가 너무 많고 문맥이 맞지 않는 구조라서 접근이 어렵다 하였다. 처음 이 자료를 접한 사관들은‘현지에 사람을 보내 비석과 비문을 확인하자’고 찬집책임자에게 요청했으나 박용대 찬집책임자는 묵살하고 조정에도 보고하지 않았으며,성균관 유생에게 논의할 기회도 제공하지 않고 직권으로 책 속에 포함시켜 편집하였다. 박용대의 전횡적 행동이 잘못이라고 사직서를 던진 사람과 고국을 떠난 사관이 창강 김택영 등 여러 명 있었으며 일본은 우리나라 와 강제 병합을 마치고 병합의 공로자로 홍문관 찬집책임자 박용대에게 작위를 주었다. 박용대가 그렇게 직권을 남용한 것이 사전에 일본으로부터 일찌감치 매수당하여 행한 친일 행각으로 짐작할 수 있다.
    Greatcorea         김덕중 (사)삼균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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