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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개토호태왕 비문의 임나일본부설은 허구 (5부)

浮萍草 2013. 6. 5. 10:51
    임나가라는 없고, 안라인은 옛 신라인
    일본교과서에 그려진 임나일본부 편집부
    2) ‘임나가라’는 없다 재 외에도 태왕의 비문을 연구하는 학자의 글에는 잘못이 많다. 비문의 2면 뒤쪽에 임나가라(任那加羅)가 나오고 안라인술병(安羅人戌兵)이 나오는데 이 부분은 대부분 연구 자들이 완전히 잘못 해석하고 있다. 문장을 잘 탐독해보면 바로 앞 구절인 ‘至任那加羅從拔城’에 답이 있다. 이 문장의 해석은 ‘임나에서(至) 가라까지(從) 성을 빼앗았다’이므로 분명히 임나(任那)와 가라(加羅)는 두 지역의 이름이다. 그리고 신라지역의 임나와 가라의 안라인(安羅人) 가라지역 사이는 상당히 먼 지역임을 알게 한다. 뒤에 나오는 ‘성즉귀복(城卽歸服) 안라인술병(安羅人戌兵)’은 ‘성은 바로 안라인 술병에게 돌려주었다’이다. 두 문장을 해석해보면 ‘임나에서 가라까지 성을 다 빼앗았고 성은 안라인과 술병에게 돌려주었다’가 바른 해석 이다. ‘至任那 加羅從拔城’에서 보면 백잔과 왜에게 신라지역의 任那와 安羅人의 加羅 사이는 상당히 먼 것으로 판단 된다. 至는 분명히 출발지가 任那이고 도착한 종착지가 加羅이니 從이 있으며 시작한 출발과 도착지역을 표현하는 문장임을 至와 從에서 알 수 있다. 그러므로 ‘任那加羅’가 한 지명이라는 말은 성립되지 않는다. 대왕께서는 백잔과 왜가 신라지역과 안라(安羅)지역까지 유린하므로 군사를 5만씩이나 파견했다. 만일 한정된 지역 안라인 가라(安羅人加羅)였다면 1개의 성에 5만이나 보낼 필요가 있었을까? 물론 예외가 있겠지만 신라지역 임라(任那)에서 안라 사이에 성이 여러 개 있었으므로 ‘마침내 성을 모두 빼앗았다’로 해석되고 임라(任那)와 가라(加羅)는 지역이 다르다는 결론이 성립된다. 성은 왜인이 돌아와 항복한 곳이 아니라 안라인에게 돌려줬다는 글이니 해석자들의 잘못이다. ‘任那加羅’라는 지역은 비문 해석상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이와 같은 잘못은 왜 나왔을까? 대체 연구하는 학자들의 해석틀의 출처가 어디인가? 좀 더 증언한다면 가라(伽羅)지역에 실존하는 임나가라(任那伽羅)가 있다면 굳이 비문에 ‘至任那伽羅’라고 길게 쓰지 않을 문장이다. 실존 국명이나 지명을 是 此 之 등으로 축약하여 표현하는 것이 당연한데 굳이 임나가라(任那伽羅)를 주장하는 것은 앞 글자 부사 ‘至’의 뜻을 몰랐던 것이다. ‘至’를 넣으면 임라가라(任那伽羅)가 임라(任那)와 가라(伽羅)가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임라(任那)는 신라 지역의 한 곳이고 가라(伽羅)는 다른 곳으로 백잔과 왜가 가라(伽羅) 지역을 유린했다는 뜻이라 해석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왕은 5만의 군사를 보내어 신라 지역의 침략자와 가라(伽羅)지역의 침략자를 평정하였고 그래서 ‘至任那伽羅’라 하였으며 ‘마침내 성을 모두 빼앗았다.’ 라고 하는 것이 문장을 지은 저작자에게 죄를 짓지 않는 해석이라 할 것이다. ‘從拔城’을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성(城)이라는 해석도 일본인들의 해석을 도와주는 결과가 된다. 아무른 근거가 없으며 한문어법에도 맞지 않는다. 그냥 일본의 해석을 따라간 데서 온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끝으로 대왕께서 5만의 군사를 보내고 안라인(安羅人)과 술병(戌兵)에게 다시 성을 돌려줄 때는 이유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바로 안라인(安羅人)이 옛 신라인이며 이 땅의 옛 백성(舊民)이기 때문에 핍박받는 동족을 구하고자 백잔과 왜를 토벌했던 것이다. 3) 伽羅人은 누구인가? 다음으로 제 3면의 처음 부분인 安羅人戌兵昔新羅寐寢(錦)未有身來朝貢(안라인술병석신라매침(금)미유신래조공)이란 기록을 살펴본다. 이 내용은 ‘안라인과 술병(파견병)은 옛 신라인데 편한 잠자리를 갖게 되어 몸소 조공을 가지고 오지 않았다.’는 것이 바른 해석이다. 그런데 단재를 비롯한 대부분의 학자들은 ‘安羅人戌兵’을 생략한 채 해석하지 않고 ‘昔新羅寐錦 또는 寐寢 또는 安錦’,‘未有身來朝貢’만 가지고 해석을 하였다. 그래서 ‘옛날 신라 매금이 (고구려에) 조공을 하지 않아서’라고 잘못 해석하게 된 것이다. 위의 문장은 안라인(安羅人)은 옛 신라인이며 신라에서 파견한 병사가 신라에 있을 때보다 편하고 살만해서 조공을 귀찮아했다는 실상을 그렸는데 느닷없이 신라로 둔갑하여 매금을 등장시켰다. 그리하여 신라가 마치 고구려의 속국처럼 조공을 게을리 한다는 꾸지람으로 표현했으니 이런 기가 막힐 해석문이 있는가? 이 부분은 신라를 구하고 안라지역을 회복한 부분에서 안라왕이 광개토태왕 앞에서 무릎을 꿇고 사과하는 장면이다. 이런 상황에서 왜 학자들은 신라 매금으로 매도했는가? 이 부분은 단재 선생도 똑같이 보았는데 단재는 정복론자라서 그렇게 볼 수 있다 해도 여타의 학자들은 왜 이 같은 해석을 하게 되는가? 대체 이와 같은 해석의 근원은 어디인가? 이 문장을 보면 가야는 신라에서 분국했고 병사는 신라에서 파견하여 관리했다는 것으로 해석되며 두 나라의 뿌리가 같음을 증언한 부분인데 학자들은 왜 이 사실을 덮으려 하는가? 태왕의 비문이 세상에 다시 출현하여 한국민족의 근원에 대해 밝히는 중요한 사료인데 일본 연구자들은 자기들의 의도를 가지고 있었으니 대부분 억지로라도 그렇게 해석했겠지만 우리 학자가 같은 해석을 한다는 것은 일본인들의 의도적 태왕비문 변조와 왜곡해석을 도와주는 일이 아닌가?
    Greatcorea         김덕중 (사)삼균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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