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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문이 광개토호태왕 비문의 올바른 해석 방법 (3부)

浮萍草 2013. 5. 21. 22:13
    조선사문(朝鮮詞文)이란 조선인이 쓰는 조선식의 글

    3) 비문의 바른 해석 방법, 사문(詞文) ⑴ 사문(詞文)과 한문(漢文) 개토태왕의 비문 문장은 한자로 쓰여 있으나 중국식 한문구조가 아니다. 비석문은 조선사문(朝鮮詞文)이어서 한문식 해석으로는 제대로 번역할 수가 없다. 그래서 앞에서 보았듯이 중국의 왕언장(王彦莊)이 번역을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조선사문(朝鮮詞文)’은 조선민이 쓰는 ‘조선식의 글’이라는 뜻이다. 고대 중국과 한국은 소위 한자를 공용으로 썼고 글은 말을 문장이나 문서에 쓰임에 따라 표현되는 도구적 수단이었다. 그러니 말이 다른 두 나라 간에 글 표현 방식에도 약간의 차이가 있었을 것이다. 그러던 중 춘추전국시대에 공자의 출현으로‘글’은 시(詩)ㆍ서(書)ㆍ춘추(春秋)로 나뉘어 중국은 문장문화에 변혁이 일어났으나 우리나라는 여전히‘옛글’즉 사문을 쓰는 입장이 되었다. 『신지비사(神誌秘詞)』가 오래된 고대 조선민의 기록이라 하고 태왕의 비문에도 ‘詞文’으로 기록한다 하였으므로‘조선인의 글’인 조선사문이 어떻게 쓰이고 어떻게 해독해야 하는가를 비문에서 알 수 있게 되었다. 한문(漢文)과 사문(詞文)은 다 같이 한자를 사용하는 글이지만 편의상 대부분의 한문은 관념적 글이고 사문은 사실적 어문이다. 따라서 한문문장은 사성 음운(四聲 音韻)과 율(律)이 중국인 호흡에 맞도록 짜여져 있고 지켜야 하는 문장법(文章法)에 따라 구성 된다. 그러나 사문(詞文)은‘반쪽 글,잡글,조선글’이라는 별명처럼 낮춰 부르지만 이 글은 우리 호흡에 맞는 우리 민족 고대의 글이며 사실 적 표현에 충실하다. 이런 사문은 선비들이 귀족이 되려는 열망으로 전문적인 한자 중심으로 기울었기 때문에 관심에서 밀려났을 뿐이지 실제로는 생활 속에 깊이 자리하고 있었다. 김삿갓이 절묘하게 활용한 문객(文客)이다. ⑵ 사문(詞文)은 얼을 지킨다. 기자조선이 사라진 지 천년 후 宋나라에서 ‘詞’가 나왔다. 당·송 8대가(唐宋八大家)의 시부(詩賦)를 흔히 송사(宋詞)라 하는데 송사는 조선사문(朝鮮詞文)이 사성(四聲)도 율(律)도 따르지 않는 완전 자유로운 글인데 반해 운율(韻律)은 한문구조를 벗어나지 않는다. 이 당·송 8대가들은 금나라의 영향으로 북쪽 사람들의 글에서 그 자유로움에 매료되어 한문구조 속에서도 매우 자유롭고 사실적 으로 표현하는 서사시가 나올 수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사문은 詩ㆍ書ㆍ春秋(역사)를 생산했고 송사(宋詞)까지 생산했으니 모든 글의 원천으로서 고대에는 중국과 조선의 공용 언어체계 였는데 중국은 그것을 버렸고 우리는 품고 있었다. 우리가 품고 있는 이 조선의 글은 머릿속에서 지어내는 관념성을 배제한다. 표현하려는 모든 대상에 따라가서 도구가 되어주는 것이다. 사문은 음운과 율에 갇혀 허세와 감동과 멋을 부리는 관념적 행태를 완전히 거부한다. 따라서 사문은 1) 자연의 글이며 천심(天心)을 전하는 글이다. 우리 민족이 천평(天坪)을 경영하듯 있는 그대로 기록하고 전한다. 2) 왕의 말과 약속을 하늘의 말이라 여기고 정직하게 전하고 남기는 것이 본분이다. 3) 백성의 말과 약속을 정직하게 전하고 남기는 것이다. 전쟁기록, 물품거래 등 있는 그대로 기록할 뿐, 여기에 기록자가 관념적 논리와 수식을 더하여 생각을 다르게 하는 거짓 발상을 허락하지 않는다. 4) 왕이나 백성이 모두 읽을 수 있고 책문(策文)처럼 뜻을 따로 숨겨 두고 쓰는 글은 허락하지 않는다. 세종대왕의 한글 창제도 이런 정신이라고 본다. 5) 사문(詞文)과 한문(漢文)의 구별은 사실성과 관념적 구조를 보면 판단된다. 규칙이 없는 것이 사(詞)의 규칙이고 음운과 율을 갖추면 한문이다. 사문은 배우지 않아도 쓰고 지을 수 있다. 그러니 힘이 있다. ⑶ 사문으로 쓰인 호태왕비문 앞에서도 말했듯이 광개토태왕의 비문은 중국의 문장과 다른 사문이다. 이 사문은 우리의 얼을 담고 있으므로 고대 조선을 향하는 연장선상에서 우리 민족을 지키고 보존하려는 방책일 수 있다. 그러니 중국 문사인 방언장씨가 비문의 내용을 파악하지 못했던 것은 당연하다. 『한국역대소사』에 나와 있는 아래 글을 보면 그런 차이를 느낄 수 있다. 1882년 만주 남방 경계지역 폐허에 버려져 있는 거대한 석비(石碑)를 회인(懷仁} 지역에 사는 한족(漢族) 문사 왕언장(王彦莊)이 어루만지고(按) 있었다. 비석은 이미 병이 들었고 왕씨는 해독을 할 수 없어서 문우(文友) 만주인 문사 장백산인 영희 조봉(榮禧筱峰)씨에게 말하였다. 조봉씨가 탁본해 살펴보니 위(魏)의 비문(碑文)인 듯하고 고박(古撲)하여 품위와 무게감이 있었다 하며 손과정(孫過庭)과 저수량 (褚遂良)의 서법을 참고하여 여러 해 연구하였으나 각석(石刻)의 글씨체는 진대(晉代)의 전예(篆隸)가 6~7이고 해(楷)가 2~3, 필세(筆勢)는 장쾌하였으며 해독하였지만 소감은 없었다 한다. 여기서 중국인 문사는 해독할 수 없었던 것은 한자인 줄 알고 접근하여 해독하려 했으나 사문(詞文)을 몰랐으므로 자신 있게 해독 을 하지 못한 것이다. 그러나 만주사람 영희(筱峰)씨는 어느 정도 해독할 수 있었다고 하니 당시 만주지역에는 아직 옛 조선민의 사문(詞文)을 쓰고 있는 자가 있었던 것 같다. 일본에서 발간되어 배포된 비문은 대부분 일본인 특유의 의역판뿐인 것으로 봐서 출처가 한문 해석본이지 조선사문(朝鮮詞文)은 아니었다. 사문을 알고 있는 영희(筱峰)씨 해독본을 어디까지 활용했는지 알 수 없지만 영희씨가 모두 다 알려주지 않고 그들의 압력에 따라 일부는 그들이 원하는 대로 사실과 다르게 알려주었을 가능성도 있다. 일본에서 발간되어 배포된 비문은 마술 같은 해석문이 여러 군데 있다. 대표적인 것이 소위 신묘년(辛卯年) 사건이다. 마술 같은 해석으로 동북아시아의 역사를 일본 중심으로 관심을 갖게 하고 호태왕 비문의 실체에 접근하는 연구보다 고대일본이 한민족을 다스렸다고 하는 것을 증명하는 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일본은 실체도 모르면서 비문에「왜(倭)」라는 글자가 기록되어 있다 하여 마술 같은 해석으로 대륙침략의 정당성을 주장하는 목적에 이용한 것이다. 따라서 태왕의 석비를 연구하는 우리나라 학자들이 중국서책에서 뿌리를 찾으려 하고 해석을 한다며 일본의 문서를 엿보는 것은 우리의 민족양심에 반한다. 그러므로 우리 민족의 정서가 있는 사문을 먼저 공부를 해야 한다. 사문은 그들에게 있지 않으므로 호태왕 석비의 문맥은 영원히 짚어내지 못할 것이다. ⑷ 비문 발굴과 해독에 관계한 지식인들 비문 발견 초기 중국 문사들의 사정이 대부분 같은 경우였다. 앞에서 일부 소개는 되었지만 1876 ~1882년 사이 중국에서는 관월산(關月山) 왕지수(王志修) 이대용(李大龍) 초천부(初天富), 진사운(陳士蕓),원주산(元丹山) 등이 탁본(拓本)을 맡고 왕언장(王彦莊),반조음(潘祖蔭),단국환(談國桓) 등은 석록(釋錄)을 맡아 비문 해독작업을 했다. 이 명단에 만주인 영희는 없다. 일본은 1884년 회인(懷仁)에 주둔한 일본 군인으로부터 탁본문을 입수하고 1889년 탁본문에 먹칠을 하고 글자를 보완(加墨補字) 하여 변조한 석문과 함께 회여록(會餘錄)에 게재하여 발표했다. 우리나라에서는 1903년 찬집청에서 일본으로부터 석문을 입수하였으며,1904년 중국으로 이주한 창강(滄江) 선생은 현장에 가서 비문(碑文) 연구를 하고 있었으나 일반인은 1908년 일본 여행자로부터 비문을 구입함으로써 처음으로 광개토호태왕 비문의 존재 를 알게 되었다. 1922년 김택영이 원문을 복원하여『한국역대소사』를 간행하고(조선총독부가 국내반입 차단) 신채호가 부분 석략을 발표했으며, 1938년 조소앙이 전문이 복원된 창강의 연구를 바탕으로 일부 수정하여 발표1955년 정인보가 부분 석략을 발표했고(참고자료 2), 1973년 관학자는 아니었으나 이유립이 원문을 복원하여 발표했다.

    조소앙의 원본 복원 해석문

    여기서 김택영ㆍ신채호ㆍ정인보 선생의 석문(釋文)이나 약문(略文)은 한문식 해석이지 사문적 완역은 아니었으며,이병도ㆍ문정창ㆍ 최인ㆍ이유립ㆍ이형구ㆍ천관우ㆍ이진희 등 1970년대까지의 활동가는 물론,이형구와 서영수,북한의 박시형,김석형 등 근래 연구 활동을 한 사람들도 한결 같이 사문을 알지 못해 호태왕비문이 고대 조선을 담고 있음을 알지 못했다. 단지 만주인 영희,조소앙 선생만 사문을 조금 알았다. ⑸ 사문으로 고대 조선을 담은 비문 또 하나 놀라운 일은 호태왕의 석비에 고구려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태왕은 당연히 고구려의 왕인데 비문에 왜 고구려가 단 한 자도 없는지 그 까닭을 알지 못하면 연구자들은 문맥을 짚지 못했다고 하겠다. 영희(筱峰)씨가 해석은 했으나 문맥을 알지 못한 것은 그 동안 단절되어 전하지 못한 조선 민족의 역사에 대한 무지 때문이었을 것이다. 창강(滄江) 선생은 개성인이다. 철저한 유학자에 주자학파다. 『한국역대소사』전문(全文)을 살펴보게 되면 사문(詞文)을 쓴 흔적은 없다. 전문은 한문구조이고 태왕의 비문도 한문구조로 편집하였다. 그러나 조소앙(趙素昻) 선생은 경기도 양주 출신으로서 일찍 성균관(소년급제)에 들어갔고 역시 유학자이지만 양주 지역에는 남하 한 유민들의 토속서당이 있었을 것이고(김삿갓도 이 지역에서 활동함) 북부의‘잡글’(詞文의 별명)을 좀 알고 있은 듯하다. 두 분의 광개토호태왕비 석문을 분석하면 창강 선생 것은 고구려의 역사관으로 편저를 했고 조소앙 선생의 것은 고대 조선의 연장 선에서 편저한 것으로 봐서 소앙 선생은 태왕 비문의 문맥을 정확하게 짚었다고 판단된다. 두 분의 관계는 성균관의 대 선배와 후학의 관계인데 임정 시절 중국에서 다시 만남이 있었던 것으로 확인되었다. 소앙 선생은 창강 선생의『한국역대소사』 한문본에서 연구한 비문을 다시 정리하여 한문본『한국문원』에 수록하였으나 사문 (詞文)을 알고 정리하였으므로 고대의 한국사와 한국문학에 새로운 사표(師表)가 될 자료로 참고할 가치가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 글은 조소앙 선생이 호태왕의 비문이 고대 조선민의 글임을 발견한 공(功)을 확인할 수 있는 자료다. 그러니 사문으로 읽어야 내용 속에서 고대 조선의 연장선상에서 기록된 것을 발견할 수가 있게 된다. 사문(詞文)은 지금까지 몰랐던 분야로서 관심 밖으로 밀려나 있었으나 실재 태왕의 비문이 사문인 것으로 봐서 앞으로 고대 사서 를 연구하거나 민속과 언어를 연구하는 데도 적용될 수 있을 것이며 기본적으로 우리 문화를 바르게 알기 위해서 꼭 필요한 분야 라고 생각된다.
    Greatcorea         김덕중 (사)삼균학회 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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