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육조의 생애와 사상

8 근본은 무념과 돈오

浮萍草 2013. 5. 15. 07:00
    천하의 인재들도 ‘매료되다’
    “중생이 ‘본래부처’ 현실 이대로가 극락”
    조계 남화선사에 조성된 육조단경 석판
    ㆍ무념(無念)이란 <육조단경>에 기록된 육조 사상의 핵심은 정혜(定慧)와 무념(無念),그리고, 돈오(頓悟)다. 이제 무념을 보자. “선지식들아,나의 이 법문은 옛부터‘없는 생각(無念)’을 세워 종(宗)을 삼으며,없는 모양(無相)’으로 본체를 삼고 무주(無住)로 근본 을 삼는다.” 무념은 정혜와 마찬가지로 깨친 부처나 도인의 마음을 말한다. ‘없는 생각(無念)’, 즉 ‘무념(無念)’을 흔히 ‘생각 없음’으로 번역하는데 깨치면 생각이 없는 것이 아니다. 망상을 여의고 바른 생각이 나니 없는 생각이라 표현하는 것이 더 좋겠다. ‘없는 모양(無相)’도 마찬가지로 깨치면 모양이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양을 생각하되 집착하지 않는다. 그래서 ‘없는 모양’이라 번역하는 것이 더 맞겠다.‘ 무주(無住)’란 생각할 때 생각에 머무르지 않음을 말한다. 만약, 한 생각에라도 머무르면 그 생각에 집착하여 구속된다. 그럼 자유로울 수가 없다. 육조 법문의 근본인 이‘없는 생각’,‘없는 모양’ ‘무주(無住)’는 모두 우리 마음이 본래 그렇게 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우리 마음이 돈이나 권력에 머물러 많고 적은 모양을 따지고 집착하면 망상이 자성을 가려 중생으로 살게 된다. 우리가 돈이나 권력에 집착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면 지혜가 생겨나 자유자재할 수 있다. 육조대사는 그 방도를 일러주신 것이다.
     
    ▲ (左) 조전의 육조혜능 진신상   ▲ (右) 벽돌가는 것을 비유로 ‘마음’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중국 남악.마조스님의 일화를 상징하는
    마경대(馬鏡臺).
    ㆍ좌선(坐禪)이란
    참선의 대표적인 방법이 좌선이다. 육조는 이 좌선에 의미심장한 정의를 내린다. “이 법문 가운데 일체 걸림이 없어서 모든 경계 위에 생각이 일어나지 않는 것이 좌(坐)이며 안으로 본래 성품을 보아 어지럽지 않은 것이 선(禪)이다.” 좌선은 앉아서 참선하는 것이다. 육조는 바깥 경계에 생각이 끄달리지 않는 것을 좌(坐),안으로 자성을 보아 평화로운 것을 선(禪)이라 한다. 육조의 좌선은 안팎의 경계에 마음이 흔들리지 않으면 되니 거리나 시장에서도 가능하다. 반대로 선방이나 산중에 앉아 있어도 안팎의 경계에 끄달리고 산란하면 좌선이 아니다. 우리가 선방에서 오랫동안 참선했더라도 입만 열면 사람들의 옳고 그름을 따지고 하심하지 않고 대접 받으려 한다면 이것은 참선을 바르게 한 것이 아니다. 이러한 가르침은 후대에 남악회양이 마조(709~788)선사를 가르칠 때도 보인다. 유명한 마경대(馬鏡臺) 이야기다. 어느 날 마조스님이 좌선하는데 스승 남악스님이 옆에서 벽돌을 갈기 시작했다. 마조는 벽돌 가는 소리에 좌선을 풀고 스승에게 물었다. “스님, 어째서 벽돌을 갈고 계십니까?” “거울을 만들려고 하네” “아니,어떻게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듭니까?” “그대는 어째서 좌선하여 부처가 되려고 하는가? 소가 끄는 수레를 가게 하려면 수레를 때려야 하나 소를 때려야 하는가?” 마조는 이 말에 크게 깨달았다. 육조의 좌선은 앉은 모양이나 장소 같은 형식에 국한된 것이 아니라 마음을 강조한다. 우리도 지금 좌선이라는 형식에 너무 집착하지 말고,운력과 행선,봉사를 병행해서 육조의 진정한 가르침으로 돌아가야 한다. ㆍ반야 지혜란
    우리는 누구나 어리석음을 떠나 지혜롭게 살기를 원한다. 육조의 말씀이다. “반야는 지혜다. 언제나 생각마다 어리석지 않고 항상 지혜를 행하는 것을 반야행이라 한다. 한 생각이 어리석으면 곧 반야가 끊기고 한 생각이 지혜로우면 곧 반야가 난다.” 지혜는 분별망상을 내려놓을 때 나온다. 지위나 돈, 명예에 집착하여 이해관계를 따질 때 번뇌망상은 치성한다. 명예와 지위를 떠나 마음을 바로 할 때 지혜가 난다. 육조는 말한다. “한 등불이 능히 천년의 어둠을 없애고, 한 지혜가 만년의 어리석음을 없앤다.”
    벽돌을 갈아 거울을 만들 것인가? 2005년 조계 남화선사 참배 때 기념촬영을 위해 선원 앞에 선 한국의 주요 사찰 선원장 스님들
    ㆍ번뇌가 곧 깨달음
    선(禪)에선 중생이 본래부처라 하여 부처와 중생을 둘로 보지 않는다. 불교 교리에선 일반적으로 깨달음을 추구하고 번뇌는 비우라 하는데 육조는 “번뇌가 곧 깨달음”이라 한다. 여기에 심오한 법이 있다. 번뇌가 연기로 이루어진 것을 알면 그대로 지혜가 된다. 번뇌도 연기현상이고, 지혜도 그렇다. 그러므로 번뇌도 실체가 없고 공이고, 지혜도 연기, 공이다. 그래서 육조는 말한다. “선지식들아, 번뇌가 곧 깨달음이니, 앞생각을 붙잡아 미혹하면 곧 범부요, 뒷생각에 깨달으면 곧 부처다.” 중생이 부처고, 번뇌가 깨달음이라면 왜, 우리는 못 깨쳐 중생으로 살고 있는가? 육조는 말한다. “삿된 소견의 장애가 무겁고 번뇌의 뿌리가 깊기 때문이다. 반야 지혜는 크고 작음이 없으나 모든 중생이 스스로 미혹한 마음이 있어 밖으로 닦아 부처를 찾으므로 자성을 깨치지 못한다. 그러므로 알라. 깨치지 못하면 부처가 곧 중생이요, 한 생각 깨치면 중생이 곧 부처다.” ㆍ돈오(頓悟)
    이제 육조의 골수이자 선종의 종지인 ‘돈오(頓悟)’를 보자. “선지식아, 나는 오조 홍인화상에게 한 번 듣자 그 말끝에 크게 깨쳐 진여의 본성을 단박에 보았다. 이 가르침의 법을 뒷세상에 유행시켜 도를 배우는 이로 하여금 각기 스스로 마음을 보아 자성을 단박 깨치게 하는 것이다.” 육조는 단경 ‘돈오’편에서 이 돈오를 후세에 전하기 위해 법을 설한다고 밝혔다. 이 돈오가 선종의 종지(宗旨)인데, 이것은 이해하기가 어렵다. 한 평생 참선을 하고 경전과 어록에 통달하였다는 분도 이 돈오에 걸리는 것을 보았다. ㆍ북종선 신수의 사상과 교훈
    불교와 유교,도교 경전에 해박했고,오조 회상에서 교수사로 존경받았던 신수(606~706)대사도 오조로부터“문 안에 들지 못했다”고 깨달음을 인가받지 못했다. 기록에 따르면 신수대사는 오조 입적 뒤 산중에서 15~16년을 정진한 뒤에 낙양,서안으로 가서 당나라 측천무후 등 3대 황제로부터 ‘국사(國師)’로 추대되어 불교사에서 가장 화려한 스님이 된다. 경전에 밝아 학식이 뛰어났던 신수대사는 키가 크고 인물도 좋았으며, 100세까지 장수하였다. 천하의 삼대 황제로부터 존경받아 모든 것을 갖췄던 대사는 단 하나 깨달음을 인정받지 못했던 것이다 (북종계의 <능가사자기> 등에는 6조로 기록되어 있다). 당나라 역사와 불교사에서 가장 화려했던 신수대사도 3~4대 제자에 이르면,그 법맥이 사실상 단절된다. 그 이유는 신수의 법이 그러했기 때문이다. 신수의 깨달음은 점차(漸次)로 이루진다는 점오(漸悟)로 평해진다. 즉, 신수대사는 중생에게 번뇌와 티끌이 있으니 이를 부지런히 털고 닦아야 깨달음이 성취되어 부처가 된다는 입장이다. 이런 입장에는 중생과 부처, 번뇌와 깨달음이 분리되어 존재한다. 번뇌를 가진 중생은 부지런히 털고 닦아야 깨끗한 부처가 되는 것이다. 이 ‘점오점수’ 사상은 중생과 부처를 나눠 보는 이분법인데, 이것은 중도불이(中道不二)의 부처님 법에 어긋나는 것이었다. 늘 방앗간 먼지구덩이서 생활해야 했던 혜능행자는 신수의‘먼지를 부지런히 털고 닦자’는 이 게송이 법에도 맞지 않고 삶과도 일치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단박에 잘못된 게송이라 알아차렸던 것이다. 무식한 나뭇꾼 출신 혜능이 돈오하여 퍼뜨린 돈오 선맥(禪脈)은 2대인 남악회양과 청원행사,그리고 3대인 마조도일과 석두희천에 이르면,천하의 인재들이 돈오에 매료되어 남종 돈오선 시대를 열게 된다. 그 바탕에는 “중생이 본래부처 현실 이대로가 극락”이라는 육조의 돈오사상이 있었다.
    불교신문 Vol 2912         박희승 조계종 총무원 문화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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