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육조의 생애와 사상

5 이조에서 오조까지 전등사(傳燈史)

浮萍草 2013. 4. 22. 07:00
    혜가-승찬-도신… 오조 홍인대에 대중화 기반 다지다
    숭산 소림사 이조암의 이조 혜가대사상, 삼조사 삼조굴의 승찬선사 석상, 사조사 사조 도신대사상, 오조 홍인대사상(왼쪽부터)
    ㆍ죄를 찾아도 찾을 수가 없다 조 혜가(慧可, 487~593)는 인가를 받고 소림사에서 9년 동안 달마대사를 모신 뒤 전법을 시작한다. 어느 날, 한 거사가 이조를 찾아와 제자가 되겠다고 인사했다. 이 사람은 큰 병이 있었는데 <조당집>에는‘풍질(風疾)’ 알려지기로는 나병(문둥병)이라 한다. 그는 이 불치병으로 평생 고통스러워했고, 전생에 지은 죄의 과보라 생각했다. 그가 용기를 내어 말했다. “제자는 불치병을 앓고 있으니 화상께서 제자를 위하여 참회해 주십시오.” “네 죄를 가지고 오너라. 죄를 참회해 주겠다.” “죄를 찾아도 찾을 수가 없습니다.” “그대의 죄는 참회가 끝났다. 그대는 그저 불ㆍ법ㆍ승 삼보에 의지하기만 하라.” 이조는 그가 법기(法器)인 줄 알고 머리를 깎아 주면서 말했다. “그대는 승보(僧寶)이니 승찬(僧璨)이라 하라.” 그리고 구족계를 받게 하여 스님이 되게 하여 깨달음을 인가하고 가사를 전했다. 승찬에게 깨달음을 전한 뒤 이조는 “업도(?都, 당시 수도)로 가서 묵은 빚을 갚겠다” 하고는 훌쩍 떠났다. 이조는 34년간 일정한 사찰 없이 인연 따라 저자거리를 떠돌며 중생을 교화했다. 이때 변화(辯和)법사가 업도 광구사(匡救寺)에서 <열반경> 강의를 했다. 이조께서 그 절에 이르러 법을 설하니 강의 듣는 사람들이 그리로 몰려갔다. 이에 법사가 불만을 품고 고을 현령에게“저 사견을 가진 사람이 나의 강석을 어지럽혔소” 하니 현령은 사람을 시켜 이조를 살해했다. 이조의 나이 107세였다. 누가 그대를 구속했는가? 삼조 승찬(僧璨, ?~606)대사는 <신심명(信心銘)>으로 널리 알려져 있으나 기록이 많지 않다. 본래 불치병을 앓았고, 이름도 고향도 알 수 없다. 이조로부터 문답 중 깨달아 모든 괴로움을 일시에 해탈하고 힘써 법을 폈다. 삼조가 지은 신심명은 선서(禪書) 중 문장이 가장 아름다운 것으로 유명하다. 선(禪)의 깨달음은 어렵지 않고 옳고 그름의 양변을 떠난 중도에 있음을 강조한 법문이다. 어느 날, 삼조에게 도신(道信)이라는 어린 사미가 와서 절하고 물었다. “스님, 제게 해탈법문을 들려주십시오.” “누가 너를 구속했는가?” “아무도 구속한 이가 없습니다.” “아무도 구속한 이가 없으면 그대는 이미 해탈한 사람이다. 어찌 다시 해탈을 구하는가?” 도신은 이 말 끝에 크게 깨달았는데, 14세 사미였다. 이에 삼조는 도신을 8, 9년 동안 곁에 있게 한 뒤 구족계를 받아 스님이 되게 하고 4조로 부촉하여 가사를 전했다.
    삼조 승찬대사가 열반한 삼조사 전경.
    ㆍ사조 대에 한 도량에 정착
    사조 도신(道信, 580~651)대사의 성은 사마(司馬)씨로 호북성에서 났다. 삼조 승찬대사의 법을 받은 뒤 여러 곳을 유력하다 기주 쌍봉산(雙峰山) 사조사(四祖寺)에서 30여 년 법을 펴다 입적했다. 달마와 혜가 그리고 삼조 승찬까지 일정한 도량 없이 떠돌며 전법했는데 사조 대에 선은 비로소 정착하게 된다. 당시 불교계는 양무제처럼 기복과 교학,율학 전통으로 인하여 ‘선(禪)’에 대한 인식이 거의 무지하였고,심지어 배척받았다. 초조 달마의 독살설이나 이조 혜가의 장살은 우연이 아니다. 그러나 사조에 이르면 쌍봉산에 도량도 마련하고 늘 500여 명의 수행자가 있었다고 하니 선이 차차 주목받기 시작한 것이다. ㆍ사조의 법맥이 봉암사를 창건
    사조사 오백 대중 가운데 오조가 된 홍인도 있지만, 신라인 유학승 법랑(法郞)이 있었다. 법랑스님은 사조로부터 깨달음을 인가 받고 신라에 돌아와 처음으로 한반도에 달마선을 전한 분이다. 우리나라 구산선문 중 유일하게 희양산문 봉암사는 사조의 법을 이은 법랑 법맥(신행-준범-혜은)인 지증(智證, 824~882)국사에 의해 881년에 창건된다. 봉암사는 1947년 결사로 지금의 조계종풍을 정립한 이래 한국불교의 빛나는 도량으로 선승이면 반드시 거쳐야 할 조계종 종립선원 이다. 현직 총무원장으로 처음 육조성지를 참배한 자승스님과 중앙종회의장을 지낸 보선스님,교육원장 현응스님도 젊은 수좌시절 봉암사 에서 정진했고 특히,덕숭총림 방장 설정스님과 쌍계사 지하스님은 중앙종회의장 소임을 놓자마자 바로 봉암사 선원으로 가서 정진 했다. 이외 수 많은 종단 스님들이 봉암사에서 정진했는데,사조 도신대사의 법맥을 이은 지증국사가 처음 산문을 열었다는 것을 기억해 둘 일이다. 사조가 제자들에게 법을 전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조성한 사조사 전법동에는 오조 홍인과 나란히 ‘신라인 법랑’ 입상이 모셔져 있어 한국 순례객들의 주목을 받고 있다. 이런 인연의 사조가 어느 날 길에서 한 어린아이를 만났는데 나이는 7세였고 말하는 것이 영특했다. 대사가 물었다. “성이 무엇이냐?” “성은 있으나 예사 성이 아닙니다.” “어떤 성이냐?” “불성(佛性)인 성입니다.” “네 성품은 없는가?” “성품이 공하기 때문입니다.” “이 아이가 예사롭지 않으니, 내가 입멸한 뒤 크게 불사를 이루리라.” 사조는 시자를 시켜 아이의 집에 찾아가 출가를 권하니 부모는 전생 인연이라 받아들이고 아이를 놓아주었다. 사조는 아이 이름을 홍인(弘忍)이라 하고 법과 가사를 전했다. 뒤에 당나라 황제 태종이 대사의 선풍을 듣고 사람을 보내어 황궁으로 두 번이나 청했으나 사양했다. 이에 태종이 세 번째도 거절하면 목을 가져오라 했다. 황제의 사자가 와서 전하자 도신 대사는 태연히 목을 내놓았다. 사자는 돌아가 고하니 태종이 더욱 흠모하는 마음을 내어 진귀한 선물을 보냈다. 이 소식을 듣고 천하의 수행자들이 구름처럼 모여들었다고 한다. 세수 72세에 앉아서 열반했다.
    사조 도신대사가 주석했던 사조사 전경.
    ㆍ나뭇꾼이 부처를 꿈꾸게 하다
    오조 홍인(弘忍, 601~675)의 성은 주(周)씨로 본래 호북성 황매현에 살았다. 7세에 출가하여 사조 도신대사를 섬겼는데, 매우 총명하여 일을 두 번 물은 적이 없었다. 오조가 된 홍인대사는 쌍봉산의 동쪽 봉우리(東山)로 불리운 빙무산으로 와서 도량을 조성하는데 이것이 오조사다. 오조 회상에는 항상 제자가 1000명이 될 정도로 성황이었다. 사조 대에 도량에 정착한 선사들은 오조 대에 대중화의 기반을 다졌다. 세상 사람들은 오조 홍인의 법문을 ‘동산법문(東山法門)’이라 했다. 동산법문은“문자를 세우지 않고(不立文字) 자기 마음을 바로 보면 부처가 된다”고 가르쳤으니 혜능처럼 글자도 모르고 고단한 삶을 살아가는 무지랭이들에게도 대자유인의 길을 보여 주었다. 당시 불교계는 경전에 의지하여 공부하니, 문자를 아는 귀족들이 중심이었고, 대다수 백성들은 불교를 공부하기가 어려웠다. 그러나 동산법문은 달랐다. 혜능처럼 글자를 몰라도 자기 마음을 바로 보아 부처되는 법을 알려줬다. 머나 먼 영남 오랑캐도 이 소식을 듣고 출가의 결단을 내렸고 당나라 여황제 측천무후도 “수행은 동산법문보다 나은 것이 없다” (<능가사자기>) 할 정도로 주목받고 있었다. 부처님 깨달음 이래 28대 달마대사가 동으로 와서 전한 선(禪)은 이조의 깨달음을 거쳐 오조대에 이르면,동산법문이란 이름으로 전국에 알려지기 시작한다. 동산법문의 요체는 마음을 깨치면 늘 초조하고 불안한 마음,불치병으로 고생하는 마음,구속된 마음도 단박에 해탈하여 영원한 자유와 행복을 성취한다는 것이다. 이제 선(禪)은 동쪽에서 서서히 정착되어 갔다. 이런 기반 위에 육조 조계혜능의 돈오선이 출현하게 된다.
    불교신문 Vol 2906         박희승 조계종총무원 문화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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