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육조의 생애와 사상

6 육조의 은둔과 출현, 풍번문답

浮萍草 2013. 4. 27. 07:00
    “바람으로 인하여 깃발이 움직이는가?”
    “바람도 깃발도 아닌 그대들 마음이니라”
    광효사 육조축발탑. 불교포럼 순례단은 축발탑과 보리수 앞에서 기념촬영을 하기도 했다.
    ㆍ혜능이 떠난 동산 오조사
    능 행자가 오조의 법과 가사를 받아 남쪽으로 떠난 뒤 동산 오조사는 너무나 고요했다. 이날부터 오조는 다시 법당에 오르지 않았다. 3일이 지나 대중이 이상하게 생각하자 신수가 “왜 법을 설하지 않으시냐?”고 물으니, 대사가 말했다. “나는 법과 가사를 이미 전했다. 능(能)이 가져갔다.” 이에 대중은 큰 충격을 받고 방앗간 노행자의 이름이 능이라는 것을 생각해냈고 그를 찾으니 없었다. 대중은 법의(法衣)를 가져 간 이가 혜능이고 고향이 신주이니 그를 쫓아 남쪽으로 몰려갔다. 이때 오조사 1000여 대중 중에 700명이 ?아 갔다고 한다. 그로부터 4년이 지난 어느 날 오조 홍인(601~675)대사는 홀연히 “나는 할 일을 마쳤다. 이제 가야 할 때다” 하고는 방에서 편안히 앉아 열반에 들었다. 세수 74세였다. 부도가 오조사에 동쪽에 있다. ㆍ네 본래면목은 무엇이냐?
    조계종에 기증 의사를 밝힌 광효사 육조전의 육조상.

    혜능은 두 달이 지나 대유령(大庾嶺)에 이르렀다. 대유령은 중국 광동성과 강서성 사이의 큰 고개로 남쪽을 영남이라 한다. 대유령만 넘으면 혜능의 고향인 것이다. 그러나 이 대유령에서 행자는 한 스님에게 잡히게 된다. 스님의 이름은 혜명(慧明)으로 장군 출신에 성품이 거칠었다. 혜능은 가사를 빼앗으러 온 줄 알고 목숨을 보존하기 위해 가사를 바위 위에 놓으며 가져가라 하였다. 이에 혜명이 말했다. “나는 가사 때문에 온 것이 아니라 법을 구하러 왔습니다. 행자께서 오조의 법을 받으셨다니 어떤 밀의(密意)가 있었는지요? 그 가르침을 얻고자 이렇게 왔습니다.” 행자는 스님의 뜻이 간절함을 보고는 이렇게 말해 주었다. “조용히 생각하고 생각하되 선도 생각지 말고 악도 생각지 말라. 바로 이럴 때 너의 본래면목이 무엇인가?” 혜명스님은 말끝에 문득 깨달았다(言下便悟). 혜능은 육조가 되어 처음으로 혜명에게 깨달음을 인가했다. 육조가 제시한 이 말이 화두(話頭)의 원형으로 간화선의 공부방법이다. 혜명은 이 화두를 바로 깨닫고 이렇게 말한다. “제가 비록 황매에서는 종지(宗旨)를 얻지 못했는데 이제 행자께서 가르쳐 주심에 문득 알았습니다. 마치 사람들이 물을 마심에 차고 더움을 스스로 아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부터는 행자께서 이 혜명의 스승입니다. 스승과 같은 이름을 쓸 수 없으니 도명(道明)이라 하겠습니다.” 이어서 말했다. “속히 남쪽으로 가시는 것이 좋겠습니다. 제 뒤에는 많은 스님들이 뒤를 쫓아오고 있습니다.” 도명은 지극히 공경하는 마음으로 행자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는 북쪽으로 돌아갔다. 과연 얼마 가지 않아 오조사 대중을 만났다. 도명은 그들에게 대유령에서 며칠 동안 행자를 기다렸지만 도저히 찾을 수가 없었다고 하자 대중은 모두 포기하고 되돌아갔다. ㆍ육조 혜능, 남쪽으로 와서 숨어 지내다
    육조의 풍번문답과 재출가 도량인 광주 광효사

    이렇게 하여 혜능은 가사를 가지고 대유령을 무사히 넘어 남쪽 조계산까지 왔다. 3년 동안 법을 설하지 말라는 오조의 지시대로 육조는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소관,광주 일대에서 머리를 기르고 속인의 옷을 입고 은둔한다. 주로 산속 사냥꾼들 사이에 묻혀서 지냈다고 한다. 본래 나뭇꾼 출신이니 산 일이 익숙했을 것이다. 그러나 짐승을 잡아 음식을 만들어 먹는 것은 불살생을 지켜야 하는 불제자에게는 여간 곤란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전해오는 말로 육조는 사냥꾼 그물에 걸린 짐승을 몰래 놓아주거나 고깃국을 끓이면 고기는 먹지 않고 야채만 먹고 지냈다고 한다. 이렇게 육조가 자신을 드러내지 않고 숨어 지낸 기간이 4년이라<조당집>은 전한다(우리나라에서 많이 읽혀온 덕이본<육조단경> 에는 15년,원형에 가까운 돈황본 <육조단경>에는 기간이 없다. 육조 연구의 최고 권위자인 대만 인순대사는 5년으로 본다). 그런데,왜 오조는 육조에게 몰래 야밤도주를 시키고 3년 동안 법을 설하지 말라 했을까? 지금 우리의 상식으로는 깨달아 6조로 인가받으면 모두 축하하고 잔치를 벌일 경사스러운 일인데 그러지 않고 은밀히 법과 가사를 전하고 멀리 도망가서 숨어 지내라 하니 이것을 이해하기가 어렵다. 이 문제에 대하여 오조에 따르면 깨달음을 인가 받고“그 증표로 가사를 가지면,생명이 위험하다”고 했다. 과연 그러했다. 초조 달마대사도 배척받아 독살 당했고, 2조 혜가대사는 시해 당했다. 다행인 것은 전법(傳法)한 뒤였다. 3조 승찬도 법난을 당해 10여 년간 완공산에 숨어 지냈다. 5조도 사조사에서 깨닫고 인가 받았지만, 사조사에서 떠나 동산 오조사로 와서 법을 설했다. 사조사에서 선후배들로부터 시기질투가 적지 않았을 것이다. 이 사정을 누구보다 잘 아는 오조는 남방 오랑캐 출신으로 깨달은 혜능 행자를 보호하여 법을 전하기 위해 남쪽으로 도망가게 하여 3년 동안 숨어 있어라 한 것이다. 달마와 오조 같은 대선지식들도 목숨을 지키기 쉽지 않은 현실에서 혜능은 특히 오랑캐 출신의 행자 신분이었으니 더욱 위태로웠을 것이다. ㆍ광효사 재출가와 풍번문답

    4년 동안 은둔했던 육조 혜능이 다시 모습을 드러낸 것은 나이 30세 전후에 광주 광효사(당시 법성사)였다. 어느 날 광효사에서 강사인 인종(印宗, 627~713)대사가 <열반경> 강의를 하고 있었다. 그때 혜능도 광효사에 재출가하여 행자로 강의 듣는 자리에 앉아 있었다. 그때 마침 도량에 바람이 불어 깃발이 나부꼈다. 대중 사이에 바람으로 인하여 깃발이 움직이는가? 깃발이 스스로 움직이는가? 하고 논란이 일어났다. 이에 혜능 행자가 말했다. “바람이 움직이는 것도 아니요, 깃발이 움직이는 것도 아닙니다. 그대들 마음이 스스로 움직이는 것입니다.” 이 말을 들은 인종 대사는 놀라서 모골이 송연해졌다. 강석이 끝나고 대사는 행자를 방으로 청하여 물었다. “행자는 예사 사람이 아닌데 스승은 누구인가요?” 혜능이 오조사에서 법을 얻어 남쪽으로 와 숨어산 과정을 말해주니 인종은 행자가 바로 오조로부터 법을 받아 가사를 가지고 남쪽 으로 온 육조라는 것을 알아보았다. 가사를 보여 달라 하여 과연 행자가 가사를 꺼내 보여주니,육조가 분명했다. 이에 인종스님이 자리를 바꿔 앉아 절을 하고 스승에 대한 예를 표했다. ㆍ광효사에서 구족계 받아 스님이 되다
    혜능은 법으로는 이미 육조가 되어 있었으나,신분은 아직 재가자였다. 4년 전, 오조사로 출가하여 행자로 깨달아 육조가 됐지만 비구계를 받지 못하고 남쪽으로 도망한 처지였기에 아직 승가의 일원이 아니었다. 혜능은 이미 해탈하여 대자유인이 됐으나,불법의 영원한 전승을 위하여 정식 수계를 받고 스님이 되어 승단의 일원이 된 것이다. 이것은 부처님이 깨닫고 난 뒤 다시 세속으로 돌아가 왕이 되지 않고 승가공동체를 만들어 대대로 법을 전하여 불법이 끊어지지 않게 한 것과 같은 뜻이다. 삼조도 재가자로 깨달았지만, 출가하여 승보가 되었고 사조와 오조도 사미로 깨달았으나 뒤에 스무 살이 넘어 스님이 되어 불조의 혜명을 이어왔던 것이다. 인종대사는 정월 보름날 광효사에 율사를 초청하여 계단을 열고 혜능의 머리를 깎아 구족계 수계식을 거행하였다. 이 광효사는 예전에 구나발타삼장이 계단을 세우고 예언하기를,“나중에 육신보살이 이 계단에서 수계하리라” 하였고,서기 502년 경에 인도 승려 지약삼장이 보리수를 가지고 와서 심으면서 160년 뒤에 육신보살이 나와 무량한 중생을 제도하리라 예언한 도량 이다. 과연 육조가 이 광효사에서 출가하여 수계를 하니 예언대로였다. 경내에는 지금도 보리수가 성성하고, 육조의 삭발 머리털을 넣고 쌓은 축발탑이 세워져 있다. 수계를 마치고 정식 비구가 된 육조 혜능대사는 저 유명한 조계 보림사로 떠났다.
    불교신문 Vol 2808         박희승 조계종총무원 문화부 차장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