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계류지 ㄱ ~ ㄹ/관음성지를 찾아서

31 여주 신륵사

浮萍草 2013. 10. 1. 00:00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나옹스님 숨결 깃든 여강의 법문 
    신륵사 앞을 흐르는 남한강은 여강이라 불린다. 나옹스님이 유배를 가다 바로 이곳 정자인 강월헌에서 입적한다.스님의 마지막
    을 기리기 위해 세워진 삼층석탑이 오랜세월 조용히 흐르는 여강을 바라보며 서있다.
    나옹스님의 부도인 보제존자 석종(보물 제228호).
    보제존자 석종비(보물제229호)와 석종앞 석등(보물
    제231호)도 같은 자리에 있다.
    12월의 첫날 나옹스님의 자취가 남아 있는 여주 신륵사를 찾았다. 짙은 안개가 정오가 되도록 사라지지 않았다. 일주문을 지나니 한옥으로 세련되게 단장된 수련관이 보인다. 템플스테이를 위한 공간이다. 강월헌으로 향한다. 1376년 4월15일 회암사 중창불사를 성대히 마친 나옹스님은 채 한달도 지나지 않아 유학자들의 시기를 받아 경남 밀양 영원사로 추방을 당한다. 회암사 열반문을 나서서 유배길에 오른 스님은 일주일 후 신륵사에 닿는다. 더이상 몸을 움직일수 없던 스님은 이곳 강월헌에서 입적한다. 강월헌 바로 아래에 당시 다비장이였음을 기리기 위하여 세운 삼층석탑이 굽이쳐 흐르는 강을 바라보고 서 있다. “청산은 나를 보고 말없이 살라 하고 창공은 나를 보고 티없이 살라 하네 탐욕도 벗어 놓고 성냄도 벗어 놓고 물같이 바람같이 살다가 가라 하네.” 너무나 유명한 시지만 나옹스님이 지었다는 것을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강월헌과 삼층석탑이 있는 동대 바로 뒤에는 고려시대 유일한 전탑이 있다. 신륵사가 고려때부터 ‘벽 절’이라고 불리는 이유가 바로 보물 제226호 신륵사 다층전탑 때문이다.
      
    ▲ (左) 보물 제226호 신륵사 다층전탑. 고려시대 전탑이다   ▲ (中)보물 230호 신륵사 대장각비    ▲ (右) 신륵사 관음전 관세음
    보살.

    전탑 옆에 서서 여강을 바라보다 전탑 위쪽 전각으로 향했다. 전각 안에는 신륵사 대장각비가 있다. 깨져서 글씨를 잘 알아보긴 힘들지만 고려말 유학자인 목은(牧隱) 이색 선생이 공민왕과 부모를 명복을 빌기 위해 나옹스님의 제자 들과 함께 대장경을 새기고 장경각을 세웠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현재는 장경각이 남아 있지 않지만 당시 찍은 대장경은 지금 일본에 보관되어 있다고 한다. 유학자인 목은과 나옹스님과의 인연 또한 대단하다. 목은의 문집인 ‘목은집’에 절이나 스님을 위해 쓴 기문이 37편이며 그중 9편은 나옹스님과 관련된 것이다. 나옹스님과 목은은 거의 동시대를 살았다. 스님의 입적 후 스님을 기리기 위해 세운 회암사에 있던 선각왕사비와 신륵사에 있는 보제존자 석종비의 글을 목은이 지었다. 목은과 나옹스님은 고향도 같고 또한 둘 다 이 곳 신륵사에서 생을 마감한다. 전탑이 있는 언덕을 내려와 사찰 중앙으로 들어선다. 신륵사 도량의 중심에 있어야 하는 극락보전은 해체보수 중에 있다. 극락보전 앞에 있는 구룡루를 임시 법당으로 사용하고 있다. 극락보전 뒤쪽에 신륵사에서 가장 오래된 전각인 보물 제180호 조사당이 있다. 조사당안에는 무학, 지공, 나옹스님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조사당 뒤쪽 계단을 20여m오르면 나옹스님의 부도와 비인 보제존자 석종과 석종비가 있다. 두 손을 모아 부도탑에 인사를 올린 후 계단을 내려와 마지막으로 관음전을 찾았다. “사람이 죽으면 어디로 갑니까?” 나옹스님이 친구의 죽음을 보고 출가하면서 가진 질문이다. 스님은 그 답을 찾았을까. 관세음보살님에게 여쭈니 살며시 미소로 답한다.
    불교신문 Vol 2678         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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