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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강화 전등사

浮萍草 2013. 11. 2. 07:00
    가장 오래된 현존 사찰 전등사
    가을 흠뻑 물들인 단풍 외호 받으며 세속을 보네
      
    ▲ (左) 동문에서 남문으로 향하는 성곽 길. 성벽의 넝쿨은 가을빛을 띠고, 포행 나선 스님은 가을과 함께 오솔길을 걷는다▲ (中) 10
    월16일까지 열리는 삼랑성 역사문화축제를 알리는 현수막이 남문에 걸려있다.▲ (右) 불이문 역할을 하고 있는 2층 구조의 전등사
    대조루.
    전등사는 평일도 많은 사람들이 도량을
    찾는다.
    팍하지도 도톰하지도 않은 반팔 혹은 긴팔 티셔츠에 생기발랄한 아이들이 전등사 남문에 모여 있다. 따사로운 가을볕이 아이들 얼굴에 가득 비춘다. 초등학생들은 전등사에 들어가기에 앞서 올망졸망 모여 선생님으로부터 정족산성 (삼랑성)에 대한 설명을 듣는다. 전등사가 정족산성 안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이다. 남문에서 대조루로 오르는 길은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이 섞여있는 짧은 숲길이다. 대조루는 성벽으로 둘러쌓인 전등사 출입구로, 남문과 동문에 들어선 이들이 도량의 중심으로 들어가는 위치에 있어 불이문의 역할을 한다. 고구려 소수림왕때 창건 고려 몽고항쟁때 경내에 임시궁궐 조선왕조실록 정족사고를 품다
    일반적인 가람의 배치에서는 입구의 일주문과 중턱의 천왕문 그리고 마지막 불이문을 지나야 도량의 중심으로 들어설 수 있다. 산성으로 둘러싸인 전등사 독특한 가람배치를 볼 수 있다. 강화도는 섬 자체가 우리나라 역사의 축소판이다. 선사시대 고인돌 유적부터 단군 얼이 담긴 마니산,고려 몽고항쟁과 팔만대장경 조성, 서양 세력과 처음으로 전투를 벌였던 병인양요가 있었던 곳이다. 전등사는 고찰이기에 앞서 강화도를 대표하는 문화유적이며,강화도가 역사의 소용 돌이로 전면에 부각될 때 그 중심에 있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전등사를 둘러싼 정족산성은 단군이 세 아들을 시켜 쌓았던 고대의 토성으로 삼국시대에 토성 자리에 석성을 쌓아올려 오늘날까지 이어 지고 있다.
    또 전등사는 현존하는 사찰 중 가장 오랜 역사를 간직하고 있다. 전등사의 창건주는 고구려 소수림왕11년(381년) 진나라에서 건너온 아도화상이다. 당시 아도화상은 강화도를 거쳐 신라 땅에 불교를 전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아도화상이 강화도에 머물고 있을 때 현재의 전등사 자리에 사찰을 세웠으니 그때의 이름은 진종사(眞宗寺)라고 했다. 고려시대로 넘어오면 고려왕실은 몽골의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도읍을 강화도로 옮기고 전등사 경내에 임시 궁궐을 지은 후 사찰을 크게 중창 시켰다. 당시 강화에서 조성된 팔만대장경은 부처님의 가피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호국불교 사상의 진수이며, 이 무렵 오랜 역사와 상당한 사격을 갖춘 진종사가 팔만대장경 조성에 정신적 지주 역할을 하였을 것이다. 고려 충렬왕 8년(1282년)에는 왕비인 정화궁주가 진종사에 경전과 옥등을 시주한 것을 계기로 ‘전등사’로 사찰 명칭을 바꾸었다고 전해진다.
      

    전등사 대웅전 처마 네 모퉁이를 떠받들고
    있는 조각상, 다양한 표정과 동작을 취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전등이란 ‘불법(佛法)의 등불을 전한다’는 뜻으로 법맥을 받아 잇는 것을 상징하는 말이다. 당시 정화궁주는 인기(印奇)스님으로 하여금 바다 건너 송나라에서 펴낸 대장경을 구해 전등사에 보관하게 했다. 조선시대에 이르러서는 숙종때 조선왕조실록을 전등사에 보관하기 시작하면서 왕실 종찰이 되었으며,조선 말기에는 외세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역할을 감당한다. 1866년 프랑스 함대가 조선에 개항을 요구한다는 명목으로 강화도를 점령했다. 이에 맞서 조정에서는 양헌수 장군에게 명하여 프랑스 함대를 물리치게 했다. 이때 양헌수 장군은 병력을 이끌고 초지진을 건너 정족산성에서 적을 무찔렀다. 조선군을 얕잡아 보던 프랑스 함대는 이 전투가 끝난 뒤 크게 전의를 상실하여 조선 에서 물러갔다. 프랑스군은 양헌수 부대와 싸우기 직전만 해도 정족산성을 돌파하고 전등사에서 점심을 먹겠노라 공언한 바 있었다. 이 전투에서는 조선의 관군뿐만 아니라 전등사 사부대중까지도 가세하여 나라의 위기를 구하는 데 힘을 모았다. 겹겹이 쌓여있는 이야기를 뒤로하고 동문 위의 성곽 길로 오른다. 정족산성의 가장 높은 곳은 해발222m인 정족산 정상이며 성곽 길 일주거리는 2km 이다. 전등사를 찾는 인파에 비한다면 성곽 길에 오르는 사람은 극히 미미한 수준이다. 산성은 기본적으로 경사진 지형을 이용하여 방어에 유리한 곳에 축조되기 때문에 경사진 길을 만나기도 한다. 남문과 서문 사이에서는 마니산과 전등사 전경을 볼 수 있다. 어느 덧 산성의 성벽은 넝쿨 줄기와 색 바랜 잎사귀들로 시나브로 가을빛을 띤다.
    불교신문 Vol 2759         신재호 기자 air501@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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