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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1 서울 남산 - 정각원

浮萍草 2013. 9. 21. 07:00
    조선 밝힌 ‘남산’… 깨달음의 도량 ‘정각원’  
    전국의 봉수가 집결 되었던 남산 봉수대는 서울의 북쪽을 조망하기에 좋다.
    숭정전은 두 번 옮겨진 후, 동국대 정각원이 되었다
    리도록 맑고 짙은 푸른 바탕의 하늘을 선사한다. 여기에 적당히 긴장하여 수축된 또렷한 뭉게구름이 더해진다. 중구와 용산구에 걸쳐있어 서울의 허파역할을 하는 도시자연공원인 해발 200m가 넘는 남산마루에서 청명한 하늘을 맞이했다. 깨끗한 시야는 한강을 따라 도열한 다리를 더욱 가깝게 만든다. 일광욕을 즐기는 유럽인들은 광장에 썬베드가 없음을 아쉬워 할듯하다. 남산순환도로에 차량을 직접 몰고 올라간 것이 마지막이었기 때문에 오랜 만에 오른 남산은 많은 변화가 있었다. 한때 연인들의 드라이브 코스로 유명했지만 이로 인한 부작용도 컸다. 수많은 차량이 매연을 뿜으며 서울타워를 향해 내달리는 것도 문제였지만, 많은 차량의 주차로 인해 도보로 남산을 향하는 사람들은 매연을 맡으며 인도마저 주차장으로 내어주기 일쑤였다.
     
    ▲ (左) N서울타워 주변은 내국인 뿐 아니라 외국인 관광객들의 발걸음이 이어지는 ‘작은 지구촌’이다▲ (右)동국대 정각원 현판과
    법당의 부처님이 나란히 카메라 앵글에 잡힌다.

    2005년 남산순환도로의 차량은 통제되었고 이 자리를 천연가스 순환버스로 대처했고 2010년 12월부터 순차적으로 전기버스가 투입 되었다. 지금은 둥글한 엉덩이와 남산을 상징하는 그림으로 바디페인팅을 한 ‘땅콩버스’라는 애칭을 가진 전기버스가 주종을 이루며 아이 들의사랑을 독차지 하고 있다. N서울타워 주변의 광장은 복층의 나무데크 구조가 들어섰다. 복층으로 만들면서 새로 생긴 공간은 상업시설물의 차지가 되었다. 복층의 나무데크에서 한강을 끼고 조망하는 강남은 도회적 그이상의 것은 찾아보기 어렵다. 한양을 지키던 남산은 서울의 중심이 되고, 경희궁의 정전은 정각원이 되었다.
    팔각정 뒤편의 봉수대에서 보는 서울의 북쪽의 구시가지 풍광은 조선의 한양천도 이후 지금까지 600년간 끊임없이 재생되어 이어온 수도의 진명목을 보여준다. 호칭에 있어서는 조선이 한양으로 천도하면서 목밀산(木密山) 또는 목멱산(木覓山)으로 불렸다.
     
    ▲ (左)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친환경 전기버스

    남산이란 이름은 서울의 남쪽에 위치한다는 뜻에서 붙여진 것으로 순 우리말로 ‘마뫼’가 있다. 북쪽의 백악,동쪽의 낙산,서쪽의 인왕산과 함께 서울을 둘러싸고 있는 내사산(內四山)의 하나로 도성방어의 중심적 역할을 수행 하였고 남산 내에는 성곽, 봉수대,장충단비,와룡묘,국사당터,남소영터,수표교 등 역사유적이 남아있다. 남산순환도로를 따라 장충동방향으로 내려오다 보면 동국대학교 상록원으로 빠지는 길이 있다. 이 길로 종립대학인 동국대학교에 진입하면 이내 정각원에 도달한다. 원래 정각원은 경희궁의 정전(正殿)이었다. 경희궁은 조선시대 선조의 왕자인 정원군의 사저였던 것을 광해군 8년(1616년)에 궁으로 승격 개축하여 처음에는 경덕궁이라 하였으나 영조에 이르러 경희궁으로 그 명칭이 바뀌었다. 이 건물은 임금이 신하들의 하례를 받고 정령을 반포하던 경희궁의 중심이었다. 1926년 3월 지금의 동국대학교 북쪽 자리로 이전하였다가 1976년 9월 현재 자리로 옮겨 법당으로 장엄된 뒤 1977년 2월 학교 법당인 정각원으로 거듭난다. 조선 후기 건축의 전형적인 양식을 보여주는 건물로서,서울시 지방유형문화재 제20호로 지정되어 있다.
    불교신문 Vol 2740         신재호 기자 air501@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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