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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충주 미륵세계사

浮萍草 2013. 7. 6. 07:00
    현세와 내세 잇는 하늘재에서
    마의태자의 ‘신라부흥 꿈’과 만나다
     
    ▲ (左) 10m가 넘는 미륵사지 부처님이 월악산을 넘어 한강을 바라보고 있다▲ (右)하늘재 정상부근. 피겨스케이팅 김연아 선수를
    닮았다는 소나무가 있다
    하늘재로 오르는 길은 완만하고 아름답다.
    은 공기가 하늘을 청명하게 해준다. 월악산 국립공원에 들어서니 푸르름은 더욱 진하다. 충북 충주시 미륵리와 경북 문경시 관음리를 잇는 하늘재로 향한다. 하늘재는 신라시대 8대 아달라왕이 북진을 위해 개척한 길이다. 신라가 한강으로 진출할 수 있는 교두보 역할과 고구려와 백제 남진을 막는 전략거점의 역할을 했다. 이로 인해 문헌에 나타나는 최초의 고갯길이 되었다. 미륵리에서 하늘재로 향하는 초입에‘중원미륵리사지’가 있고,이곳에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이 고려 왕건에게 항복할 때,이에 반대했던 마의태자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진다. <삼국사기>에는“마의태자는 금강산으로 들어가 집을 짓고 삼베옷을 입고 풀을 뜯어먹으면서 생을 마쳤다”라고 기술되어있다. 같은 맥락의 이곳에 전해지는 이야기는 이렇다.
    신라가 망하자 마지막 임금 경순왕의 아들,딸인 마의태자와 덕주공주가 망국의 한을 품고 금강산으로 들어가려고 먼 길을 떠났으며, 금강산으로 가던 도중 월악산 기슭에 다다른 남매는 각기 덕주사와 미륵사를 세운다. 덕주사를 창건한 덕주공주는 남향의 바위에 마애불을 새겼고 미륵사를 세운 마의태자는 불상을 북쪽으로 두어 덕주사를 바라보게 하였다고한다. 하지만 마의태자가 경주에서 금강산으로 간 길은 가까운 동해안을 피해 이곳(충주)과 원주를 거치는데,두 곳은 통일신라시대 제2의 수도로 중원경과 북원경이라 불렸으며 모두 신라 지지기반이 붕괴되지 않은 곳이며 전략적 요충지이다. 신라부흥운동의 거점을 확보하기 위한 행보였다는 추측이 가능하다. 중원미륵리사지를 둘러본다. 미륵리석불입상(보물 제96호),미륵리석등(충북 유형문화재 제19호),미륵리5층석탑(보물 제95호)이 북쪽을 향해 일직선상에 배치 되어 있다. 미륵리석불입상은 이 절터의 주존불로 원래 석굴식 법당을 이루고 있었으나 석굴의 목조 건축물이 불탄 후 지금의 석축만 남게 되었다. 미륵세계사 종무실에 양해를 구하고 10m가 넘는 미륵부처님을 감싸는 석축위에 조심스럽게 올랐다. 구름 한점이 바람길을 따라 너무도 익숙한 길인 양, 하늘재를 넘는다. 그 길을 따라 가본다. 중간 중간 굵은 자갈로 포장했던 흔적이 있어선지 일정한 폭의 평탄한 길이 숲속으로 이끈다. 미륵리에서 시작해 2km 조금 넘는 하늘재 정상에서 오르막이 아스팔트 포장도로를 만나며 내리막으로 바꾼다. 이제부터는 내세(미륵리)보다 현세(관음리)가 가깝다. 하늘을 바라본다. 신라가 국운이 승천하며 한강진출 교두보로 열었던 하늘재에서 접을 수 없는 마의태자가 품었던 신라부흥의 원은 현세와 내세를 아우르며 구름이 되어 하늘재를 넘고 있었다.
    불교신문 Vol 2706         신재호 기자 air501@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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