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천년사찰 천년의 숲길

8 속리산 복천암

浮萍草 2013. 6. 22. 07:00
    한글창제의 주역 신미대사
    자음 모음의 원리 생각하며 걷던 '사색로'
     
    ▲ (左)구한말 선방으로 명성을 떨쳤던 복천암 ▲ (右) 바람길 지나는 평온한 자리에 함께하는 사제지간인 신미스님(우측)과 학조
    스님의 부도.

    하늘에 널린 수많은 나뭇가지 어느 하나도
    뿌리와 이어져 있지 않는 것은 없다.
    어나무(자작나무과),풍게나무(느릅나무과),다릅나무(콩과),개벚나무(장미과), 굴참나무(참나무과),쪽동백(때죽나무과),고로쇠나무(단풍나무과),참회나무(노박 덩굴과).속리산 복천암 가는 길에서 나무에 둘러진 이름표를 만난다. 초등학교 입학식 때의 손수건과 이름표를 단정하게 가슴에 붙였던 모습이 떠오른다. 종<속<과<목<강<문<계 순으로 이어지는 생물분류는, 세분화 한 것이 위로 갈수록 먼 공통조상으로 수렴된다. 근본을 찾아가는 여정을 도식화 한 것이다. 복천암은 법주사 산내 암자이다. 이 길은 법주사 일주문에서 시작하는 오리(五里)숲 부터다. 2km남짓 거리라 붙여진 흙길로 아기자기하게 조성되어 차도와도 분리되어 있다. 다리를 건너면 법주사고, 방향을 틀어 오른쪽 문장대 방향으로 간다. 여기서 다시 3km정도의 완만한 길이 속리산 안으로 이끈다. 인공조림과는 먼,만나게 되는 다양한 나무들은 봄이 되면 더욱 자기만의 자태와 빛깔 그리고 향취로 뽐낼 것이다. 5km의 삼림욕장을 지나온 기분이다. 도착한 복천암은 신라시대 창건되었으며,금강산 마하연, 지리산 칠불암과 더불어 구한말 3대 선방으로 유명하였다. 여기서 100m 오솔길을 들어서면 조선시대 신미스님의 부도인‘복천암 수암화상탑’ (보물 제1416호)와 그의 제자 학조스님의 부도‘복천암 학조등곡화상탑(보물 제1418호)가 있다. 특히 신미스님은 한글창제에 지대한 공헌을 하고도 그 존재의 흔적은 미약하다. 범어(고대 인도어)에 능통하였으며, 불교경전에도 밝았던 신미스님은 조선왕조 한글창제의 세종부터 그의 아들 문종과 세조까지 친분이 두터웠다. ‘복천암사적기’에는 ‘세종은 복천암에 주석하던 신미대사로부터 한글 창제중인 집현전 학자들에게 범어의 자음과 모음을 설명하게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에 상당한 공헌을 했다는 뒷받침의 결정적 자료는 그가 문종으로부터 받은 법호이다. 문종 즉위 후 선왕 세종의 뜻을 받들어‘선교종 도총섭 밀전정법 비지쌍운 우국이세 원융무애 혜각존자’의 26자에 이르는 긴 법호를 준다. 존자(尊者)는 큰 공헌이나 덕이 있는 스님에게 내리는 칭호인데,‘개국 이후 이런 승직이 없었고 듣는 사람마다 놀라지 않는 이가 없었다.’고 실록은 전하고 있다. 법호 가운데 ‘우국이세(祐國利世)’란 ‘나라를 위하고 백성을 이롭게 했다’는 뜻인데 이것은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의 창제 목적으로 밝힌바와 같은 말이다. 따라서 문종이 세종의 뜻을 받들어 우국이세를 법호에 포함시킨 것은 신미대사가 한글 창제에 큰 공헌을 했기 때문이라는 해석이 가능하다. 그러나 ‘숭유억불’을 국가 경영의 기반사상으로 조선의 유학자들의 빗발치는 상소로 후에 ‘우국이세’는 삭제된다. 유학자들이 남긴 신미스님 관련기록에는 요승과 간승이라는 수식어로 스님을 폄하한다. 한글창제 주역으로도 손색이 없는 신미스님의 역할이 후대에 널리 알려지지 못한 데에는 유생들의 노굴적인‘흔적 지우기’있었다. 세상의 그 어느 것도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은 없다. 굳이 연기법을 논하지 않더라도 한글창제 근간에는 채취 가능한 주변 언어의 연구가 바탕이 되었을 것이다. 중국의 성리학만을 중시했던 당시 유생 가운데 범어에 능통한 이가 존재할리 만무한다. 범어를 집현전 학자에게 가르쳐 줄 수 있는 걸 당시에 스님들 밖에 없었을 것이다.
    불교신문 Vol 2702         신재호 기자 air501@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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