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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공주 갑사

浮萍草 2013. 6. 15. 07:00
    뭇 생명을 지키려 했던 영규대사의 삶
    24칸 당간에 오롯이 남아있네
     
    ▲ (左)갑사 전경 ▲ (右) 임진왜란 당시 백성을 구한 영규대사의 이야기가 전해오는 24칸 갑사 철당간

    호젓한 옛길 돌계단 사이에 모습을 나타내는 갑사
    부도
    곡을 따라 걷다보면 다양한 형태의 고목과 여기에 붙은 이끼가 옛길의 정취를 돋운다. 일주문을 지나 오른쪽으로 향하며 만나게 되는 갑사의 옛길이다. 계곡을 여전히 맴도는 한기는 떠날 채비를 못한 모양이다. 계곡의 속살을 덮고 있는 얼음과 눈은 아직 그대로건만 고목에 의지해 펴져 있는 이끼의 풀빛 생명력은 쉼이 없다. 이끼는 음지에서 드러나지 않는다. 조명 받는 순간, 오히려 사그라진다. 오르다보면 곧 ‘철당간과 지주’를 만나게 된다. 보물 제256호로 통일신라시대의 당간으로는 유일할뿐 아니라 임진왜란때의 영규대사에 얽힌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때,영규대사는 갑사의 말사인 청련암에서 정진 중 이었으며 무술에 능했다고 한다. 당시 계룡산에는 사찰과 암자가 번창해 대중이 3000명에 이르렀다고 한다. 이에 영규대사는 이 당간지주에 올라 승병을 모았다. 처음에는 회의적이던 스님들도 영규대사의 백성을 살리고자 하는 충심에 감복해 마침내 800여명의 승병이 모을 수 있었다. 무기라고는 낫뿐인 스님들을 단 10일만 훈련시켜 청주성 전투에 참가한다. 먼저 패해 관군은 연기의 나루터로 퇴각하여 머물고 있을 때 영규대사가 이끄는 승병은 진을 유지하고 버텨낸다. 그리하여 조헌이 이끄는 1600여명 의병의 합류를 이끌어 내고 이후 사기가 오른 승군과 의병 그리고 관군의 연합공격으로 청주성을 탈환한다. 이 소식을 접한 전라도를 총괄하던 권율장군은 영규대사의 용맹스러움과 자질을 알아차리고 자신의 휘하의 선봉장으로 삼고자 마음먹는다. 이때 조헌은 윤선각과의 갈등으로 의병절반이 이탈한 상태에서 왜군이 금산 으로 향한다는 말에 출전하고자 한다. 영규대사는 권율장군 지원군이 도착하면 금산으로 가자고 설득하나 조헌은 출전하고야 만다. 어쩔 수 없이 영규대사는 승병 800여명을 이끌고 따라 나선다.
    이에 스님들이“대사께서는 왜 죽을 곳을 찾아가십니까?”라고 묻자 대사는“조헌은 충의의 선비이며 우리와 생사고락을 함께한 동지 이다. 동지가 죽을 곳으로 향하는데 어찌 보고만 있겠는가.” 그리하여 금산에 도착하게 되는데,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왜군의 기습을 받아 조헌의 700의병은 전멸하게 된다. 조금 뒤쪽에 위치했던 영규대사와 승병은 아직 퇴로가 열려있는 상황이었으나, 죽기를 자처하며 돌진하여 장렬히 산화한다. 왜군도 이 전투에서 상당한 타격을 받아 더 이상의 서진은 멈춘다. 당간지주를 지나면 돌계단이 나타나고 그 위로 갑사부도(보물 제257호)가 대덕광전의 처마와 소나무를 병풍삼아 빼꼼이 얼굴을 내민다. 팔각형의 지붕을 가진 팔각원당형으로 되어 있는 이 부도는 통일신라시대의 대표적 양식이다. 옆에는 백일홍으로 더 잘 알려져 있는 배롱나무가 나무껍질을 한번에 훌렁 벗어버린 채, 참기름을 바른 것 같은 매끈한 모습으로 오가는 사람을 맞이한다. 이 모습을 일본사람들은 껍질의 매끄러움에 나무타기의 명수인 원숭이도 떨어 진다하여 ‘원숭이 미끄럼나무’라고도 한다. 계곡을 건너면 이내 갑사다. 법당의 참배를 마치고 다시 내려오는 짧은 길에 이끼는 햇살의 사각에서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아직도 온전히 조명되지 못한,장삼을 방패삼아 낫 들고 일어서서 빗발치는 왜군의 조총을 몸으로 막으며 백성의 생명과 터전을 지켜 주고자 했던 영규대사의 삶은 조명 받지 못하는 음지에서 수분과 영양분을 머금어 뭇 생명이 살아갈 수 있는 토양을 제공하는 이끼 와도 닮았다.
    불교신문 Vol 2698         신재호 기자 air501@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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