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천년사찰 천년의 숲길

3 부소산성 고란사

浮萍草 2013. 5. 18. 07:00
    시간을 되돌리는 고란사 약수 마시고 
    백제 쇠락의 사비시대를 만나다
    백제 토성의 흔적을 넘나드는 숲길의 소나무 형상에서 백제의 최후의 몸부림이 연상된다.
    키큰 영일루는 연천봉에서 떠오르는 해를 맞이하던
    곳이다
    사는 승자의 기록이다. “성왕 16년 봄, 백제는 사비로 천도하고 국호를 남부여로 하였다.” - <삼국사기> 이것이 백제의 사비시대를 알리는 유일한 역사 기록이다. 위례성(서울),웅진(공주)을 뒤이어 백제 부활의 마지막 불꽃을 사르던 마지막 도성 사비(부여). 그리고 그 왕궁을 지켰던 마지막 성곽 부소산성. 해발 106미터의 작은 능선 같은 부소산에 흙으로 쌓은 토성임을 감안해도 백제의 최후의 보류였던 부소산성의 존재감은 너무나 미약하다. 첫인상은 거닐기 좋고 쉴 자리 군데군데 있는 숲길이 잘 정비된 공원이다. 부소산문에서 시작하는 길은 좌우 두 갈래이지만 하나의 순환형이다. 안내문에 친철하게 문화재를 마주보고 느낌있는 여행을 원한다면 삼충사 -영일루-군창지-수혈주거지-반원루-사자루-낙화암-고란사로 향하는 오른쪽길을 추천하고 있지만 왼쪽길로 들어서 단박에 고란사에 이른다. 승자가 기록한 역사에는 고란사의 창건시기 조차 남기지 않았다. 백제 17대 아신왕때 창건되었다는 설도 있고 낙화암에서 목숨을 던진 백제 궁녀들의 원혼을 추모하기 위해 고려 초기에 창건하였다는 설도 있을 뿐이다. 지금도 법당 뒤편에 있는 고란약수에는 전설이 있다. 한 마을에 금술 좋은 노부부가 살았는데 늙도록 자식이 없어 할머니는 항상 되돌릴 수 없는 세월을 한탄하며 다시 회춘하여 자식 갖기를 소원했다. 그러던 어느날 금성산 도사로부터 부소산 강가 고란사 바위에서 고란초의 부드러운 이슬과 바위에서 스며 나오는 약수에 놀라운 효험이 있다는 말을 듣고 다음날 새벽 할아버지를 보내 그 약수를 마시게 하였다. 할아버지가 밤이 되도록 오지 않자 약수터로 찾아가 보니 간난아이가 남편 옷을 입고 누워 있었다. 할머니는 도사가 한잔 마시면 삼년이 젊어진다 말을 할아버지에게 전하지 않은 것을 후회하며 아기를 안고 집에 돌아와 고이 길렀는데 아이가 훗날 공을 세워 백제 최고의 벼슬인 좌평에 올랐다고 한다. 흔적조차 희미한 마지막 백제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곁에 두며 걷고 싶은 마음에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는 효험이 있다는 약수를 마시고 고란사 바로 위에 있는 낙화암에 오른다.
      
    ▲ (左) 백제의 충신을 기리는 삼충사.▲ (中) 낙화암에 자리잡은 백화정에서 바라본 백마강▲ (右)고란사 전경

    삼천궁녀가 떨어져 죽었다는 절벽위에서 내려다보이는 ‘백제에서 제일 큰 강’이라는 뜻의 백마강은 부소산성 북쪽을 외호하며 반원 처럼 휘돌아 흐른다. 적의 방어를 수도천도의 첫 번째 요건으로 꼽아야 했던 쇠락해가는 왕조의 슬픔현실이 반영된 것이다. 또 도성의 규모로 보아 삼천이라는 궁녀의 숫자는 의자왕의 방탕함을 과대포장하기 위한 신라나 후대의 편향된 시각이었음을 짐작 할 수 있게 해준다. 이어 현재의 부여 시가지가 내려 보이는 반월루가 나오고 식량을 저장하였을 제법 너른 평지의 군창지터가 나오는데,지금은 소나무 숲으로 변해있다. 옛 토성의 흔적을 넘나드는 숲길은 백제의 흔적조차 덮어 버리는 듯하다. 고란사에서 시작한 2.3km 백제의 숨결을 되짚어보는 길의 끝자락에 만나는 삼충사는 백제의 충신 성충,흥수,계백의 충절을 기리기 위한 근래 만들어진 사당이다. 만약 백제 의자왕이 잘못된 정치를 바로 잡고자하는 성충의 직언을 받아들였거나 나당연합군이 공격해오자 탄현을 지켜야한다는 흥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면 계백과 오천 결사대가 황산벌을 지키다 망하는 백제의 역사는 달라졌을지 모른다.
    불교신문 Vol 2690         신재호 기자 air501@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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