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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흑수선’ 구례 화엄사

浮萍草 2013. 11. 7. 07:00
    차별없는 ‘화엄의 꽃’ 보여준 ‘각황전 부처님’
     
    ▲ (좌) 여행하기 좋은 계절이다. 황금들판, 높고 푸른하늘도 좋지만 고찰에 가면 오랜 목조건축물에 반사되어 나오는 부처님의 품
    처럼 아늑한 가을햇살을 느낄 수 있다. 화엄사에선 잠시도 눈이 쉴 틈이 없다.▲ (우) 불국사 다보탑(국보 제20호)과 더불어 우리
    나라 이형(異形)석탑의 쌍벽을 이루고 있는 국보 제 35호 화엄사 사사자삼층석탑.
    화엄사 각황전에서 기도하고 나오던 황석이 형사와
    마주치는 모습.
    창호 감독의 영화‘흑수선’(2001년작)은 50년의 세월을 넘나드는 스릴러다. 비전향장기수 황석(안성기)이 출감한 뒤 서울에서는 연쇄살인사건이 벌어 지고 그 뒤를 쫓던 오 형사(이정재)는 이 사건 뒤에 한국전쟁과 거제포로 수용소를 둘러싼 기나긴 사연이 있었음을 알게 된다 한국 추리소설의 거장 김성종 씨의 원작소설 <최후의 증인>이 나온 것은 1974년이고 이두용 감독이 이 소설을 처음으로 영화화한 것은 1980년이다. ㆍ한국전쟁 민족의 아픔과 백두대간 정기 간직한 지리산 모든 것 담아 피어나는 화엄세상
    하지만 당시 이 영화는 무지막지한 검열을 통과하면서 무려 40여 분이 잘려 나갔다.
    20년이 지난 2001년에야 비로소 분단 상황과 이념 대립을 소재로 자유롭게 영화를 만들 수 있게 되었다. ‘흑수선’은 제작비 50억원에 안성기 이미연 이정재 정준호에 이르는 호화 진용을 갖춘 이른바 대형 블록버스터로 2001년 당시 부산 국제영화제 개막작이기도 했다. 하지만 흥행에는 그다지 좋은 성적을 거두지 못했다. 비전향장기수 황석이 출소 후 머무는 곳이 바로 구례 화엄사이다. 황석이 조용히 머물기에는 화엄사의 규모는 너무 거대하지 않았나 싶다. 또한 황석이 각황전에서 기도를 하고 어간문으로 나오는 모습 또한 눈에 거슬린다. 화엄사가 어떤 절인가. 한민족의 역사와 문화, 한국불교의 수행 전통을 고스란히 간직해온 천년고찰로 조계종 19교구본사다. 백제 성왕 22년(544) 인도에서 건너온 연기조사가 창건한 이래,시대의 고통과 아픔을 함께 하며 부처님 가르침을 통한 불국정토 구현에 최선을 다해온 화엄사는 임진왜란 당시 왜적에 의해 전소됐지만 선대 스님들의 각고의 노력으로 현재의 대가람의 면목을 갖출 수 있었다.
    화엄사 각황전 국보 67호 화엄사 각황전. 대웅전보다 70년이나 후에 더 크게 건축되었지만 대웅전과 조화를 이루기 위해 많은
    것이 절제되어 있다.

    이런 화엄사의 역사에 대한 소명의식과 중생구제의 원력은 척불이 횡행했던 조선시대에도 왕명에 의해 ‘선교양종 대가람’으로 승격 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됐다. 이때부터 화엄사는 ‘지리산 대(大)화엄사’라고 일컬어지는 거찰 중 거찰로 자리잡았다. 바닷물이 육지의 모든 강물을 다 받아들이듯이 대승경전의 꽃이라 불리는 <화엄경>은 모든 다른 제경의 법문을 수용하고 융합 한다. 백두산에서 발현한 강대한 기운이 활짝 핀 지리산은 만법을 조화하고 통일하는 <화엄경> 사상을 바탕에 둔 가람을 세우기 최적지일 것이다. 지리산 계곡마다에는 천년고찰이 자리하고 있지만 그 중에서 지혜를 상징하는 1700m 반야봉 정기를 이어 받아 이루어진 화엄사가 으뜸이다. 일주문과 천왕문을 지날 때마다 이곳 저곳을 살피느라 눈이 바쁘게 돌아가진 하지만 보제루 옆을 돌아서면 펼쳐지는 중심 영역에 들어서면 누구나 감탄사를 토해낸다.
    대웅전 보제루 옆으로 돌아서면 펼쳐지는 화엄사 경내

    웅장한 각황전과 대웅전 영산전 명부전 나한전 원통전을 비롯한 전각들과 석탑들과 석등이 아름답게 자리잡고 있다. 따사로운 가을 햇살이 오랜 목조 건축물들을 비추니 온몸이 아늑하고 포근해 지는 기분이다. 새삼 천년고찰의 품안으로 들어왔음을 알아차리게 된다. 영화 속에 황석이 기도하는 곳이 바로 국보 67호로 지정된 웅장한 각황전이다. 원래 이 곳에는 의상대사가 670년에 세운 3층 규모의 커다란 장육전(丈六殿)이 있었다. 장육전 사면을 모두 화엄석경으로 장엄했었는데 임진왜란 때 파괴되고 만다. 안타깝게도 지금은 1만여점이 넘는 석경 조각들만 전해오고 있다. 각황전 옆으로 난 계단길을 따라 올라가면 자장율사가 건립한 7m 높이의 사사자석탑이 있다. 사자들에 에워싸여 있는 중앙에는 합장한 채 서있는 스님상이 있는데 연기조사의 어머니로 전하며,바로 석탑 앞에서 꿇어 앉아 있는 스님은 사찰을 창건한 연기조사로 지극한 효성을 표현해 놓은 것이라 한다. 영화 속 주인공들의 이념갈등으로 서로에게 큰 상처를 줬듯이 한국전쟁 당시 이 곳 또한 큰 상처를 입을 뻔했다. 빨치산의 은거지를 없앤다는 이유로 지리산에 있던 고찰들에 소각명령이 내려졌었다. 이 곳 화엄사도 예외는 아니였다. 하지만 문화재에 대한 의식을 갖고 있던 한 총경의 의지로 잿더미로 변하는 것은 겨우 막을 수 있었다. 그 때를 기억하는지 석탑을 받치고 있는 사자 한 마리가 호탕하게 웃고 있었다.
    불교신문 Vol 2760         김형주 기자 cooljoo@ibulgyo.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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