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저장소 ㅁ ~ ㅇ/불교미술의 해학

44.그래도 나는 용이다

浮萍草 2014. 3. 4. 07:00
    많은 사람들이 용에 대한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다. 용꿈을 꾸면 ‘큰 벼슬에 오른다거나 아들을 낳는다거나 일확천금을 얻는 행운이 온다거나’ 하며 좋아한다. 용에 대한 신비스러움이 막연한 기대감을 부풀어 주기도 한다. 산 이름에도 용이 들어가고, 지명에도 용이 살아 있고, 바위에도, 절 이름에도, 사람 이름에도 용이 꿈틀대어도 남녀노소 용을 싫어하지 않고 아예 용과 함께 사는 민족이 우리민족이 아닌가 생각된다. 특히 용이 많이 사는 사찰에서는 온천지가 용으로 덮여 있다고 말하여도 틀린 말이 아닐 것이다. 사찰의 주변을 살펴보면 불화 속, 전각 안팎, 기둥, 수미단, 벽화, 종의 용뉴, 사천왕의 검, 부도, 불탑 등등 수 많은 용들을 발견할 수 있다. 연화좌에서 부처님을 모시거나 천장 속에서 불보살님을 지키거나 전각이 불에 타지 않도록 소방수 역할을 하거나 인간들을 수호하는 등 여러 가지 역할을 하기 때문에 용들이 많다. 이러한 용들을 우리 조상들은 어떠한 모습으로 그렸을까?
    “무서운 龍님 ‘신비와 위엄’ 어디 두셨나요?”
    물병서 나오는 귀여운 모습에 잠자리 ‘깜짝’ 개구리 발에 치여 ‘버둥버둥’…측은함 절로 약간 허술한 그들의 모습서 ‘친근함’ 느껴져
    해남 대흥사 수미단의 청룡과 황룡

    해남 대흥사 수미단의 용
    국 옛 책인 <광아(廣雅)>에 나타난 용의 실체는 ‘머리는 낙타와 비슷하고, 뿔은 사슴과 닮았고,눈은 토끼눈처럼 빨갛고,귀는 소귀와 같으며,목덜미는 뱀 과 같고,비늘은 잉어와 같으며,발은 호랑이 발에 발톱은 매의 발톱과 같다’고 한다. 이렇게 정형화된 용은 주로 불단 닫집 천장에 조각으로 장식되는 경우나 어칸 앞 등 부처님의 전면을 장식하는 중요부분에만 이러한 용이 나타난다. 사찰에는 권위와 신비를 부르는 멋진 용들만 있는 것이 아니라 부처님 안전 (眼前)에서도 장난을 치거나 서로가 다투거나,잠자리에게 밀리거나 개구리 에게 눌려 힘을 못 쓰거나,가물치에게 욕을 먹는 용들이 있어 해학적이면서도 용으로서의 신비와 위엄이 사라져 버린 이러한 용에게도 용으로 대접을 해 주어야 할지 고개가 갸우뚱 리게 만드는 재미가 있다. 조상들은 왜 이렇게 힘 못쓰고 도움도 안 되는 용들을 그리거나 만들었을까? 그리고 이러한 용들을 부처님의 전각에 배치하였을까? 자못 궁금하고 재미 있어진다. 부처님의 세계는 절대 평등의 세계이다. 인간이나 동물이나 각자 자기 삶을 최고로 느끼고 살아가는 연화장의 세계를 구현하고 있기 때문에 부처님의 발아래인 수미단에는 별의별 종류의 생명 들이 자기의 방식대로 살아감을 보여주고 있다. 서로 간 존재의 의미를 존중하며 어느 하나라도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다는 듯이 잘난 놈,못난 놈 이것도 인간의 기준으로 생각하여 말한 것이지만 수미 단에 빼곡히 나타난다. 수미단에 보면 용들이 사는 세계나 인간이 사는 세계나 삶의 방식은 비슷 한가보다. 사람들도 잘난 사람이나 못난 사람이나 마찬가지인 것처럼 용의 세계에서도 신비나 위엄이 있는 용이나 그렇지 않고 힘도 못 쓰는 용이나 스스로 자신의 삶에 만족하며 우주의 주인으로서 당당히 살아간다.
    <잡보장경> 용왕의 게송 인연편을 보면“일체 중생에 대한 평등과 사랑 그것은 으뜸가는 훌륭한 즐거움인데 강나루를 무사히 건너는 것처럼 사랑 평등 두 즐거움도 그러하니라. 친한 벗을 해치지 않는 것도 즐거움이요 교만을 없애는 것도 즐거움이다. 안에 덕행이 없으면 겉으로 교만하고 진실로 무지하면 교만이 생기나니 강한 편이 되어 다투고 나쁜 벗과 친하면 명예는 줄어들고 나쁜 이름 퍼지네”라 하여 일체중생에 대한 평등과 사랑만이 자신이 잘났다고 생각하는 교만심을 없애는 지름길임을 말해주고 있다. 수미단에 조각된 용들의 모습에서 사람들에게 존경받기 보다는 약자의 입장에서 사람들의 심정을 이해해주는 친구 같은,용 같지 않은 용을 통해 웃음의 보따리를 열어보자. 김천 직지사 대웅전 수미단의 용을 보면 ‘과연 이것도 용인가?’하고 의구심이 든다.
    김천 직지사 수미단의 용과 잠자리
    잠자리보다 작은 용이 있다면 여러분들은 어떤 생각이 들까? 먼저 “그런 용이 어디 있어? 말도 안 돼!” 할 것이다. 그러나 말도 되고 용도 있어 너무나 해학적인 면을 보여주고 있다. 수미단을 살펴보면 푸른 알라딘 램프 같이 생긴 물병에서 상서로운 구름을 일으키며 우주법계로 퍼지면 주전자 꼭지처럼 생긴 주둥이에서 한 마리 푸른 용이 입에는 여의주를 물고 불꽃을 내뿜으며 튀어나온다. 아직 꼬리 부분은 덜 나온 듯 계속 이어지고 앞발만 튀어나왔다. 이에 놀란 옆의 잠자리는 화들짝 날개를 편다. 그런데 “에게게 웬일이니? 나보자 작잖아? 야! 너 용 맞아?” “그럼 용이고 말고 입에 문 여의주를 보면 모르니?” 핀잔하는 듯 힘차게 오색구름 속 공간으로 승천을 한다. 참으로 이상하다.
    300년 전 벌써 우리조상들은 아랍의 알라딘 램프의 비밀을 알고 있었는가. “주인님 부르셨습니까?” 하고 거인이 나타나기 보다는 아름답고 귀여운 용이 작은 물병 속에서 나타나 이 건물의 주인인 부처님께 달려간다. 잠자리를 영어로 드래곤 플라이(dragonfiy) 이라 하지 않던가? 그 당시 조상님들은 글로벌 시대에 맞추어 영어를 알고 있었단 말인가? 이래저래 생각만 하여도 재미있다.
    김천 직지사 수미단의 용과 개구리
    또 하나 개구리 밑에서 고생하는 용을 보면 측은한 생각이 든다. 얼마나 작은 용이면 연잎 위에 올라앉은 개구리와 흐드러지게 핀 연꽃 사이 에 눌려 숨쉬기도 힘든 듯 푸른 용이 이빨을 악물고 삐쳐 나오려고 안간힘 을 쓴다. “용 살려! 그래도 출신 성분이 용인데 이것 너무 한 것 아닙니까?” 발버둥 치나 용의 체면은 다 구긴 뒤이다. 무심한 개구리는 큰 눈만 껌뻑일뿐 도무지 비켜 주려고 하지 않는다. 개구리에게도 지는 용이 있으니 참으로 세상살이는 돌고 도는가 보다. 용의 신비와 위엄은 아무리 잘난 놈도 못난 놈에게 얻어맞고 사는 조각을 보여줌으로써 강자에 대한 약자의 보복심리가 깔려 있어 해학적이다. 이뿐만 아니라 해남 대흥사 대웅보전 수미단의 용을 보면 너무나 우습다. 연말 송년모임이라 아직 곡차가 덜 깨셨나? 눈은 풀어져 해롱거리고 용의 위엄을 세우려 송곳니를 길게 드러냈지만 하나의 웃음꺼리에 불과하다.
    굽어 쳐진 어깨, 점박이로 치장한 비늘과 긴 귀,더부룩한 수염,발톱은 말발굽처럼 무디기만 해 전혀 위엄이 서지 않는다. 용이 이정도 되면 동네 아이들과 함께 노는 이웃집 바둑이라 불러도 될 듯하다. 또한 그 옆의 청룡 황룡들도 마찬가지다. 얼마나 사이좋게 지내면 서로 간 온몸을 실타래처럼 꼬며 즐거워 웃고 있다. 동물들도 스킨십을 좋아하나보다. 피카소의 그림인가? 아니면 초등학교에서 숙제로 낸 그림속의 용인가? 둥그렇게 뜬 눈은 무슨 사고라도 칠 듯 장난끼가 흐르고, 점박이 무늬비늘은 아예 옷 인양 입었다. “그래도 나는 용이다” 하고 흰 뿔을 자랑하는 듯 즐거워하고 있어 재미있다. 생각해 보면 이러한 용이 탄생되리라고는 상상도 못하였을 것이다. 멍청한 용, 때론 바보 용이 되는 것이 까칠한 세상을 살아가는 지혜인지도 모르겠다. 경봉스님의 “바보가 되거라”는 말씀이 귓속을 울린다.
    불교신문 Vol 2485         권중서 조계종 전문포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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