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7세기 한반도

25. 고구려의 멸망

浮萍草 2013. 9. 14. 07:00
    중국과 맞섰던 동아시아 강자 705년만에 패망
    나당연합군의 백제와 고구려 공격
    구려 정벌을 중지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태종이 죽은 649년으로부터 10 여년은 당의 고구려 침공이 없었다. 그러나 전략이 바뀌었을 뿐,당이 고구려 정벌 야욕을 포기한 것은 아니었다. 그 전략이란 백제를 먼저 정벌하여 한반도에 교두보를 마련한 뒤에 고구려 를 공격한다는 것. 그래서 당나라는 백제를 정복한 660년 11월부터 고구려 공격을 개시했다. 661년 3월1일 당 고종은 여러 신하와 함께 낙성문(洛城門)에서 연회를 베풀었는데,일융대정악(一戎大定樂)이라는 무용을 관람하였다. 둔영(屯營)에서 새로 가르친 이 무용은 한 명의 군인이 대평정(大平定)을 한다는 의미였는데, 오색 갑옷을 입고 손에 창을 든 무용수가 140명이나 되고 전고(戰鼓) 소리가 100리 밖에까지 들릴 정도로 웅장한 것이었다. 고구려를 친히 정벌하려고 했던 고종은 이 춤을 통해 무력의 위세를 상징 적으로 보여주고자 했던 것이다. 측천무후의 만류로 고종은 친정을 포기했지만,그의 고구려 정벌 야욕은 식을 줄 몰랐다. 661년 4월에도 임아상,글필하력(契苾何力),소정방 등이 거느린 35군이 수륙 양면으로 고구려를 공격했다. 9월 연개소문은 아들 남생으로 하여금 압록강을 지키게 했다. 662년 봄 연개소문은 사수(蛇水) 가에서 방효태(龐孝泰)가 거느린 당의 군사를 전멸시켰다. 662년 평양성을 포위했던 소정방이 큰 눈으로 인해 물러갔다. 이 무렵 고구려에는 불길한 여러 징조가 나타나고 있었다. 백제가 망하던 660년 7월에는 평양의 강물이 3일 동안이나 핏빛이 되었다.
    요망하고 기이한 일들도 자주 일어났다. 몇 년간이나 거듭 기근이 드는가 하면 지진으로 땅이 갈라지기도 했다. 이리와 여우가 성으로 들어오고 두더지가 문에 구멍을 뚫었다. 사람들은 놀라고 불안해했다. 665년 연개소문이 죽었다. 권력을 장악하고 20여년이나 국정을 주도하던 그의 죽음은 고구려 정치에 큰 변화를 초래했다. 물론 그는 권력을 아들에게 승계시키기 위한 조처를 취해왔다. 장남 남생(男生)은 32세 때인 665년에 태막리지로 군국(軍國)을 총괄하였고 동생 남산(男産)은 30세에 태막리지가 되었다. 연개소문에게는 남생, 남건(男建), 남산 등 세 아들이 있었는데 그는 죽기 전 아들들에게 유언을 남겼다. “너희 형제는 물과 고기처럼 화합하여 작위를 둘러싸고 다투지 마라. 만약 그렇지 못하면 반드시 이웃나라의 웃음꺼리가 될 것이다.” 당, 백제정벌로 교두보 마련 고구려 정복 야욕도 본격화
    고구려는 연개소문 사망하자 권력 놓고서 형제들끼리 암투

    연개소문의 우려는 곧 현실로 나타났다. 이들은 형제간에 서로 싸웠고 싸움은 고구려를 패망으로 몰고 갔다. 연개소문이 죽자 장남인 남생이 국정을 맡았다. 지방의 여러 성을 순행하기 위해 동생인 남건과 남산에게 일을 맡겼다. 어떤 사람이 두 아우에게 말했다. “남생은 두 아우가 핍박하는 것을 싫어하여 제거하려는 마음을 갖고 있으니 먼저 계책을 세우는 것이 좋겠습니다.” 처음에 두 동생은 믿지 않았다. 또 어떤 사람이 남생에게 말했다. “두 아우는 형이 돌아와서 그들의 권력을 빼앗을까 두려워하여 형을 막고 받아들이지 않으려고 합니다.” 남생은 친한 사람을 몰래 평양으로 보내어 그들을 살피게 했다. 그는 두 아우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이에 왕명으로 남생을 왕성으로 불러들였으나 남생은 두려워 감히 돌아가지 못하였다. 남건이 스스로 막리지가 되어 군사를 출동시켜 그를 토벌하니 남생은 달아나 국내성(國內城)에 웅거하면서 그 아들 헌성(獻誠)을 당나라로 보내 구원을 청했다. 당에서 666년 6월7일 우교위대장군 글필하력에게 남생을 구원하게 했는데,헌성이 길을 인도했다. 9월 남생이 무리를 이끌고 당의 방동선과 합했는데 당에서는 남생을 요동대도독으로 삼았다. 666년 12월에는 연개소문의 아우 연정토(淵淨土)가 관리 24명과 함께 12성 763호 3543명을 이끌고 신라에 항복했다. 667년 9월14일 당의 이적이 고구려의 신성을 공격하니 성의 사부구(師夫仇) 등이 성주를 묶고 문을 열어 항복했다. 금산에서 설인귀의 공격을 받아 고구려군 5만명이 죽었다. 668년 2월 이적(李勣) 등이 고구려 부여성을 함락시킴에 주위 40여 성이 항복했다. 남건이 5만의 군사로 부여성을 구하려고 하다가 설하수(薛賀水)의 전투에서 패해 3만명이 죽거나 사로잡혔다. 그리고 압록강 하구의 대행성(大行城)이 무너졌다. 이해 4월에는 동북쪽에 혜성(彗星)이 나타났다. 이를 당나라에서는 고구려 멸망의 징조로 해석하고 있었다. 6월12일 당의 유인궤가 당항진에 도착했는데 신라의 김인문이 마중했다. 이때 당에서는 신라의 고구려 출병을 요구했고,군사 작전을 함께 논의했다. 문무왕은 대당대총관(大幢大摠管) 김유신을 비롯한 38명의 총관을 임명하여 20만명의 대군을 평양을 향해 출발시켰는데, 6월21일 이었다. 왕경에 남은 노장군 김유신은 출진하는 장수들에게 말했다. “우리는 충신(忠信)으로 나라를 지켰고, 백제는 오만으로 망했으며 고구려는 교만으로 위태롭게 되었다.” 6월25일 고구려의 대곡성과 한성 등 2군 12성이 웅진도독부의 유인원에게 투항하였다. 임진강에서 평양에 이르는 중간에 위치한 대곡성과 한성의 항복으로 신라군의 북진에는 큰 어려움이 없었다. 글필하력이 말갈인 50만명을 이끌고 사수(蛇水)에서 고구려 군사와 한 판 승부를 내려고 했다. 이때 북진한 신라 군사가 홀로 선봉이 되어 고구려 진영을 깨뜨리니 평양의 강한 기세가 꺾이고 사기가 위축되었다. 신라군은 당군과 함께 평양성을 포위하였다. 9월21일 고구려 보장왕은 남산을 보내 수령 98명을 거느리고 흰 기를 들고 이적에게 나아가 항복했다. 그러나 남건은 성을 굳게 지키면서 군사를 보내 싸웠지만 선봉에 선 신라군은 고구려 진영을 깨뜨렸다. 남건은 군사의 일을 승려 신성(信誠)에게 맡겼다. 신성은 소장(小將) 오사(烏沙) 및 요묘(饒苗) 등과 함께 몰래 이적에게 사람을 보내 내응(內應)하기를 청했다. 5일이 지나 신성이 문을 여니,용맹한 신라 기병(騎兵) 500명이 먼저 성에 들어가고,이적의 군사가 뒤따라가 성에 올라 북치고 소리 지르며 불을 질렀다. 남건은 스스로 찔렀지만 죽지 않아 당군에게 사로잡혔다. 김인문 등이 고구려왕을 잡아 이적 앞에 꿇어앉히고 그의 죄를 문책했다. 왕이 두 번 절했다. 신라도 고구려 공격에 동참 668년 9월 평양성 결국 함락
    고구려 망해도 항전 잇따라 유민 저항이 발해 건국으로

    668년 9월 21일. 평양성이 함락되고,보장왕이 적장 앞에 무릎을 꿇음으로서 고구려는 망했다. 수나라 양제의 세 차례 침략과 당나라 태종의 원정에도 당당히 맞서 물리쳤던 동아시아의 강국 고구려가 무너진 것이다. 기원전 37년에 동명왕이 건국했던 나라 고구려는 28대 705년 만에 패망하였다. 당의 이적은 보장왕 및 그 아들 복남(福男)과 덕남(德男), 대신 남건과 부여풍 등 20여만 명을 당으로 끌고 갔다. 고구려의 보장왕 등은 먼저 당 태종의 능인 소릉(昭陵)에 바쳐졌다가 12월7일 함원전(含元殿)에서 고종에게 다시 바쳐졌다. 11월5일 신라 문무왕은이 고구려 포로 7000명을 이끌고 서울 경주로 돌아왔다. 다음 날 6일에 문무 신료를 이끌고 선조묘(先朝廟)에 배알하고 아뢰었다. “삼가 조상들의 뜻을 이어 당나라와 함께 의로운 군사를 일으켜 백제와 고구려에게 죄를 묻고 원흉들을 처단하여 국운이 태평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감히 고하오니, 신이시어 들으소서.” 669년 2월21일. 신라 문무왕은 교서를 내렸다. “지난날 신라는 두 나라 사이에 끼어 북쪽을 정벌하고 서쪽을 침공하여 잠시도 편안한 때가 없었다. 병사들의 해골은 들판에 쌓였고 몸과 머리는 서로 떨어져 먼 곳에 뒹굴게 되었다. 선왕께서는 백성들이 참혹하게 해를 당함을 불쌍히 여겨 천승의 귀하신 몸을 생각지 않으시고 바다를 건너 중국에 들어가 조회하고 황제께 군사를 청하였다. 이는 본래 두 나라를 평정하여 영원히 싸움을 없애고 몇 대에 걸쳐 깊이 쌓인 원수를 갚으며 백성들의 가냘픈 남은 목숨을 보존하고 자 하심이었다. 선왕께서 백제는 이미 평정하였으나 고구려는 아직 멸망시키지 못하였는데 과인이 평정을 이루려던 과업을 이어받아 마침내 선왕의 뜻을 이루게 되었다. 지금 두 적국은 이미 평정되어 사방이 편안하고 조용해졌다.” 당나라는 평양성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설인귀에게 2만의 병력을 주어 주둔하게 했다. 고구려 때의 5부 176성 69만호를 9도독부 42주 100현으로 재편했다. 669년 4월에는 고구려 유민 중에서 호민(豪民) 3만8200호를 회수(淮水)의 남쪽과 산남(山南) 및 경서(京西) 여러 주의 텅 빈 땅으로 강제 이민시키기도 했다. 고려 유민들 중에 당나라에 항거하는 사람이 많았기 때문이다. 669년 2월 이적이 고구려의 여러 성에 대해서 보고한 기록에는 압록강 이북에는 아직 항복하지 않은 11성과 도망한 7성이 있었다고 한다. 고구려는 망했지만 모두가 쉽게 항복하지는 않았다. 670년 3월 신라 설오유(薛烏儒)가 고구려 고연무(高延武)와 함께 각각 1만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개돈양(皆敦壤)에 이르렀고 4월4일 그곳에 기다리고 있던 말갈군과 싸워 크게 이겼다. 이 해 6월 고구려의 수임성(水臨城)의 대형 검모잠(劍牟岑)이 유민들을 모아 패강 남쪽에 이르러 당나라 관리와 승려 법안(法安) 등을 죽이고 신라로 향하였다. 서해 사야도(史冶島)에 이르러 고구려 대신 연정토의 아들 안승(安勝)을 만나 한성으로 맞아들여 임금으로 삼고, 다식(多式) 등을 신라에 보내 고하였다. “우리나라의 선왕이 도를 잃어 멸망당하였으나 지금 저희들은 본국의 귀족 안승을 맞아 임금으로 삼았습니다. 바라건대 대국을 지키는 울타리가 되어 영원히 충성을 다하고자 합니다.” 신라 국왕은 그들을 익산의 금마저(金馬渚)에 살게 하였다. 이를 보덕국(報德國)이라고 하였다. 요동지방의 부흥운동으로 당에서는 안동도호부를 신성으로 옮겨야 했다. 677년에는 보장왕을 요동도독조선왕으로 봉하여 안동도호부에 부임토록 해서 유민들을 무마하게 했지만,오히려 보장왕은 말갈과 통하며 부흥운동을 하다가 공주로 소환되었다. 그 손자 보원(寶元)도 마찬가지였다. 당에 대한 고구려인의 저항의식은 발해의 건국으로 이어졌다
    법보신문 Vol 1104         김상현 전 동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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