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7세기 한반도

24. 백제의 부흥운동

浮萍草 2013. 9. 7. 17:22
    부흥군 규합 10일만에 3만명 참여 … 내부 분열로 쇠퇴
    재산약탈에 인명살상까지 당나라 군사 노략질 극심
    흑치상지 등 부흥군 조직 이례성 포함 20여 성 합류

    백제부흥운동의 구심점이었던 주류성의 위치는 오늘
    날 부안 변산 일대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사진은 주
    류성이 있던 곳으로 전해지는 부안 능가산 개암사. 이 절
    은 백제 무왕 때 창건됐으며, 대웅전이 보물 제292호로
    지정돼 있다. 문화재청 제공
    비성을 함락한 당나라 군사의 노략질은 극심했다. 소정방은 늙은 의자왕을 가두고 군사를 풀어 크게 노략질했다. 사람과 짐승을 가리지 않을 정도였다. 당군의 재산 약탈,부녀자 겁략,인명의 살상 등은 극도의 불안과 공포로 몰아넣었다. 이를 목격한 백제의 흑치상지(黑齒常之)는 좌우의 우두머리 10여 명과 함께 달아나 임존성으로 갔다. 키가 7척이 넘었고 날쌔고 용감하며 지략이 있었던 흑치상지, 풍달군 (風達郡)의 군장(郡長)이었던 그는 사비성이 함락될 때 무리를 이끌고 당군에 항복했었다. 그러나 당군의 노략질에 분개한 그는 임존성(任存城)으로 가서 부흥군을 규합했던 것이다. 백제 부흥군은 열흘이 안 되어 3만명이나 모였다. 660년 8월26일 소정방이 이끄는 당군이 임존성을 공격했다. 복신(福信)과 승려 도침(道琛),그리고 흑치상지는 성을 굳건히 지켰다. 이들은 백제 부흥군을 이끈 중심인물이었다. 도침은 영잠장군(領軍將軍),복신은 상잠장군(霜岑將軍)이라고 불렀다. 이들이 이끄는 부흥군은 곧 200여 성을 회복했다. 이 외에 달솔(達率) 여자진(餘自進)은 중부 구마노리성(久麻怒利城)에 웅거하며 흩어진 군사들을 이끌어 모았다. 나라 사람들은 이들을 존경하여 좌평(佐平) 복신,좌평 자진이라고 했다. 660년 9월3일. 소정방은 1만2000명의 포로를 이끌고 당으로 돌아갔다. 유인원(劉仁願)이 군사 1만명을 이끌고 사비성을 지켰는데,신라의 왕자 인태도 7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사비성에 주둔했다. 660년 9월23일부터 11월5일까지 복신이 이끄는 부흥군이 사비성을 포위 공격했다. 부흥군은 사비 남쪽 고개에 4~5개의 책(柵)을 세우고 사비성을 포위 하면서 주변의 성읍을 초략했는데 이례성(尒禮城) 등 20여 성이 부흥군에 합류했다.
    부흥군은 무열왕이 이끄는 신라군과 싸워 수천명의 희생자를 내었다. 661년 3월로부터 4월에 걸쳐 신라군을 맞아 싸운 두량윤성 전투에서는 부흥군이 승리했다. 대당장군(大幢將軍) 품일(品日) 등 11명의 장군이 거느린 신라군과의 전투에서 승리함으로서 백제유민들의 많은 호응을 얻을 수 있었다. 661년 복신이 거느린 부흥군은 강 동쪽 땅을 공격했다. 아마도 신라로부터 당군에게 공급되는 군량미를 차단하기 위한 공격이었을 것이다. 이에 웅진에 있던 당나라 군사 1000명이 부흥군을 공격하다가 전멸하기도 했다. 661년 9월 무렵 복신 등은 일본에 있던 왕자 부여풍(夫餘豊)을 맞아다가 왕으로 삼았다.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은 어린 나이에 왜로 보내졌다가 660년 10월 복신이 왜의 조정에 환국을 요청하여 군사 5000명의 호위를 받으며 이때 귀국했던 것이다. 의자왕의 적자 부여풍을 맞이함으로서 부흥운동의 구심력을 확보한 셈이었다. 이들은 주류성(周留城)을 근거지로 삼아 부흥운동을 전개했다. 주류성의 위치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다. 일본서기에서 묘사하고 있는 주류성은 척박한 자갈밭으로 농사를 지을 수 없고 높고 험준한 산협을 끼고 있으며 바다와 멀지 않은 곳인데,복신이 몸을 숨기던 동굴이 있는 곳이었다. 이러한 여러 조건을 감안하여 부안의 변산 일대를 주류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웅진성에 주둔하고 있던 유인원과 유인궤 등은 부흥군에 둘러싸여 있는 형편이었다. 신라로부터 군량을 지원받는 일도 어려웠다. 이에 당 고종은 그들에게 발을 빼서 신라로 가거나 아니면 배를 띄워 돌아오라는 내용의 칙서를 보냈다. 장수들은 모두 당나라로 돌아가고자 했다. 이 때 유인궤가 말했다. “지금 한 개의 성을 가지고 적들의 중앙에 있는데,움직이다가는 바로 잡혀서 포로가 될 것이며,신라로 들어간다고 해도 고삐에 매인 손님 신세다.” 백제의 부여풍과 복신 등은 원조마저 끊어진 외로운 성의 유인원 등에게 사신을 보내어 말했다. “대사(大使)께서는 어느 때에 서쪽으로 돌아가려 하는지, 마땅히 재상을 파견하여 전송하겠소.” 유인궤는 틈을 보아 신라의 양식 운반로를 열고 본국에 증원군을 요청했다. 고종은 이 요청을 받아들여 증원군을 파견했다. 663년 7월에 우위위장군(右威衛將軍) 손인사(孫仁師)가 이끄는 7000명의 군사가 덕물도를 거쳐 웅진도독부로 왔다. 이때 부여융이 함께 왔는데, 당 고종은 그를 웅진도독부의 도독으로 삼아서 보냈던 것이다. 7월17일. 신라의 문무왕은 김유신 김인문,김천존,죽지 등의 장군을 거느리고 백제 부흥군 토벌에 나섰다. 백제 부흥군의 내부에 내분이 일어났고 내분은 부흥군의 와해를 불러왔다. 복신과 도침 사이에 불화가 생겨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 무리를 합쳐 세력이 매우 컸고,권력을 독차지 했다. 복신과 부여풍 사이에도 갈등이 생겨났고 불신의 골이 깊어졌다. 복신은 부여풍을 제거하려고 병을 칭하고 문병하러 오는 부여풍을 기다려서 죽이려 했다. 이 음모를 눈치 챈 부여풍이 측근을 규합하여 기습적으로 복신을 공격했다. 일본서기에는 복신의 최후에 대해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백제왕 풍장은 복신이 모반의 마음을 가졌다고 의심하여 손바닥을 뚫고 가죽으로 묶었다. 그리고는 여러 신하들에게 복신의 처결에 대해서 물었다. 복신의 죄가 이와 같으니 목을 베는 것이 좋은지 아닌지를. 이에 달솔 덕집득이 말했다. “이 악한 죄인을 풀어주어서는 안 됩니다.” 복신이 덕집득에게 침을 뱉으며 말했다. “썩은 개와 같이 어리석은 놈.” 왕이 시종하는 병졸들로 하여금 목을 베어 소금에 절이도록 하였다. 이렇게 부여풍은 복신을 죽였다. 적진 앞에서의 내분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663년 8월13일. 주류성의 부여풍은 일부 왜군과 백제 부흥군을 거느리고 왜국의 지원군을 맞이하기 위해 백강구(白江口)로 향했다. 바로 그날 신라군은 주류성 부근에 도착하였고 17일에 성을 에워싸고 공격했다. 바로 이날 당나라 병선 170여척은 백강구에 이르러 진을 쳤다. 27일 왜의 병선 400척이 백강구에 이르렀는데 이들 병선에는 왜의 선발대장 이호하라노기미오미(蘆原君臣)가 거느린 1만여명의 수군이 타고 있었다. 강어귀 언덕에는 백제의 기병이 포진하여 왜선을 지켰다. 다음 날인 28일 일대 접전이 벌어졌다. 신라 기병이 백제 기병을 공격했고 왜의 수군이 당의 수군에게 돌진하였다. 이 날 백강구 전투 상황을 일본서기에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일본 장수들과 백제왕은 기상을 살피지 않고 서로 말했다. “우리들이 앞 다투어 싸우면 저들이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 백제왕으로 ‘부여풍’ 등극 당·신라에 맞서 적극 항전
    적진 앞에 두고 내분 치열 “흑치상지는 역사적 죄인”

    이리하여 중군의 군졸들을 이끌고 대오가 어지럽게 나아가 굳게 진치고 있는 당군을 공격하였다. 당군이 바로 좌우에서 배를 협공하여 에워싸고 싸우니 잠깐 사이 일본군이 계속 패하여 물에 빠져죽는 자가 많고 배가 앞뒤를 돌릴 수 없었다. 에치노다쿠쓰가 하늘을 우러러보며 맹세하고 분하여 이를 갈며 성을 내며 수십 명을 죽이고 전사하였다. 구당서 ‘유인궤전’에 의하면,이날 하늘에는 연기와 화염이 가득하였고,바다불이 모두 붉게 물들었다고 한다. 당의 수군은 바람의 방향을 이용하여 화공으로 왜선을 격파했던 것이다. 이때 백제왕 풍장이 몇 사람과 함께 배를 타고 고구려로 몸을 피했다. 백강구 전투에서 부흥군과 왜군이 패배하고 부여풍이 고구려로 피신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주류성의 부흥군과 왜군도 항거할 힘을 잃었다. 왕자 충승(忠勝)과 충지(忠志) 등은 무리를 이끌고 항복하였다. 부여풍의 숙부 충승은 백제 멸망 전에 일본에 있다가 백제가 망하자 부여풍과 함께 귀국하여 부흥운동에 참여했었다. 흑치상지와 사타상여(沙吒相如)도 당군에 항복하였다. 9월1일이었다. 지금의 예산군 대흥면 상중리와 광시면 동산리 사이에 봉수산(鳳首山 :484미터) 정상에 임존성이 있었다. 주류성이 함락된 뒤에도 임존성(任存城)의 지수신(遲受信)만은 항복하지 않았다. 663년 10월21일부터 11월4일까지 신라군은 임존성을 공격했다. ‘김유신전’에는 30일이나 공격했다고 한다. 임존성은 지세가 험하고 성이 튼튼하며 또 양식도 많아서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문무왕이 친히 대군을 거느리고 참여한 공격이었지만 이기지 못하고 군사를 돌려야 했다. 당나라 장수 유인궤는 백제 부흥군에서 활동하다가 당군에 항복한 흑치상지와 사타상여로 하여금 임존성을 공격하도록 했다. 흑치상지와 사타상여에게 무기와 식량을 주어 임존성을 공격하게 하려는 유인궤의 계획에 대해 당의 손인사는 반대했다. 이들을 믿을 수 없다는 이유 때문이었다. 그러나 유인궤는 이들 두 사람은 충성스럽고 용맹하며 꾀가 있다고 하면서 이들로 하여금 임존성을 공격하도록 했다. 흑치상지와 사타상여,이들은 지수신과 함께 임존성을 지키던 백제 부흥군의 장수였다. 그러나 이들은 당군의 회유를 받아 지수신을 배신하고 당군에 투항했었고 이제는 다시 옛 동지를 공격하는 선봉에 서게 되었다. 이들은 임존성의 부흥군 상황을 잘 알았다. 임존성은 이들이 이끄는 당군에게 함락되었다. 최후까지 임존성을 지키던 지수신은 미쳐 가족도 구하지 못한 채 고구려로 피했다. 흑치상지는 당나라로 가서 벼슬했다. 여러 차례 정벌에 종군하여 많은 공을 세우고 벼슬과 상을 특별히 받았다. 그러나 단재는 평했다. “흑치상지는 백제를 멸망시킨 제2의 죄인이다.” 임존성이 함락된 이후에도 백제 부흥운동의 여진은 있었다. 사비산성(泗沘山城)의 백제 부흥군은 664년 3월에 난을 일으켰다. 웅주도독(熊州都督)이 병력을 출동시켜 공격했지만 여러 날 동안 사람과 물건을 분별하기 어려울 정도의 짙은 안개로 싸울 수가 없었는데 김유신에게 은밀한 계책을 물어 이들을 진압할 수 있었다. 이로써 백제 부흥운동은 막을 내렸다.
    법보신문 Vol 1103         김상현 전 동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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