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7세기 한반도

23. 당의 흉계와 신라의 대처

浮萍草 2013. 8. 31. 07:00
    당, 백제 무너지자 한반도 정벌 야욕 노골화
    당 고종 신라병합 밀령 내려 백제 멸망 후 신라공격 시도
    군사적 위협·내부분열 책동 호시탐탐 신라의 허점 노려

    백제 부흥군이 활동하던 충남 예산군 대흥면 임존성터. 예산군 제공
    6 63년 주류성을 함락했지만 아직 임존성의 백제 부흥군은 버티고 있을 때 당의 장수 두상(杜爽)은 말했다. “칙명에 의하면,평정을 마친 후 함께 모여 맹약을 맺으라고 하였다. 비록 임존성 하나가 아직 항복하지 않았지만 곧바로 함께 맹세를 하는 것이 옳다.” 신라와 당 사이에 군사동맹이 이루어지던 648년 당 태종은 김춘추에게 당나라의 입장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지금 고구려를 정벌하고자 하는 것은 다른 까닭이 없고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에 눌려 늘 침략을 받아 편안한 세월을 보지 못함을 불쌍히 여기는데 있는 것이다. 산천과 토지는 나의 탐내는바 아니고,옥백(玉帛)과 자녀도 나에게 있는 것이기에,내가 양국을 평정하면 평양 이남과 백제의 토지는 아울러 신라에게 주어서 영원히 편안하게 하려고 한다.” 이와 같은 당 태종의 말은 한반도 전체를 정벌하고자 했던 그의 야심을 숨기기 위한 사탕발림이었다. 신라의 대당외교의 출발이 국가생존과 직결되는 자구책이었음에 비추어 당의 입장은 한반도의 정벌에 있었다. 이처럼 동상이몽(同床異夢)으로 출발한 나당동맹에는 처음부터 갈등의 불씨가 도사리고 있었다. 이 불씨는 필연적으로 나당간의 갈등과 투쟁을 가져다주었다. 당나라의 한반도 정벌 흉계는 신라의 힘을 빌려 백제와 고구려를 먼저 정벌한 뒤 신라를 삼키려는 것이 아니라 신라와 더불어 백제 를 정벌하고 곧 이어 신라를 공략하고,그 뒤에 고구려를 손아귀에 넣는다는 계산이었던 것 같다. 660년 7월 소정방은 백제를 정복하고 의자왕을 비롯한 1만여명의 포로를 이끌고 당나라로 돌아갔다. 이 해 11월1일 당 고종에게 백제 포로를 바치는 헌부의식(獻儀式)을 가졌다. 고종은 위로하면서 소정방에게 물었다. “어찌하여 내친 김에 신라를 치지 않았는가?” 고종의 소정방에 대한 질문을 통해서 당의 속셈을 읽을 수 있다. 당 현종은 소정방에게 백제를 공략한 뒤에 상황에 따라 신라까지 병합하라는 밀령을 내렸을 가능성이 많다. 그렇지 않고는 고종이 소정방에게 이렇게 힐책하듯 말하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나당 연합군이 백제를 정복한 뒤에 당나라 군사가 여러 차례 신라 공격을 시도했던 것으로도 이 점은 분명해진다. 소정방은 이렇게 대답했다. “신라는 왕이 어질어 백성을 사랑하고 신하는 충성으로 국가를 섬기며,아랫사람들이 윗사람 섬기기를 부형(父兄)과 같이 하기에,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도모할 수 없었습니다.” 이로써 당시 신라인의 단결력은 물론이고 당의 침략 야욕에 대한 대비가 허술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당의 신라 정벌에 대한 흉계는 몇 가지 방법으로 시도되었다. 신라에 대한 군사적인 위협과, 직접적인 정벌 계획 그리고 분열 책동 등이 그것이다. 백제 정벌이 끝난 뒤 소정방은 김유신,김인문,김양도 등에게 백제의 땅을 나누어 주어 식읍(食邑)으로 삼도록 하려 하였다. 그는 세 사람의 공로에 보답하려는 것이라고 했지만, 그것은 계략이었다. 김유신은 이를 단호히 거절하면서 말했다. “우리의 임금이나 온 나라의 신하와 백성들이 원수를 갚게 되어 기뻐하기에 바쁜데,우리들만 홀로 스스로 이익을 챙기는 것은 의리 상 할 수 없다.” 김유신의 말에 나타나듯이, 백제의 땅을 몇 명의 장수에게 식읍으로 나누어 갖도록 종용했던 소정방의 음모는 신라의 내부 갈등을 유도하기 위한 책략이었다. 백제를 멸망시킨 직후 당군은 사비성에 머물면서 은밀히 신라 침공의 음모를 획책하고 있었다. 이를 눈치 챈 신라왕은 여러 신하를 불러 대책을 의논했다. 이때 다미공(多美公)이 말했다. “우리 백성으로 하여금 거짓으로 백제 사람인 것처럼 옷을 입혀서 반역하게 하면 당나라 군사가 반드시 칠 것이니 이로 인하여 싸우면 뜻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김유신은 이 의견에 따르자고 청하였다. 왕은 말했다. “당나라 군사가 우리를 위하여 적을 멸하여 주었는데 도리어 그들과 싸운다면 하늘이 우리를 도와주겠는가?” 이에 김유신은 말하였다. “개는 그 주인을 두려워하지만,주인이 그 다리를 밟으면 무는 것입니다. 어찌 어려운 경우를 당하여 스스로 구원하지 않겠습니까? 청컨대 대왕께서는 허락해 주옵소서.” 이렇게 김유신은 당군과의 결전을 적극 주장했다. 이처럼 신라의 결의가 단단하고 대비가 충실함을 알게 된 당군은 신라 정벌의 야욕을 훗날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이에 당군은 유인원(劉仁願)이 1만 명의 병력으로 사비성을 지키게 하고 돌아갔다. 9월3일이었다. 그 후에도 기회가 있을 때마다 당군의 신라 정벌 야욕은 표출되었다. 당나라가 전함을 수리하여 겉으로는 왜국을 정벌한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신라를 공격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소식에 신라 백성들은 놀라고 두려워서 불안해하기도 했다. 당의 이와 같은 책략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신라의 한성도독(漢城都督) 박도유(朴都儒)에게 백제 여자를 데려다 시집보내고 함께 모의한 뒤에 신라의 병기를 훔쳐내어 한 주를 습격하려는 흉계까지 꾸몄던 적이 있다. 일종의 미인계까지 동원한 당의 음모는 사전에 알려져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지만 사건은 당의 음모가 어떠했던가를 잘 알게 해주는 사례다. 660년 백제정벌 후 당에서는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설치하여 백제의 옛 땅은 당의 지배하에 두었다. 뿐만 아니라 663년 4월에는 신라에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를 두고 문무왕을 계림대도독(鷄林大都督)으로 임명했다. 물론 이것은 당의 일방적인 조치였지만,형식적이라도 신라를 그들의 지배하에 두고자 했던 야심을 들어낸 것이었다. 도독은 각 주의 군사 및 민사를 통할하던 중국 관직인테,당대(唐代)에는 이웃나라를 정벌한 후 그곳에 도독부를 설치하고 기미주의 형태로 통치하였다. 이처럼 당은 동맹국이었던 신라를 전승국으로 대우하지 않았음은 말할 것도 없고,패전국인 백제와 동등한 지위를 인정함으로써 신라의 지위를 격하시키려 노력했다. 당은 신라로 하여금 백제와 함께 맹회(盟會)할 것을 종용했다. 맹서(盟誓)의 의례를 통해 신라와 백제를 화해시킨다는 명분으로 백제 지역에서 신라군을 내몰기 위한 술책이었다. 663년 주류성을 함락했지만 아직 임존성의 백제 부흥군은 버티고 있을 때 당의 장수 두상(杜爽)은 말했다. “칙명에 의하면, 평정을 마친 후 함께 모여 맹약을 맺으라고 하였다. 비록 임존성 하나가 아직 항복하지 않았지만 곧바로 함께 맹세를 하는 것이 옳다.” 동맹국 신라 위상 전면 부정 도독부 설치 등 속국 취급
    김유신, 당나라와 결전 주장 신라 당과 전쟁 준비 본격화

    이에 신라는 임존성이 항복하지 않았기에 백제를 평정했다고 할 수 없다며 맹약 맺는 일의 중지를 청했다. 664년에 다시 당나라에서는 신라가 백제와 맹세하지 않은 것을 질책했다. 이에 신라 국왕은 어쩔 수 없이 664년 2월 김인문과 천존을 웅령(熊嶺)으로 보내 단을 쌓고 당의 칙사 유인원과 백제 부여융이 함께 맹세하고 맹세가 이루어진 곳을 경계로 삼았다. 신라 국왕이 참석하지 않은 맹약의 문제를 의식했는지 당에서는 665년 8월에 다시 칙령을 내려 유인원으로 하여금 신라왕과 백제의 부여융(夫餘隆) 사이에 취리산에서 회맹(會盟)하게 했다. 이를 취리산회맹(就利山會盟)이라고 한다. 전승국인 신라와 패전국인 백제와의 화친맹약이란 신라의 입장에서는 자기의 지위를 격하시키는 일이었다. 그러나 당의 압력에 의해,664년 8월 웅진도독 부여융(夫餘隆)과 신라 문무왕은 당나라 사신 유인원이 입회하는 중에 화친의 맹약을 맺었다. 유인궤(劉仁軌)가 지은 맹약문에는 다음의 내용도 포함되어 있다. “부여융은 그 선조의 제사를 받들고 그 고토를 보전하며,신라와는 서로 의지해 우방이 되어,쌓인 원한을 풀고 호의를 맺어 화친하며 공경히 소명을 받들어 영구히 번속(藩屬)이 되겠다.” 신라도 백제와 같이 당의 속국이 된다는 굴욕적인 표현까지 있었지만,신라로써도 그 당시에는 어쩔 수가 없었던 것 같다. 회맹처(會盟處)인 취리산, 즉 현재의 연미산으로 경계를 삼았다. 그러나 백제는 668년 이봉역표(移封易標)하여 전지(田地)를 침략하고 신라의 노비를 빼앗고 신라의 백성을 유인하여 내지(內地)에 숨겨두고 여러 차례 찾아도 돌려보내지 않았다. 이처럼 패전국인 백제는 당의 비호를 받는데 비해,신라는 당의 심한 견제에 시달리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고구려가 건재하고 백제의 부흥군이 활동하고 있던 당시 상황은 신라의 적극적인 대응을 어렵게 했다. 신라에서는 문무왕 9년(669) 5월에 김흠순과 김양도 등의 사신을 당나라에 파견했다. ‘삼국사기’에 의하면, 이들은 사죄사(謝罪使)였다고 한다. 이듬해 1월에 당 태종은 김흠순의 귀국만을 허락하고 김양도는 옥에 가두었다. 백제의 토지와 유민을 마음대로 취했기에 당 태종이 노한 때문이라고 했다. 양도는 옥에서 죽었고, 당의 신라 침략 계획은 이 무렵부터 구체화되었다. 이와 같은 점으로 보아 신라 사신이 단순히 사죄사로 파견 되었다기보다는 여제 양국의 고토에 대한 신라 측의 태도도 완강했을 것 으로 생각된다. 당나라에 갔던 김흠순이 신라로 돌아온 것은 그 해 7월이었다. 이때 그가 가지고 온 지도에 의하면 백제의 옛 땅을 다시 돌려주라는 것이었다. 이 소식을 접한 신라인들은 당의 흉계에 놀라면서도 당과의 대결을 위한 대비를 서둘렀다. 신라와 당 사이에 군사적으로 충돌하기 이전 백제 멸망으로부터 고구려 정벌에 이르는 약 10년에 가까운 기간 동안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는 갈등과 대립,흉계와 대응 등이 있었다. 그 대립의 원인은 당의 야욕에 기인하는 것이었고 신라는 안으로 당의 야욕에 대비하면서 밖으로는 협력을 해야 했다. 비록 이 기간에 나당간의 군사적 충돌은 없었다고 하더라도,호시탐탐 신라를 정벌하기 위한 허점만을 노리고 있던 당군의 야욕을 견제해야 했던 신라의 고충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었다. 백제 부흥군과의 전쟁,고구려 세력에 대한 견제, 당군에 대한 군량 보급 등을 수행하면서 동시에 당의 야욕에 대비해야 했기 때문 이다.
    법보신문 Vol 1102         김상현 전 동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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