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7세기 한반도

27. 나당전쟁

浮萍草 2013. 9. 28. 07:00
    민족적 위기 모면하고 삼국통일의 대업 완성 
    신라, 당에 맞서 항쟁 선언 당고종, 신라 왕 관직 삭탈 수십만 병력으로 신라 공격 고구려 멸망 후 6년간 지속
    신라의 당 축출은 단순히 신라가 백제 및 고구려의 옛 영토를 지배할 수 있게 됐다는 차원을 넘어 민족적인 정체성을 유지할 수
    있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그림은 매초성전투 기록화. 전쟁기념관 제공
    670년부터 신라와 당 사이에는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다. 고구려 및 백제 옛 땅에 대한 지배권을 차지하기 위한 싸움으로부터 출발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는 신라를 포함하는 한반도 전체를 정벌하려 했던 당의 야욕에 대한 신라의 항쟁이었다. 신라에서는 문무왕 9년(669)에 김흠순과 김양도를 당나라에 사죄사로 보냈다. 신라가 백제 땅을 빼앗아 차지한다는 당의 주장에 대한 해명을 위해서 파견된 사신이었다. 이듬해 봄 당 고종은 흠순의 귀국만을 허락하고 양도는 억류하는 바람에 그는 감옥에서 죽었다. 김양도가 당나라 옥중에서 죽은 670년부터 나당전쟁은 시작되었다. 이해 3월에 설조유(薛鳥儒)가 이끄는 1만 명의 신라군이 고연무(高延武)가 이끄는 고구려 부흥군을 도와서 압록강을 건너 당군을 공격했다. 4월 당에서는 안동도호부 도호 설인귀를 대토번 전선에 투입했다. 669년 9월 토번이 타림분지를 급습해 왔기 때문이다. 7월 설인귀군대는 참패했다. 이 달에 신라는 당의 지배하에 있던 백제의 고토를 공격하여 80여성을 공취하는 성과를 올렸다. 즉 품일(品日),문충(文忠) 등은 63성을,천존(天存),죽지(竹旨) 등은 7성을,군관(軍官),문영(文穎) 등은 12성을 각각 취했던 것이다. 특히 군관(軍官) 등은 당군에 속해 있던 번병(蕃兵)인 적병(狄兵)을 공격해서 7천 급을 베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671년부터 신라의 공세는 보다 적극적이었다. 1월에 군사를 일으켜 웅진 남쪽에서 백제병과 싸웠는데,당주(幢主) 부과(夫果)가 전사했다. 1월에 설구성(舌口城)을 공격하다가 퇴각하던 당군 소속의 말갈병을 쳐서 3백여명을 죽였다. 6월에 죽지(竹旨) 등은 백제의 가림성(加林城) 임천(林川)을 공격하여 벼를 짓밟고, 석성(石城)에서 당군 5300명을 죽였다. 10월 당의 운송선 70여척을 습격,적장과 군사 100명을 사로잡고 무수한 당병을 수장(水葬)시켰다. 당시 당군에 소속된 백제병, 말갈병 등과의 전쟁도 보인다. 6월에 벼를 밟았음은 당군의 군량미 확보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한 전술이었다. 특히 당병 5000여명을 사살한 석성전투는 대단한 전승이었다. 7월에 부여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고 진왕(眞王)을 도독에 임명한 것으로 보아 이때부터 백제의 옛 땅에 대한 지배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신라의 적극적인 공세에 당황한 당나라의 총영 설인귀(薛仁貴)는 당에 거역하지 말라는 내용의 항의문을 7월26일에 보내왔다. 그러나 문무왕은 신라의 입장을 당당하게 밝힌 회신을 보냈는데, 소위 답설인귀서(答薛仁貴書)가 그것이다. 아마도 당대의 문장가 강수(强首)에 의해 씌어졌을 것으로 추측되고,신라인의 자주성이 돋보이는 이 글은 일종의 선전포고라고도 할 수 있다. 매초성전투, 전쟁의 분기점 18회 전투 모두 신라 승리 신라해군도 기벌포서 대승 신라, 한반도 지배 공식화
    672년에도 백제 및 고구려의 옛 땅에서 전쟁은 계속되었다. 1월에는 백제의 고성성(古省城)을 쳐서 이기고 2월에는 백제의 가림성(加林城)을 공격했으나 이기지 못했다. 8월에는 고간(古侃) 등이 이끄는 4만 당병에게 평양 부근의 한시성(韓始城) 및 마읍성(馬邑城)을 빼앗겼다. 이에 신라군은 고구려 부흥군과 합세하여 백수성(白水城)에서 당군과 싸워 수천 명을 죽였다. 그러나 퇴군하는 당군을 추격하다 석문(石門)에서 패해 효천(曉川),의문(義文),산세(山世),능신(能申),두선(豆善),안나함(安那含), 양신(良臣) 등이 전사했다. 이 해 9월에 신라에서는 원천(原川) 등을 당에 파견 고종(高宗)에게 진정표(陳情表)를 보냈다. 이 표문은 백제가 상국(上國)에 고하여 군사를 끌어다가 우리나라를 멸하고 치욕을 갚으려 하기에,급히 이를 쳐서 자존(自存)을 구하다가 억울하게도 흉역(凶逆)의 이름을 뒤집어쓰고 드디어 용서키 어려운 죄에 빠지게 되었다는 내용으로 되어 있다. 이 표문으로 보면,신라의 대당투쟁 초기에는 당군과 직접 전쟁을 하면서도 당나라 조정에는 백제의 부흥군을 치는 것처럼 위장했을 가능성도 있다. 671년 9월부터 이듬해 8월까지의 1년 동안은 나당간의 대결이 소강상태에 있었다. 이기간 동안에 신라에서는 많은 성을 쌓아 당군에 대비하고 했다. 한산주(漢山州)의 주장성(晝長城),사열산성(沙熱山城),충주의 국원성(國原城),북형산성(北兄山城),소문성(召文城),이산성(耳山城), 수야주(首若州)의 주양성(走壤城) 함달군(含達郡)의 주잠성(走岑城),거열주(居烈州)의 만흥사산성(萬興寺山城),압량주의 골쟁현성 (骨爭峴城) 등이 그것이다. 673년 9월 이후에는 백제지역에서의 전투 기록은 보이지 않고,철주(徹州) 등을 파견해 병선(兵船) 100여척을 거느리고 서해를 지키 도록 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아마도 이 무렵에는 백제 옛 영토에 대한 지배권을 신라가 장악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9월 이후 당군이 말갈병 및 거란병과 더불어 북쪽 변경인 임진강 방면을 침략해 왔지만 신라군은 9차례의 전쟁에 모두 승리, 2천여 명을 참살했고,호로,왕봉 두 강에 무수한 당병이 익사했다. 이 전쟁에서 대패한 당군은 크게 자극된 듯 하고,신라 또한 당과 정면 대결하는 계기를 삼았던 것 같다. 이 해 겨울에는 당병이 고구려의 우잠성을,거란,말갈병은 대양성과 동자성을 각각 공취했다. 674년 1월에 당 고종이 신라 정벌을 명하였다. 신라에서 고구려의 부흥군을 받아들이고,백제의 옛 땅을 점거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고종은 신라왕에게 주었던 당의 관직을 박탈하고 당시 당경(唐京)에 머무르고 있던 문무왕의 아우 김인문(金仁問)을 신라왕으로 삼아 귀국케 하고 유인궤(劉仁軌)를 계림도대총관(鷄林道大總管)을 삼고 이필(李弼)과 이근행(李勤行)을 부관(副官)으로 삼아,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정벌하도록 명령하였던 것이다. 신라에서는 한편으로 군사훈련을 강화하여 당의 침략에 대비하고 또 한편으로는 당나라에 사신을 파견하여 사죄하는 등 양면 작전 으로 대응했다. 이해 8월에는 서형산(西兄山) 밑에서 열병(閱兵)했고 9월에는 왕이 영묘사(靈廟寺) 앞길에 행차하여 열병식을 거행하고,설수진의 육진병법(六陣兵法)을 관람했다. 이 육진병법은 당 이정(李靖)이 개발했던 병법인데,설진수가 이것을 익혀 시범 보였던 것은 아마도 당나라의 병법을 자세히 알고 이에 대응하고자 했던 의도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675년에는 신라와 당 사이에 여러 차례 전투가 벌어졌고,신라가 당 세력을 몰아내는 중요한 계기를 잡았던 해다. 2월에 유인궤(劉仁軌)가 이끄는 당병이 칠중성(七重城) 적성(積城)을 공격해와 무너졌다. 또한 당 고종은 이근행(李勤行)으로 안동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로 삼아 신라 침공을 명했다. 당병이 거란, 말갈의 군사와 더불어 침공해 온다는 소식에 접한 신라에서는 9군을 출동시켜 적병을 기다렸다. 이 해 9월 설인귀는 신라의 숙위학생 풍훈을 앞세워 황해도 천성(泉城)으로 침략해 왔는데,문훈(文訓)이 이끄는 신라군이 이들과 싸워 크게 승리했다. 이 전투에서 당군 1400명을 참살하고 전선(戰船) 40척을 빼앗을 뿐 아니라,또한 퇴각하는 당군을 추격해 전마 1000필을 노획하는 전승이었다. 또한 이 달 29일에 유명한 매초성(買肖城)전투가 벌어졌다. 곧 이근행이 지휘하는 20만 명의 당병이 양주(楊州)의 매초성에 이르렀을 때,신라군이 이를 공격,전마 3만3080필을 획득하고 기타 병기도 이와 비슷하게 획득하는 승리를 이루었다. 이와 관련된 전투가 아달성(阿達城),칠중성(七重城),역대성(赤大城),석현성(石峴城) 등지에서 계속되었지만,18회 걸친 크고 작은 전투에서 신라군은 모두 승리하여,적 6047명을 참살하고 전마 200필을 획득했다. 이 매초성전투를 승리로 이끌었던 신라 장수의 이름마저 전해지지 않지만, 전투는 나당전쟁 중에서도 중요한 분기점이 될 정도로 역사적인 것이었다. 당나라 20만 대군을 맞아 싸우던 신라군에게 임전무퇴(臨戰無退)의 기풍이 있었기에 18회의 모든 전투를 승리로 이끌 수 있었다. 아달성의 성주 소나(素那),칠증성의 유동(儒冬),적대성의 탈기(脫起),석현성의 선백(仙佰) 및 실모(悉毛) 등은 모두 끝까지 싸워 목숨을 바쳤던 이들이다. 당군은 매초성전투의 치명적인 패배로 전의를 상실했고,신라는 덕원(德源) 방면에 관성(關城) 및 철관성(鐵關城)을 쌓아,북쪽 육로로 침략해오는 당군을 저지할 수 있는 거점을 확보했다. 매초성의 참담한 패배를 맞본 당나라는 몇 달 후인 676년 2월에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요동성으로 옮겼고,공주의 웅진도독부도 건안성(建安城)으로 옮겼다. 676년(문무왕 16)에도 나당전쟁은 계속되었다. 7월에는 당군이 동해안 통천(通川)의 도임성(道臨城)을 공격함에 현령(縣令)거층지(居層知)가 대적하다가 전사했다. 11월에는 서해에서의 해전이 전개되어,시득(施得)이 신라의 해군을 이끌고 소부리주 기벌포[長項]에서 설인귀가 이끄는 당군과 싸웠다. 신라의 해군은 기벌포에서 22회에 걸친 전투에서 승리,4천여 명을 참살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로써 서해의 이해지(利海伎)까지도 신라가 장악했다. 675년 9월의 매초성전투에서 당의 육군을,그리고 이듬해 11월의 기벌포 해전에서 당의 해군을 각각 크게 격파함으로써 당나라의 오랜 야욕을 꺾을 수가 있었다. 이로써 660년 이래 17년 동안의 지루하던 통일전쟁은 끝났다. 나당전쟁은 고구려 멸망 이후로부터 6년간 계속되었다. 그러나 당이 신라 정벌 야욕을 구체적으로 들어낸 것이 백제 멸망 직후부터였음을 감안한다면,신라의 대당투쟁은 장기간에 걸친 것이다. 때문에 신라의 당 축출은 단순히 신라가 백제 및 고구려의 옛 영토를 지배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 이상의 의의가 있는데,그것은 민족적 위기를 모면하고 삼국을 통일했다는 것이다.
    법보신문 Vol 1106         김상현 전 동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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