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7세기 한반도

26. 사천왕사 창건

浮萍草 2013. 9. 21. 07:00
    “불법으로 백성 보호하고 원적의 외침 물리치리라” 
    670년 의상법사 귀국해서 당의 신라 침략 계획 알려
    명랑법사 제의로 사찰 건립 문두루비밀법으로 적 퇴치

    당나라가 수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침략했을 때 신라 명랑법사가 사천왕사에서 문두루비밀법을 개설하자 거센 풍랑이 일어 당군
    의 배가 모두 침몰했다고 역사서는 기록하고 있다. 사진은 항공촬영한 경주 사천왕사 발굴터. 경주국립문화재연구소 제공

    김상현 전 동국대
    사학과 교수
    나라는 백제와 고구려를 정복한 뒤에 한반도의 정복과 통치라는 본래의 야욕을 분명히 했고,따라서 신라와 당의 충돌은 피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신라에서는 669년(문무왕 9) 5월에 김흠순(金欽純)과 김양도(金良圖)를 사죄사(謝罪使)로 당나라에 파견 하였다. 이듬해 1월 당 고종은 김흠순 귀국만을 허락하고,김양도는 옥에 가두었는데,신라가 백제 토지와 유민을 마음대로 취했기에 당 고종이 노한 때문이라고 했다. 신라 사신을 옥에 가둘 때부터 당의 신라 침략 계획은 구체화되고 있었다. 김흠순과 김양도 등이 당에 가서 갇히고, 당의 고종은 크게 군사를 일으켜 신라를 공격하려고 하였다. 흠순 등이 은밀히 의상(義相)에게 사람을 보내어 이 소식을 전했다. 이 무렵 의상은 장안의 종남산 지상사(至相寺)에 유학하고 있었는데,흠순은 의상으로 하여금 귀국하여 당의 신라 침공 계획을 신라 조정에 알려줄 것을 권유했던 것이다. 의상은 670년에 서둘러 귀국하여 이 소식을 조정에 알렸다. 김양도는 옥중에서 죽고, 7월에 김흠순이 귀국했다.
    이때 김흠순이 전한 당의 계지획정(界地劃定) 계획은 신라로 하여금 백제의 옛 땅을 돌려주라는 것이었다. 당나라에 파견되었던 신라 사신이 김흠순이 아니라 김인문(金仁問)이라는 기록도 있다. 즉 ‘삼국유사’ 문무왕법민조에는 인문으로 되어 있다. 이듬해(670)에 당나라의 고종이 인문(仁問)을 불러서 꾸짖었다. “너희들이 우리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하고서도 우리를 해치려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그를 옥에 가두고 군사 50만 명을 훈련하여 설방(薛邦)을 장수로 삼아서 신라를 공격하려고 하였다. 이때 당나라에서 유학하고 있던 의상법사가 인문을 찾아보았는데,인문이 그 사실을 알리자 의상이 곧 귀국하여 왕에게 아뢰었다. 의상으로부터 당나라의 신라 침공 소식에 접한 신라 조정에서는 한편으로 놀라면서도 정면으로 맞서서 이에 대응했다. 백제의 옛 땅을 돌려주라는 당 고종의 주장을 전해들은 바로 그 달에 신라는 백제 고토에 대한 대대적인 침공을 개시했다. 그리하여 사비성(泗城)과 웅진성(熊津城) 부근을 제외한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의 전 지역을 무력으로 확보했다. 당나라의 신라 침략은 김양도가 옥중에서 죽은 670년부터 시작되어 676년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신라는 대부분의 전투에서 승리했다. 여러 전투 중에서 당의 육군을 괴멸시킨 매초성(買肖城:양주) 전투와 해군을 대파했던 기벌포(伎伐浦:장항) 전투는 더욱 유명하다. 675년에 있었던 매초성 전투에서는 당나라 군사 20만 명을 상대로 18회나 싸워 신라가 모두 승리했고 다음해 기벌포 전투에서는 크고 작은 22회의 전투에서 모두 신라가 승리함으로써 당나라의 오랜 야욕을 꺾을 수 있었다. 이처럼 당나라 군사와 싸워서 신라가 승리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여러 요인이 있었겠지만,신라인의 단결력이야말로 이를 가능케 한 중요한 요인이다. 나라를 지키려했던 신라 사람들의 염원과 의지는 사천왕사(四天王寺)의 건립으로 나타났고 이를 통해서 호국의 염원을 다졌다. 의상으로부터 당의 침략 소식을 전해들은 국왕은 여러 신하들을 모아놓고 방어책을 물었다. 각간 김천존(金天存)이 아뢰었다. “근래에 명랑법사(明朗法師)가 용궁(龍宮)에 들어가서 비법(秘法)을 전수해 왔으니 그를 불러서 물어 보십시오.” 명랑은 632년에 당나라에 들어갔다가 635년에 귀국했는데 당시 명랑은 법력(法力) 높은 고승으로 알려져 있었던 것이다. 명랑이 아뢰었다. “낭산(狼山) 남쪽에 신유림(神遊林)이 있으니 그곳에 사천왕사(四天王寺)를 세우고 도량을 개설함이 좋겠습니다.” 이 때 정주(貞州)에서 사자(使者)가 달려와서 보고했다. “당나라 군사들이 수없이 우리 국경에 이르러 바다 위를 순회하고 있습니다.” 왕이 명랑을 불러서 말했다. “일이 이미 급박하게 되었으니 어찌 하면 좋겠소?” 명랑이 말했다. “채색 비단으로 절을 임시로 지으십시오.” 이에 왕이 채색비단으로 절을 짓고 풀로 오방신상(五方神像)을 만들고 유가명승(瑜伽名僧) 12명으로 하여금 명랑을 우두머리로 삼아 문두루비밀법(文豆婁秘密法)을 짓게 했다. 명랑이 개설했던 문두루비법은‘관정경(灌頂經)’에 의한 것인데 이 경에는 문두루법에 대하여 신기한 위력과 작법 등을 자세히 설 하고 있다. 둥근 나무에 동서남북과 중앙의 오방(五方)을 지키는 오방신(五方神)의 이름을 써넣은 것을 문두루라고 하고,문두루는 큰 위력이 있어서 문두루를 가지고 향하는 곳이면 이르지 않는 복은 없고 또한 모든 악이 물러간다고 했다. 명랑이 문두루비밀법을 행하자 당나라와 신라의 군사가 싸우기도 전에 풍랑이 크게 일어 당나라의 배가 침몰하였다고 한다. 그 후에 절을 고쳐 짓고 사천왕사라 했다. 신유림은 천경림(天鏡林)이나 문잉림(文仍林)과 함께 전통신앙의 성소(聖所)로 신성한 장소였다. 사천왕사를 창건하기 시작한 것은 670년이었지만 이때는 당의 침공으로 인한 급박한 상황이었기에 채색비단을 이용해서 임시로 지었던 것이고 실제로 이 절이 낙성된 것은 679년이었다. 6년간 나당전쟁 기간 동안 매초성전투 등 신라 압승
    전쟁 끝나고 사천왕사 완공 신라 호국의 상징적인 존재

    671년에 당나라가 조헌(趙憲)을 장수로 삼아 또한 군사 5만 명으로써 쳐들어왔는데 그 법을 썼더니 배들이 전과 같이 침몰했다. 이때에 한림랑(翰林郞) 박문준(朴文俊)이 인문을 따라 옥중에 있었는데 고종은 문준을 불러서 물었다. “너희 나라에는 무슨 비법이 있기에 대군을 두 번이나 발하였으나 살아서 돌아온 사람이 없느냐?” 문준이 아뢰었다. “배신(陪臣) 등은 상국(上國)에 온 지가 10여년이나 되었으므로 본국의 일을 알지 못합니다. 다만 멀리서 한 가지 일을 들었는데 상국의 은혜를 두터이 입어서 삼국을 통일하였기에 그 은덕을 갚기 위하여 낭산 남쪽에 천왕사 (天王寺)를 새로 짓고 황제의 만년 수명을 축원하는 법석(法席)을 오래 열었다는 사실뿐입니다.” 고종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여 곧 예부시랑(禮部侍郞) 악붕귀(樂鵬龜)를 신라에 보내어 그 절을 살펴보도록 했다. 왕이 당나라 사신이 장차 올 것이라는 소식을 미리 듣고 이 절을 보여주는 것이 마땅치 않을 것이라고 해서 따로 남쪽에 새 절을 짓고서 기다렸다. 사신이 와서 말했다. “먼저 황제를 축수(祝壽)하는 곳인 천왕사에 분향하겠습니다.” 이에 그를 새 절로 인도하여 보였더니,사신은 문전에 서서,이것은 사천왕사가 아니고 망덕요산(望德遙山)의 절이라고 하면서 끝내 들어가지 않으므로, 국인(國人)이 금 1천 냥을 주었다. 그 사신이 본국에 돌아가서 아뢰었다. “신라에서는 천왕사를 지어 놓고 황제의 수명을 새 절에서 축원합니다.” 이로 인하여 망덕사(望德寺)라고 하였다. 당나라의 사신 악붕귀에게 사천왕사를 보여주지 않기 위해서 이 절의 남쪽에 또 하나의 새로운 절을 짓기도 하고,국인이 그에게 금 1천 냥을 주기까지 했다는 이 기록으로도 신라가 사천왕사를 얼마나 중시했는지 알 수 있다. 사천왕사는 ‘금광명경(金光明經)’의 사천왕품(四天王品)에 그 사상적 근거를 두고 있다. 절 이름도 이로부터 유래되었다. ‘금광명경’은 일찍이 중국,신라,일본 등지로 유포되었는데, 7세기 후반에는 신라에도 유통되고 있었다. 원효는 ‘금광명경소(金光明經疏)’ 8권을 지었고,그의 여러 저술에 이 경을 인용하기도 하였다. ‘금광명경’에서 직접적으로 호국에 대해 설하고 있는 부분은 사천왕품이다. 사천왕은 불법을 지키는 수호신이다. 동쪽은 지국천왕(持國天王),서쪽은 광목천왕(廣目天王),남쪽은 증장천왕(增長天王),북쪽은 다문천왕(多聞天王)이 각각 맡아서 사방을 지킨다고 한다. 경에 의하면, 사천왕은 이 경을 듣는 국왕이나 인민을 편안히 지켜주겠다는 원을 발했다. “우리들 사천왕과 한량없는 귀신들은 언제나 모습을 나타내지 않고 이 경이 유포되는 곳을 따라 옹호하여 난이 없게 하며,또한 이 경을 듣는 국왕이나 인민들을 보호하여 그 환난을 제거하고 모두가 안온하게 하겠습니다. 그리고 타방의 원적(怨賊)을 물리쳐 주겠습니다.” 이처럼 사천왕은 이 경이 유포되는 나라를 지켜서 타방의 원적까지 물리쳐 주겠다고 서원을 발했던 것이다. 그리고 사천왕품에서는 국왕이 행해야 할 호국의 구체적인 방법을 설하고 있다. 국왕이 외침을 막기 위해서는 겸손한 마음으로 이 경을 들어야 한다. 이 경의 정론품(正論品)에서도 국왕이 정법(正法)으로 나라를 다스려야 한다고 강조한다. 만약에 어떤 국왕이, 자기의 몸과 왕후와 궁녀와 왕자들과 궁전을 보호하려 하거나, 그의 영토가 수승(殊勝)하게 하고자 하거나, 또는 갖가지 복덕을 구족하려 하거나,원적의 침입을 막고 모든 근심과 고통을 없애고자 한다면,마땅히 다음과 같이 해야 한다고 사천왕은 말한다. “국왕은 그 마음을 방일(放逸)하거나 산란하게 하지 말 것이며 마땅히 공경하고 겸손한 마음을 내어야 한다. 그리고 궁전을 장엄할 것이며 훌륭하고 깨끗한 옷을 입고 영락으로 장엄할 것이다. 조그마한 자리에 앉아서 스스로 높은 양 하지 않으며,자재(自在)한 생각을 버리고 방탕한 버릇을 여의어야 한다. 또한 겸손하고 교만을 버리고 바른 마음으로 경을 듣고,설법자에게는 부처님과 같은 생각을 내고,궁내의 후비 왕자 등 모든 권속 에게는 자애로운 마음을 내어 평화스러운 낯으로 말할 것이다.” 사천왕이 원적의 외침을 막아준다는‘금광명경’의 호국사상을 배경으로 하여 사천왕사는 건립되었고,신라 조정에서는 사천왕사의 건립을 통해서 호국의 의지를 다졌다.
    법보신문 Vol 1105         김상현 전 동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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