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7세기 한반도

21. 슬픔의 강 공덕의 다리

浮萍草 2013. 8. 17. 07:00
    “오라오라 서러운 인생이여, 공덕 닦으러 오라!” 
    양지스님은 서예·조각 등 기예 두루 통했던 예술가 장육존상 등 조성할 때면 선남선녀들 앞 다퉈 도와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2008년 7월 경주 사천왕사지
    에서 출토된 녹유전(綠釉塼)을 3D 스캔(Scan)장비 등을
    이용해 복원한 도상.섬세한 조각과 생동감이 넘치는 표
    현으로 큰 관심을 모은 녹유전은 신라 고승 양지 스님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
    지(良志)는 7세기 중엽에 활동했던 신라의 고승이다. 대개 그의 행적은 선덕여왕(632~646) 때부터 문무왕(661~680)때에 간간이 보이지만,구체적인 전기 자료는 전하는 것이 없다. 양지는 주로 석장사(錫杖寺)에서 살았다. 이 절의 남쪽으로 신라 왕경(王京)이 내려나 보이기는 해도,시내로부터 꽤 멀리 떨어진 조용한 골자기에 위치한 아담한 절이었다. 지금은 그 절터만이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 뒷산에 있다. 양지가 살던 절을 석장사라고 했던 사연은 이렇다. 그가 지팡이 끝에 포대 하나를 걸어두면,지팡이는 저절로 시주의 집으로 날아갔다. 석장이 흔들리면서 소리 나면,시주는 재(齋)에 필요한 비용을 넣어 주었고 포대가 다 차면 스스로 날아서 돌아왔다. 지팡이를 날려서 재에 필요한 시물(施物)을 보시 받을 수 있었던 양지의 법력(法力),그것은 아무나 흉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아무튼, 이로 인해서 그가 살던 절을 석장사라고 했다는 것이다. 양지는 이 절에서 삼천불(三千佛)을 새긴 전탑(塼塔)을 조성했다. 불상을 새긴 전(塼)으로 쌓아올린 탑은 곧 삼천불이 되었던 것이다. 지금도 불상과 탑을 새긴 전돌이 심심찮게 발견되는데 이는 당시 유물 중 하나다. 양지의 석장사 생활을 일연(一然)은 이렇게 찬(讚)했다. ‘재 마치니 법당 앞의 석장은 한가한데(齋罷堂前錫杖閑) 향로에 손질하여 향을 피운다(靜裝爐鴨自焚檀) 남은 경 다 읽으니 더 할 일없어(殘經讀了無餘事) 불상을 만들어 합장하며 본다(聊塑圓容合掌看).’ 재가 끝났으니 법당 앞에 한가로이 세워져 있는 석장,고요히 향연 피어 오르는 법당. 스스로 조성해 모신 삼천의 불상 향해 합장한다. 더 할 일은 없다. 양지는 서예와 조각 등 여러 기예(技藝)에 두루 통했던 예술가였다. 특히 그는 불보살을 조성하는 뛰어난 조각승으로 유명했다. 영묘사(靈廟寺)의 장육존상과 천왕상(天王像),전탑의 전 등은 모두 그의 작품이었고,또한 사천왕사(四天王寺) 탑 아래의 팔부신장(八部神將)과 법림사(法林寺)의 주불삼존(主佛三尊) 및 좌우의 금강신(金剛神) 등이 그가 조성한 것이었다. 그는 글씨도 잘 써서 영묘사와 법림사의 편액은 그가 쓴 것이었다.
    그의 작품으로 지금까지도 전해지고 있는 이 신장상은 매우 사실적으로 표현된 걸작으로 평가된다. 동국대학교 박물관에서는 양지가 살았던 석장사터를 두 차례 발굴한 바 있다. 그 결과 양지의 작품으로 추정되는 상당수의 유물을 수습했다. 비록 작지만,힘이 넘쳐나는 금강신장상(金銅神將像),유려한 선의 아름다움이 돋보이는 금동관음보살상 등을 비롯하여 탑과 불상이 새겨진 전탑, 전돌 190여 점이 수습되었다. 전돌에 새긴 탑과 불상을 통해 삼천불탑이 있었던 사실을 확인하게 되었고,불상들은 각기 다른 모습으로 표현되고 있어서 자유로운 표현 기법을 알 수 있다. 탑과 불상을 새긴 전돌에 연기법송(緣起法頌)을 새긴 것도 발견되었다. 모든 법이 인연에 따라 생겨나고 없어진다는 연기의 진리를 읊은 게송을 탑상문전에 새겨 넣은 것은 법사리(法舍利) 봉안을 대신 한 것으로 이것은 인도로부터 유래된 것이었다. 영묘사는 선덕여왕의 발원으로 세운 절이다. 원래 연못을 메워서 세운 이 절의 법당은 3층으로 웅장했다. 양지는 주존불 장육존상을 조성할 때 입정(入定)하여 삼매(三昧)에서 본 부처를 그 모형으로 삼았다고 한다. 이는 불상의 본질을 진정으로 관조하고 그 형상을 곡진하게 조각하려는 전신사조(傳神寫照)의 노력을 말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양지가 이 불상을 조성할 때, 왕성의 선남선녀들은 서로 다투어 흙을 날랐다. 그리고 그들은 노래했다.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슬픔 많아라. 슬픔 많은 우리무리여, 공덕 닦으러 오다.’ 이 노래가 곧 향가 풍요다. 불상을 조성할 흙을 나르면서 사람들은 노래했다. 슬픔이 많다고. 그러기에 공덕을 닦기 위해 왔노라고. 많은 슬픔이 있다, 인생살이에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세상에는 슬픔이 많다. 아니 미래에도 슬픔은 있을 것이다. 단순한 슬픔은 아니다. 근원적인 슬픔이다. 그러기에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비구들이여 이것이 고(苦)의 성스러운 진리다. 마땅히 알라. 태어남은 고다. 늙음도 고다. 병은 고다. 죽음도 고다. 미운 사람과 만나는 것도 고요,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지는 것도 고요, 욕심나는 것을 얻지 못 하는 것도 고다. 통틀어 말한다면, 이 인생은 바로 고 그것인 것이다.” 눈먼 모친 봉양하는 처녀 아들 귀환 기도하는 부모 가난한 민중들 서러운 삶 불교 가르침서 위안 삼아
    이는 사제(四諦) 중의 고제(古諦)에 대한 설명으로 팔고(八苦)를 예로 들었다. 삶의 현장에는 어려운 일 많고, 만족스럽지 못한 일 많다. 우리에게 슬픔은 불현듯 닥치고 삶은 무거운 짐이 될 수도 있다. 어찌 옛 사람에게는 슬픈 사연이 없었으랴. ‘ 삼국유사’, 이 책의 이곳저곳에도 옛 사람들의 한숨과 눈물, 그리고 아픈 사연들이 묻어 있다. 7세기 후반 신라 왕경 만선북리(萬善北里)에 살았던 한 과부는 나이 열두 살까지 말도 못하고 일어나지도 못하는 그래서 사복(蛇福) 이라 이름 지었던 아들을 키웠다. 눈물 흘렸다는 기록 없다고 눈물 없이 키웠겠는가? 경덕왕(742~765) 때 한기리(漢岐里)의 여인 희명(希明)은 눈이 먼 다섯 살 어린 아이를 안고 분황사의 벽화 천수관음상(千手觀音像) 앞에서 빌고 있었다. 제발 우리 아이 눈 뜨게 해주십사고. 바다 장사꾼을 따라 다니던 아들 장춘(長春) 그 아들 소식 끊긴 지 오램에 애간장 태우던 우금리(金里)의 가난한 여인 보개(寶開). 민장사(敏藏寺) 관음보살 앞에서의 7일 기도, 간절한 여인의 기도로 아들은 돌아왔다. 745년(경덕왕 4) 4월8일 불탄일이었다. 천여명의 낭도들과 함께 금란(金蘭)을 유람하던 화랑 부례랑(夫禮郞)이 말갈적(靺鞨賊)에게 잡혀 갔다. 693년(효소왕 2) 3월11일의 사건이다. 양친은 백률사 부처님 앞에서 기도했다. 여러 날을 간절히 빌었다. 아들의 무사귀환을…. 가난한 여인이나 진골귀족의 부모나 자식 걱정하는 마음에 어찌 차이가 있었겠는가? 군대에 복역하는 틈틈이 품을 팔아 홀어머니를 봉양하던 문무왕(661~681) 때의 청년 진정(眞定)은 가난으로 장가도 못 갔다. 흥덕왕(826~836) 때의 모량리(牟梁里) 손순(孫順)은 품팔이로 노모를 봉양했다. 어린 아이가 노모의 음식을 빼앗아 먹자 어머니를 배불리 먹게 하기 위해서 살아 있는 아이를 매장하기로 부부는 결정한다. 효성이 지극하다고 어찌 이들에게 아픔까지 없었으랴. 진성여왕(887~897) 때 분황사 동쪽 마을에 살던 스무 살 처녀는 걸식으로 눈 먼 어머니를 몇 해나 봉양했다. 흉년으로 걸식도 어려워지자 남의 집 품팔이로 봉양하던 어느 날 모녀는 껴안고 울고 있었다. 백 번이나 기운 옷을 입었기에 백결선생(百結先生)으로 불렸던 이의 가난은 어떠했으며 흉년 드는 해면 자식을 팔아 끼니를 때우던 백성들의 아픔은 또 어떠했겠는가? 슬픔은 그림자처럼 우리를 따르고, 옛날이나 지금이나 슬픔의 강은 깊다. 이 강물 어떻게 건널 것인가? 신라의 선남선녀들은 흙을 나르면서 노래했다. 불상 빚어 만들 흙을 나르면서. “오라오라. 서러운 인생이여, 공덕 닦으러 오라.” 삶은 냉엄한 현실. 슬픔의 현실을 눈물로 해결할 수는 없다. 서러운 인생 역정은 공덕을 닦아 그 방향 바꿀 수 있을 뿐. 그러기에 “서러운 인생이여 공덕 닦으러 오라”고 노래하는 것이다. 공덕으로 슬픔의 강을 건너려는 향가 풍요는 미타찰(彌陀刹)에서의 만남을 위해 슬픔의 눈물 그치고 도 닦으며 세월을 기다리겠다는 ‘제망매가(祭亡妹歌)’와 통하고,월명(月明)의 이 가락은 천년을 뛰어 건너 만해(萬海)의 시와 맞닿는다.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 배기에 들어부었습니다.” 슬픔도 힘이든가? 그 힘을 새 희망으로 전환할 수 있음은 분명 도력이다. 슬픔의 강 건너 저쪽 언덕 피안(彼岸)으로 건너 줄 다리, 그것은 공덕이다. 공덕은 공허한 빈말이 아니다. 참고,노력하며,베푸는 등 구체적인 실천으로만 쌓을 수 있는 것이 공든 탑이다. 우리를 피안으로 건너 줄 공덕을 바라밀이라 한다. 도피안사(到彼岸寺)에는 피안에 이르려는 염원이 깃들어 있듯이,불국사에서 백운교와 청운교 등의 다리를 건너 불국으로 갈 수 있게 설계했듯이 이쪽 차안으로부터 저쪽 피안의 세계로 건너가는 다리가 있다. 6바라밀이 그 다리다. 곧 보시(布施),지계(持戒),인욕(忍辱),정진(精進),선정(禪定),지혜(智慧)가 그것이다. 인욕과 정진과 보시 등의 공덕,그 공덕은 슬픔의 강 건너 주는 다리가 된다. 험한 세상의 다리는 인욕이며, 정진이며, 보시며, 지계며, 선정이며, 지혜다.
    김상현 전 동국대
    사학과 교수
    늙고 나이 들고 태어난 지 오래 되었고 오래 살았고 생의 마지막에 이르렀고 120살 된 두 바라문이 세존께 와서 가르침을 청했다. “고따마 존자께서 저희들을 훈도해 주시고 저희들을 가르쳐주십시오.” 세손께서는 말씀하셨다. “집이 불탈 때 가져나온 소유물과 타지 않은 것 그것은 집 주인에게 크게 쓸모가 있듯이 그와 같이 세상이 늙음과 죽음에 불탈 때 보시로써 자신을 지켜라. 이미 보시한 것은 잘 지킨 것이니라. 이생에서 몸과 말과 마음으로 자제하고 살면서 공덕을 지은 것,그것이 죽을 때 그에게 행복을 가져오리라.” ‘앙굿따라 니까야’ 중의 ‘두 바라문경’ 가르침이다. 부처님은 말씀하셨다. “참기 어려운 것을 참는 것이 진실한 참음이요,누구나 참을 수 있는 것을 참는 것은 일상의 참음이다.” 이는 ‘잡보장경’ 중의 한 구절이다. 7세기 신라 원효는 말씀했다. “참기 어려운 것을 능히 참는 것, 그것이 보살행이다(難忍能忍菩薩行)”
    법보신문 Vol 1100         김상현 전 동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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