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7세기 한반도

17. 머나먼 천축의 길

浮萍草 2013. 7. 20. 07:00
    보리심 등불삼아 바다를 건너고 사막을 넘다 
    의정의 ‘서역구법고승전’에 신라출신 구법승 7명 등장 7세기 전반부터 성지 순례 나란타대학서 유학하기도
    돈황과 타클라마칸 사막을 지나 위치한 고창국. 수많은 구법승들이 거쳐갔던 고창국은 이제 그 잔해만이 남아 있다. 법보신문
    자료사진
    리심은 큰 바람과도 같고 활활 타오르는 불꽃과도 같다. 선재동자가 진리를 구하기 위해서 칼산에 올라가 불속으로 몸을 던지듯, 구도자는 보리심을 등불삼아 바다를 건너고 사막을 넘는다. 이미 죽음까지도 각오한 구도자에게 두려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신라의 구법승들도 역시 그랬다. 7세기 전반부터 그들은 히말라야산맥을 넘었고 천축의 여러 성지를 순례했으며 나란타대학에서 유학하기도 했다. 당나라의 의정(義淨, 635~713)은‘대당서역구법고승전’에 구법승 61명의 전기를 수록했는데 이 중에는 신라 구법승 7명과 고구려승 1명이 포함되어 있다. 즉 아리나발마(阿離那跋摩)·혜업(慧業)·현태(玄太)·현각(玄恪)·혜륜(慧輪)·형유(玄遊) 등이다. 현조(玄照)는 두 번이나 천축을 여행했고, 멀고도 험한 길 떠돌기 30여년 만에 이역 땅에서 입적한 당나라의 대표적 구법고승 중의 한 분이다. 그는 636년경에 난주(蘭州)를 출발 천축을 여행하고 657년에 낙양으로 돌아왔는데, 이것이 1차 구법여행이다. 그는 다시 657년에 낙양을 출발하여 천축으로 갔는데 상원(上元) 연간(674~675)에 암마라발국(菴摩羅跋國)의 신자사(信者寺)에서 60여세로 구법과 교화의 꿈을 접었다. 그런데 현조의 1차 구법에는 신라의 현각(玄恪)이 동행했고 2차 구법에는 신라의 혜륜(慧輪)이 수행했다. 현조 일행의 1차 서역구법 의 행로는 이렇다. 636년경 난주를 떠나 북로를 택하여 서역으로 향하였다. 그들은 유사(流沙)를 지나 철문(鐵門)에 이르렀고,철문을 지나 힌두쿠시의 향지(香池)에 이르렀고,향지를 떠나 총부(葱阜)를 넘었다. 그들 일행은 타클라마칸의 큰 사막을 건넜다. 철문은 갈상나국의 동남쪽에 있는 석회암의 단벽(斷壁)을 통과하는 좁은 길로 양측의 현애(懸崖)가 6백척 이상에 달하는 자연의· 관문이다. 이 철문을 지나면 힌두쿠시령을 넘어 북인도로 향한다. 향지는 중앙아시아와 인도를 가로막고 있는 설령(雪嶺) 중의 향산(香山) 남쪽에 자리 잡고 있다는 못이다. 총부는 총령이라고도 하는데, 일반적으로는 파미르고원을 가리킨다. 현조 일행이 지나간 총부는 티베트의 서쪽 경계선인 서북히말라야의 산계(山系)를 지칭한 것이다. 그들은 속리(速利)를 거쳐 토가라를 지나 멀리 호인(胡人)의 나라를 뚫고 티베트에 이르렀다. 티베트에서는 문성공주(文成公主)의 전송을 받으면서 북인도로 향하였다. 문성공주는 당 태종이 641년에 티베트의 왕 손챈감포에게 시집보낸 당나라 종실의 여자였다. 따라서 현조를 동행한 신라의 현각이 티베트를 통과한 시기는 641년 이후가 된다. 현각 등은 티베트를 지나 쥬룬다국를 향했다. 쥬룬다국은 서북인도의 인더스강 상류의 산악지대에 있던 나라로 훗날 혜초는 쟈란달라국이라고 했다. 현각 스님은 인도순례 중 대각사서 병에 걸려 입적 혜륜 스님도 불경들 필사 고향으로 끝내 못 돌아와
    현각 일행은 쥬룬다국에 도착하기 전에 멀고도 험한 길에서 도적에게 잡혔다. 여행을 계속할 수 있는 길도 막히고 호소할 곳도 없었다. 현조는 여러 거룩한 신에게 빌었더니 꿈속에서 도움이 있음을 깨달았다. 잠에서 깨어보니 도적의 무리들은 모두 잠들어 있었다. 꿈속에서의 가르침에 따라 도적무리들로부터 가만히 빠져나와 겨우 그 난을 면할 수 있었다. 현조 일행은 쥬룬다국에 4년간을 머물렀다. 국왕으로부터 깊은 환영과 존경을 받게 되어 이곳에 머물러 공양을 받으면서 경률(經律)을 배우고 범문(梵文)도 익혔다. 당시 이 나라에서는 인도 전역의 승려에 관한 업무도 맡았을 정도로 불교가 크게 융성하고 있었다. 그 후 이들은 부다가야의 대각사(마하보디사)에 이르러 4년을 지냈다. 현각이 현조 등과 더불어 대각사에 도착한 때는 649년경이었다. 현각이 대각사를 참배한 시기와 현장이 이 절을 찾았던 때는 비슷하다. 따라서 현각도 이 절의 불사리에 참배하면서 감격했을 것이다. 그러나 현각은 대각사에 이르러 예경(禮敬)하는 소원을 풀고서 병에 걸려 입적했다. 고작 40을 넘긴 나이였다. 혜륜은 일찍이 신라에서 출가하여 승려가 된 뒤에 불교유적을 순례할 뜻으로 당나라로 건너갔다. 그는 뱃길로 복건(福建)에 상륙한 뒤에 육로로 걸어서 장안에 도착하였다. 그 후 고종의 칙명으로 인도로 가게 된 현조의 시자가 되어 수행하게 되었다. 고종은 현조에게 카시미르국으로 가서 장년 브라만,즉 로카야타파(유물론학파)의 방사(方士)를 찾아오도록 하였던 것이다. 현조가 혜륜 등과 함께 2차로 천축으로 향한 것은 665년이다. 그들은 타클라마칸의 대사막을 건너 카시미르로 넘어가는 카로코름산계에 있는 적석령(磧石嶺)을 넘어갔다. 좁고 구불구불하며 높이가 고르지 않고 험악하여 걸어서는 갈 수 없는 산길을 기어서 오르고 깊은 계곡에 노끈으로 걸어놓은 흔들 다리 위를 온몸을 노끈에 매달려 건너갔다. 티베트에서는 도적을 만나서 목숨을 내놓았으나 살아남은 일도 있고 야만족의 강도들과 마주쳐 겨우 목숨을 건져낸 일도 있었다. 그들이 북인도의 경계에 이르렀을 무렵에 로카야타를 인도하고 오는 당나라 사신을 만나게 되었다. 이 로카야타는 현조와 그 아랫사람 수 명으로 하여금 다시 서인도의 라다국(羅多國)에 가서 장년약(長年藥)을 가져오게 하였다. 이 때문에 현조 일행은 인도 서북의 카시미르국으로 향하던 발길을 돌려 서인도의 라다국을 향하였다. 이에 그들은 바르흐를 지나 나바비하라에서 여러 성적(聖跡)을 찾았다. 현조 일행은 가필시국에 이르러 석가모니의 정골(頂骨)에 예배하고 향화를 갖추어 바쳤다. 가필시국은 오늘날의 아프가니스탄의 카불 북에 있는 베그람을 수도로 하고 있던 나라로 ‘왕오천축국전’에서 말하는 계빈국이다. 이들 일행은 다시 신도국을 지나서 라다국에 도착하였다. 신도국은 지금의 파키스탄의 사아완에 도읍하고 있던 대국으로 불교가 성했다. 라다국에서는 왕의 예우와 존경을 받으면서 4년 동안 수행하였다. 그리고 이들은 부다가야의 금강좌(金剛座)를 참배하였다. 그런데 이들 일행이 라다국으로부터 금강좌에 이르는 약 2년간의 여정은 분명하지 않다. 남인도의 여러 곳에서 여러 잡약(雜藥)을 구했다고 하지만 아마 불교유적도 두루 참배했을 것이다. 금강좌를 참배한 뒤에 나란타사를 방문한 이들은 의정과도 만났다. 이 절은 현조가 전에 3년 동안이나 공부한 적이 있던 곳이다. 현조 일행은 당나라로 돌아가고자 했다. 그러나 네팔로 통하는 길은 티베트가 가로막고 있어서 지나갈 수가 없고 가필시로 가는 길은 사라센 사람들이 침입하여 통과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에 현조는 영취산(靈鷲山)에서 수행하고 죽림정사(竹林精舍)에서도 머물러보려고 하였다. 현조는 중부 인도의 암마라발국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는 일찍이 이 나라 국왕 잠푸의 공양을 받고 신자사에 3년이나 머문 적이 있었다. 그러나 현조는 이 나라에서 병을 얻어 60여세로 세상을 떠나고 말았는데 상원연간(674~675)의 일이다. 시자로 현조를 수행했던 혜륜은 현조가 낙양을 출발하여 암마라발국에서 입적할 때까지 줄곧 그를 동행했을 것이다. 혜륜은 인도의 불교유적을 두루 참배하고 신자사에서 10년을 살았다고 한다. 신자사는 스승 현조가 입적한 절이다. 혜륜은 의정이 귀국길에 오르던 685년경에 건타라산다사(建陀羅山茶寺)에 살고 있었다. 토카라 사람들이 본국의 승려를 위하여 세운 이 절은 재정이 넉넉하여 공양이 풍성했다고 한다. 40을 바라보던 나이의 혜륜은 범어를 잘 했고, 또한 구사(俱舍)도 깊이 연구했었다. 현태는 영휘연간(650~656)에 티베트를 경유하는 길을 잡아 네팔을 거쳐 중부 인도에 이르렀다. 부다가야의 보리수를 참배하고 불교의 경론을 상세히 조사한 후 걸음을 동토(東土)로 돌렸다. 토욕혼에 이르러 인도로 가는 도희(道希)를 만났다. 토욕혼은 중국의 청해성(靑海省) 지역이다. 현태는 다시 도희와 함께 발길을 인도로 돌렸다. 아마도 현태는 도희의 인도 여정을 안내하게 되었던 것 같다. 도희는 타클라마칸 대 사막을 건너 카라코룸산맥의 금금(岑嶔)을 넘어 티베트에 이르렀고 니파라도를 경유하여 부처님의 열반지인 쿠시나가라에 도착했다. 부처님의 열반처에 세워진 절인 유파반나(輸婆伴那)에 머물며 불교의 계율에 관한 서적을 연구했다. 그리고 부다가야의 마하보리사에 이르러서는 보리수와 금강좌 등에 예배하고 몇 년을 이 절에서 지냈다. 그는 문장에도 능하고 글씨도 잘 쓰서 대각사에 당나라의 비를 세우기도 했다. 나란타사에서도 공부했는데 그가 당나라로부터 가지고 온 신구경론(新舊經論) 400권을 이 절에 남겨두기도 했다. 훗날 그는 암마라발국의 신자사에 머물기도 했는데,이 무렵 그는 당나라의 구법승 사편(師鞭)을 만나기도 했다. 그러나 50여세의 도희도 35세의 사편도 모두 병을 얻어 이 절에서 입적했다. 현태는 도희와 함께 대각사에 이르렀고, 그 뒤에는 당나라로 돌아왔다고 한다. 이처럼 현태는 두 차례에 걸친 인도의 구법여행에 성공하고 당나라로 돌아왔다. 이 무렵 두 번이나 인도로 갔던 구법승으로는 현태(玄太)를 비롯하여 현조,승가발라(承伽跋摩),의정뿐이었다. 당나라로 돌아온 이후 현태의 행적은 알려진 것이 없다. 혜업(慧業)은 정관(貞觀,627~649) 연간에 서역으로 가서 보리사(菩提寺)에 머물면서 성스러운 불교 유적을 순례하고 나란타사에서 오래 동안 강의를 듣고 불서를 읽었다. 의정 자신이 당나라 불서를 조사하다가 우연히 ‘양섭론(梁攝論)’ 아래에“불치목(佛齒木) 나무 아래에서 신라승 혜업이 베껴 적는다” 라고 한 기록을 보게 되었다. 이 절의 스님에게 물어보았더니,그는 이 절에서 세상을 떠났는데,나이는 60에 가까웠다고 한다. 그가 베낀 범본(梵本)은 모두 나란타사에 보관되어 있었다. 아리야발마는 신라 사람이다. 당 태종 정관 연간(627~649)에 장안의 광협(廣脇)을 떠나 인도로 가서 불교의 정법을 추구하고 성스러운 불교 유적을 몸소 순례 하였다. 나란타사에 머물면서 율(律)과 논(論)을 익히고,여러 가지 불경을 간추려 베꼈다. 돌아올 마음이 많았으나 이루지 못한 채 나란타사에서 입적했다. 연세는 70세였다.
    법보신문 Vol 1095         김상현 전 동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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