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7세기 한반도

14. 신라의 백제 병합 모의와 청병

浮萍草 2013. 6. 29. 07:00
    “백제는 무도하니 하늘의 뜻을 따라 징벌하리라” 
    부여 정림사는 백제 사비천도 무렵인 6세기 중엽 창건
    돼 백제 멸망 때까지 융성했던 백제의 대표적 사찰 중
    하나다. 당나라 소정방이 이곳 오층석탑(국보 제9호)에
    백제를 정벌했다는 글귀를 써 넣은 것으로도 잘 알려져
    있다. 문화재청 제공
    신라, 당 연호 사용 등 긴밀한 관계 지속 노력 김인문 당서 외교 활약 백제·고구려 병합 공모 648년 겨울 당 태종과 신사신 김춘추 사이에 합의 내용은 나당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정벌한 뒤에 평양 이남의 땅을 신라가 차지한다 는 것이었다. 당나라에서는 군사 20만 명을 파견하는 것이었다. 김춘추는 복장(服章)을 고쳐서 중국의 제도를 따르고,정삭(正朔)을 받들도록 청했다. 그리고 동반했던 셋째 아들 문왕(文王)을 당경(唐京)에 머물러 숙위(宿衛) 토록 요청하기도 했다. 신라에서는 진덕왕 3년(649) 정월부터 중국의 의관(衣冠)을 처음으로 착용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덕왕 4년(650)부터 당나라의 영휘년호(永徽年號)를 사용했으며, 이해 4월에는 작위가 있는 진골로 하여금 아홀(牙笏)을 잡게 하였다. 김춘추와 당 태종 사이에 있었던 나당연합군의 결성은 곧 실행되지는 않았다. 649년 6월 당 태종을 이어 고종이 즉위한 후 나당동맹은 한때 약화되기도 했지만,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신라는 650년 4월 김춘추의 장남 김법민을 당에 보내어 진덕여왕의 태평송 (太平頌)을 선물했고 그 이듬해에는 김춘추의 둘째 아들 김인문을 숙위 하게 했다. 이렇게 신라는 나당동맹의 끈이 끊어지지 않도록 노력했다. 당나라 조정에서는 권력투쟁이 있었고,659년 7월에는 측천무후(則天武后) 가 득세했다. 655년 봄에 고구려와 백제와 말갈의 군사가 연합하여 신라의 북쪽 변경을 침략해서 33성을 탈취하였다. 신라에서 당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자 이에 당에서는 소정방 등이 군사 1만 으로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신라에서는 655년 9월부터 백제를 병합할 모의를 구체적으로 하기 시작했다. 이것은 백제 내부 사정이 매우 혼란하다는 판단에 기초했다. 김유신은 백제 내부의 여러 정보를 확보하기 위해서 조미압(租未押)을 첩자로 활용했다. ‘삼국사기’ 김유신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전한다. 부산현령(夫山縣令) 급찬 조미압이 백제에 포로로 잡혀갔다. 좌평 임자(任子)의 집에 종이 된 그는 부지런하고 성실하여 게을리 하는 일이 조금도 없었다. 임자가 불쌍히 여기고 의심하지 않아 출입을 마음대로 하게 되었다. 이에 그는 도망쳐 신라로 돌아와 백제의 사정을 유신에게 고했다. 유신은 조미압이 충직하여 쓸 수 있음을 알고 말하였다. “내가 들으니 임자는 백제의 일을 오로지 하고 있다. 그와 함께 도모하고자 하였지만 길이 없었다. 자네가 나를 위하여 다시 돌아가 말해다오.” 그가 말하기를 “공께서 저를 어리석다고 생각하지 않으시고 지목하여 부리고자 하시니 비록 죽더라도 후회하지 않겠습니다.” 드디어 그는 다시 백제에 들어가 임자에게 아뢰었다. “저는 이미 이 나라의 백성이 되었으니 마땅히 나라의 풍속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여 집을 나가 수십 일간 놀면서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개나 말이 주인을 그리워하는 것 같은 정을 이기지 못하여 돌아왔습니다.” 임자는 이 말을 믿고 나무라지 않았다. 조미압이 틈을 타서 보고하였다. “저번에는 죄를 두려워하여 솔직히 말씀드리지 못했습니다. 사실은 신라에 갔다가 돌아왔습니다. 유신이 저를 타일러 주인님께 아뢰도록 하기를‘나라의 흥망은 미리 알 수 없는 법이니,만약 그대의 나라가 망하면 그대는 우리나라 에 의지하고,우리나라가 망하면 나는 그대 나라에 의지하겠다.’고 합디다.” 임자가 듣고는 묵묵히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조미압은 두려워하며 물러가 처벌을 기다렸다. 수개월 후 임자가 불러서 물었다. “네가 지난번에 말한 유신의 말이 무엇이었느냐?” 조미압이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전에 말한 바와 같이 대답하였다. 임자가 말했다. “네가 전한 바를 나는 이미 상세히 알고 있었다. 돌아가서 아뢰어도 좋다.” 조미압이 드디어 신라로 돌아와서 보고하였다. 또한 백제의 국내외의 사정을 말하여 주었는데,매우 상세하였다. 이에 더욱 백제를 병합할 모의를 급하게 하였다. 이처럼 김유신은 조미압을 첩자로 활용하여 백제 좌평 임자와 연결했고,이로부터 입수한 백제의 국내외 사정은 매우 상세한 것 이었고,고급정보에 해당하는 것이었다. 이 무렵 백제의 임금과 신하들은 심하게 사치하고 지나치게 방탕하여 국사를 돌보지 않아 백성이 원망하고 신이 노하여 재앙과 괴변이 속출하였다. 백제 천재지변 겹치고 괴이한 사건들도 속출 굶주린 백성 민심이반 백제 중신은 이적행위
    백제의 국내 상황은 매우 나빠지고 있었다. 우선 천재지변이 겹치고 있었다. 의자왕 653년 봄에 크게 가물어 백성이 굶주렸다. 657년 4월에 크게 가물어 농작물이 말라죽었다. 여러 불길한 징조들도 자주 나타났다. 655년 5월에 붉은 색의 말이 북악(北岳)의 오합사(烏合寺)에 들어가 울면서 법당을 돌다가 며칠 만에 죽었다. 659년 2월에 여러 마리의 여우가 궁궐 안으로 들어왔는데,흰 여우 한 마리가 상좌평의 책상 위에 앉았다. 4월에 태자궁의 암탉이 참새와 교미를 했다. 9월에는 궁중의 홰나무가 울었는데, 사람이 곡하는 소리 같았다. 밤에는 귀신이 궁궐 남쪽 길에서 울었다. 655년 2월 태자궁(太子宮)을 극히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수리했고,왕궁 남쪽에 망해정(望海亭)을 세웠다. 656년 3월 왕은 궁녀와 더불어 주색에 빠지고 마음껏 즐기며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았다. 좌평 성충(成忠)이 극력 간언하자 왕은 분노하여 그를 옥에 가두었다. 이로 말미암아 감히 간언하는 자가 없게 되었고,성충은 옥에서 굶어 죽었다. 657년 정월 왕의 서자(庶子) 41명을 좌평으로 삼고 각각에게 식읍(食邑)을 주었다. 특히 왕의 대부인이 무도하여 국권을 제 마음대로 빼앗아 현량을 주살하기도 했다. 이러한 백제의 사정을 파악한 김유신은 655년 9월에 왕에게 건의했다. “백제는 무도하여 그 지은 죄가 걸주(傑紂)보다 심하니 이때는 진실로 하늘의 뜻을 따라 백성을 위로하고 죄인을 징벌하여야 할 때 입니다.” 무열왕도 백제에 괴변이 많다는 말을 듣고 그 공격의 적기라고 판단했다. 659년 4월 백제가 신라 국경지대로 침략했다. 이를 계기로 신라는 백제에 대한 전면 공격 계획을 세우고 당나라에 군사를 청했다. 659년 4월 김인문이 견당사로 파견되었다. 김인문은 무열왕의 둘째 아들이다. 어려서 학문을 시작하여 유가의 책을 많이 읽었고,겸하여 장자,노자,불교의 책도 읽었다. 또한 예서와 활쏘기,말 타기, 향악(鄕樂)을 잘 하였는데,행동의 법도가 수수하고 세련되었으며,식견과 도량이 넓어 당시 사람들이 추앙하였다. 그는 23세이던 651년에 당에 숙위하다가 653년에 귀국 압독주총관(押督州摠管)이 되어 장산성(獐山城)을 쌓기도 했다. 그는 655년 정월에 당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656년 5월에 귀국했고, 659년 4월의 입당은 세 번째였다. 김인문으로부터 백제의 여러 상황을 전해들은 당 고종은 인문에게 백제 공격로에 대해서 도로의 험하고 평탄한 곳과 가는 길이 어디가 좋은가를 물었다. 인문이 매우 자세히 대답했다. 아마도 백제의 국내 사정에 대해서도 자세히 말했을 것이다. 고종은 백제 공격을 결정했다. 659년 윤10월29일 이전 어느 때다. 신라 견당사가 남로(南路)를 통하여 장안을 왕래하는 데 소요되는 기간은 5개월 내지 6개월 정도였다. 따라서 659년 4월에 파견된 견당사는 10월경에는 귀국할 수 있어야 했다. 10월이 되자 무열왕은 당나라의 회보를 초조하게 기다리기 시작했다. ‘삼국사기’에는 당시의 상황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왕은 조정에 앉아 있으면서도 얼굴에는 근심이 가득했다. 이때 어떤 사람이 홀연히 그의 앞에 나타났는데 앞서 죽은 신하 장춘(長春)과 파랑(罷郞) 같았다. 그들이 왕에게 말했다. “신은 비록 백골이 되었으나 아직도 나라에 보답할 마음이 있어서 어제 당나라에 갔었는데,황제가 대장군 소정방 등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내년 5월에 백제를 치러 오게 할 것을 알았습니다. 대왕께서 너무 애태우며 기다리시는 까닭에 이렇게 알려드립니다.” 말을 끝내자 사라졌다. 이 설화에서는 초조하게 당나라의 회보를 기다리고 있는 무열왕에게 장춘과 파랑의 혼령이 나타나 당의 백제 정벌 결정과 그 구체 적인 일정까지 알려주었다는 것이다. 이 설화는 마치 현몽처럼 설명하고 있지만,이 무렵 무열왕은 당의 백제 정벌에 대한 구체적인 정보를 입수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실제로 당나라에서는 659년 윤10월29일 이전에 백제 정벌 계획을 확정했고 ‘구당서’에 의하면, 659년 11월 계해(癸亥)에는 소정방 (蘇定方)을 신구도총관(神丘道總管),유백영(劉伯英)을 우이도총관(禺夷道總管),김인문을 신구도부대총관(神丘道副大摠管)에 임명 했다. 정보의 유출을 막기 위한 조치를 취하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다. 659년 윤10월29일에 일본사신 판합부석포련(坂合部石布連)과 진수길상련(津守吉祥連) 등이 당나라의 낙양에 도착하자 당에서는 칙지(勅旨)로 그들을 서경(西京)에 가두어 두었다. 그 이유는 이랬다. “국가가 내년에 반드시 해동을 정벌하는 일이 있을 것이다. 너희들 왜의 사신들은 동쪽으로 돌아갈 수 없다.” 다음 해 660년 8월에 당은 백제를 평정하고, 그후 9월12일에야 이들을 풀어주었다. 이처럼 당의 백제 정벌 계획이 659년 윤10월29일 이전에 확정되었음에 유의하면,신라의 무열왕도 10월경에는 이 소식을 전해들을 수 있었던 것 같다. 이처럼 당나라 조정에서도 659년 11월에는 백제 정벌을 위한 군사조직을 구체화하고 있었다. 물론 장춘과 파랑의 혼령이 무열왕에게 이 소식을 전했다는 설화를 사실로 믿기는 어렵다. 그러나 청병에 대한 당의 회보를 노심초사(勞心焦思) 기다리고 있던 무열왕의 모습은 죽은 신하들까지 돕고자 하는 마음을 일으킬 정도로 절실한 것이었다. 660년 3월10일 당나라에서는 소정방을 신구도행군대총관으로 삼아 백제를 정벌하게 하였다. 소정방이 거느린 13만 대군이 산동반도의 성산(成山)을 출발 황해를 건너 백제로 향하고 있었다. 신라 무열왕은 5월26일 군사를 거느리고 출발, 6월28일 경기도 이천의 남천정(南川停)에 도착했다. 21일에 왕이 태자 법민을 보내 병선 100척을 거느리고 덕물도(德物島)에서 당군을 맞았다. 나당연합군은 7월 10일 함께 백제 도성을 공격할 것을 합의했다.
    법보신문 Vol 1092         김상현 전 동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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