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7세기 한반도

18. ‘유가사지론’의 전래

浮萍草 2013. 7. 27. 07:00
    신라 유식학 융성…신라 정치사상에도 큰 영향 
    300~350년 인도서 성립 100권 분량의 유식 논서 구법승 현장법사가 번역 당태종이 직접 서문 작성
    국보 제244호 초조본‘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 권17.‘유가사지론’은 인도의 미륵보살이 지은 글을 당나라 현장(602∼664) 법사가
    번역해 천자문의 순서대로 100권을 수록한 것으로 11세기 고려시대에 간행한 초조대장경 가운데 하나다.(명지대 박물관 소장)
    크로드는 불교가 동쪽으로 전해진 길이다. 동서 불교문화의 교류와 관련하여 가장 중요한 것은 불전(佛典)의 전래와 역경(譯經)이다. 여러 경전 중에서도 ‘유가사지론’의 경우는 인도로부터 신라까지 전해지는 과정을 추적해 볼 수 있다. 300~350년경에 성립된 ‘유가론’은 100권이나 되는 분량에 많은 내용과 중요한 사상을 내포하고 있다. 유가사지(瑜伽師地)란 유가사(瑜伽師)들이 실천해 가는 수행의 바탕인 지(地)라는 뜻이고,이 논의 종요는 십칠지(十七地)이다. 17종의 지(地),즉 십칠지는 유가(瑜伽)를 수행하는 유가사들이 밟고 지나가야 하는 17종의 경계며 땅이라는 뜻이다. ‘유가사지론’이 멀고도 험한 실크로드의 동쪽 끝 신라에 전해진 것은 649년 무렵이다. 현장이 인도의 나란타사에 도착하여 계현법사(戒賢法師)로부터 이 논을 배우기 시작했던 635년으로부터 14년 만에 신라의 원효 등도 이 논을 읽고 연구하기 시작했다. 물론 이것은 현장의 구법과 번역의 공덕 덕분이다. 그리고 현장의 역장에는 필수(筆受)를 맡았던 신라 구법승 지인(智仁)도 참여하고 있었다. 신라의 구법승들은 7세기 전반부터 히말라야를 넘었고 천축의 여러 성지를 순례했으며,나란타대학에서 유학하기도 했다. 7세기 전반으로부터 중반에 이르는 이 무렵은 대개 신라의 선덕여왕대로부터 문무왕대에 해당하며 한반도가 통일전쟁에 휩싸여 있던 때다. 그러나 그 어떤 어려운 상황과 조건도 이들 구도자의 앞길을 막지 못했던 것이다. 당나라의 구법승 현장(玄奘, 602~664)은 635년에 인도의 나란타사에 도착했다. 정법장(正法藏) 계현법사가 물었다. “그대는 어디서 왔는가?” 현장이 대답했다. “지나국(支那國)에서 왔습니다. 스승에게 ‘유가론’을 배우고자 합니다.” 정법장은 제자 불타발타라(佛陀跋陀羅)를 불러 정법장 자신이 3년 전까지 병으로 고통 받던 인연을 말해 주도록 했다. 불타발타라는 옛날의 인연을 말했다. “화상께서는 옛날에 풍병(風病)에 걸렸었습니다. 매번 발작할 때마다 수족에 마치 불로 태우고 칼로 잘라내는 것과 같은 통증이 왔습니다. 갑자기 발작했다가 금방 나아버리기를 무려 20여년이나 했습니다. 지난 3년 전에는 고통이 너무 심해서 당신의 몸뚱이에 혐오감을 느껴 음식을 끊고 자살하시려고 했었습니다. 그런데 밤중에 꿈을 꾸었는데 세 천인(天人)이 나타나 화상에게 말했습니다. ‘그대는 정법(正法)인 ‘유가론’ 등을 세상에 널리 알려서 아직 듣지 못한 곳까지 두루 펴도록 하여라. 그리하면 그대의 몸은 점점 편안해질 것이니라. 지나국에 한 스님이 있는데 그는 기꺼이 대법(大法)을 널리 유통시키기 위해 그대에게 와서 배우기를 바라고 있다. 그대는 기다리고 있다가 그가 오면 가르쳐 주도록 하라.’ 이런 일이 있은 뒤로는 정법장의 병고가 완전히 사라지게 된 것입니다.” 정법장이 다시 현장에게 물었다. “그대는 몇 년이나 걸려 이 길을 왔는가?” 현장이 대답했다. “예, 3년이나 걸렸습니다.” 그러고 보니 옛날 정법장이 꿈을 꾸었을 그 시기와 일치하였다. 당시 106세 고령으로 대중의 존경을 받아 정법장(正法藏)으로 불리고 있던 계현은 널리 삼장(三藏)에 통달했지만,특히 ‘유가론’에 정통했다고 한다. 이에 현장은 계현에게 ‘유가론’의 강의를 청했고 수천 명이 동참하여 들었다. 현장은 1번에 15개월 정도가 걸리는 ‘유가론’ 강의를 3번이나 들었다. 17년의 인도 구법을 마친 현장이 장안으로 귀국한 것은 645년 정월이다. 이해 2월1일 현장은 낙양궁 의란전에서 태종을 만났다. 태종은 현장을 매우 정중하게 영접하고 위로했다. 태종은 현장에게 속인으로 돌아와서 정무를 도와달라고 권하기도 했다. 이에 현장은 사양하면서 말했다. “불교를 버리고 속무(俗務)를 따르라 하심은 물 위에 떠가는 배를 물을 버리고 뭍에서 저어가라 하심과 같습니다.” 당시 태종은 고구려 정벌을 위해 천하의 병사를 낙양에 모아 놓고 있어서 군사 문제가 바쁘고 급한 중에 잠시 현장을 만나고 있었다. 그래서 태종은 말했다. “바빠서 마음속의 말을 다하지 못할 것 같소. 법사와 함께 동행(東行)하면서 지휘하는 여가에 따로 이야기를 나누고 싶은데 법사의 뜻은 어떠하오?” 현장은 사양하면서 말했다. “저는 행군을 도울만한 힘도 없고 군대의 전투는 보아서 안 된다고 율에 정해져 있습니다.” 현장은 조용히 번역할 장소를 태종에게 청했고 태종은 장안의 홍복사(弘福寺)에 거처할 수 있도록 했다. 이처럼 현장은 당 태종의 고구려 정복에 동행하지 않았고 3월1일부터 홍복사에서 역사적인 번역 사업에 착수했다. 이로부터 그는 번역에 몰두하여 74부 1335권을 20년에 걸쳐 한역했다. 647년 5월15일 홍복사 번경원(飜經院)에서 번역하기 시작한 ‘유가론’ 100권은 꼭 1년 만에 마쳤다. 현장의 인도 구법과 역경 활동을 상징적으로 말해주는 이 번역에는 20여명 학승이 참여하였는데 신라의 지인(智仁)도 필수(筆受)를 맡았다. 태종은 648년 6월 경진일(庚辰日)에 법사를 옥화궁(玉華宮)으로 초청하였다. 현장이 ‘유가론’ 100권의 번역을 마쳤다고 하자 태종은 이를 가져오게 하여 자세히 열람했다고 한다. 정사에 바쁜 태종이 100권이나 되는 ‘유가론’ 전체를 정독하기는 어려웠을 것이지만 그래도 이 논의 구성과 대체적인 내용은 파악 했을 것이다. 국왕의 나라 다스리는 일에 관해 자세히 서술하고 있는‘유가론’ 제61권 결택분(決擇分) 중의 심사지(尋伺地)의 내용 등에는 특별한 관심을 가졌을 수도 있다. 태종은 그 말의 뜻이 심원하여 지금까지 들어본 것과는 다르다고 감탄하며 신하들에게 말했다. “짐은 불경을 보면 마치 하늘을 쳐다보고 바다를 바라보는 것 같아 높이와 깊이를 헤아릴 수가 없다. 지금 경론을 보니 종지(宗旨)의 근원이 광대하여 그 끝을 알 수 없다. 유가나 도가나 그 밖의 구류(九流)는 여기에 비하면 마치 작은 연못을 바다에 비교하는 것과 같을 뿐이다. 그런데도 세상에서는 유·불·도 3교의 뜻이 일치한다고들 말한다. 그것은 망령된 말이다.” 태종은 번역된 ‘유가론’ 100권을 읽은 것을 계기로 미루어오던 경전의 서문을 지었는데 이는 ‘유가론’에 감동한 때문이었다. 태종황제는 자신이 지은 경전 서문을 대당삼장성교서(大唐三藏聖敎序)라고 하고 이를 친필로 써서 현장이 번역한 모든 경전들의 앞에 두도록 했다. 당 태종이 청을 받고도 미루어 오던 성교서(聖敎序)를 ‘유가론’을 인연으로 짓게 되었던 것이다. 당 태종은 ‘유가론’을 극찬하면서 아홉 질을 사경하여 9대주에 반포하여 유통시키도록 명했는데 바로 김춘추가 입당했던 그 무렵 이다. 신라, 당에 유가론 요청 불과 1년만에 신라 유통 원효, 신라 유식학 주도 국왕 과실 구체적 나열
    중국 서안 대자은사 입구에 세워진 현장법사
    의 동상
    신라의 국왕이 당나라 태종(627~649)에게 표문으로 ‘유가론’를 청하자,이를 보내 주었다고 한다. 따라서 ‘유가론’이 신라에 전해진 것은 번역이 완료된 648년 5월로부터 당 태종이 사망한 649년 5월 사이에 해당하고 번역 후 1년 안에 신라로 유통되었던 것이다. ‘유가론’의 번역에 신라의 구법승 지인이 참석했던 것도 신라가 한역 ‘유가론’에 대한 정보를 빠르게 접할 수 있는 하나의 배경은 되었을 것이다. 신라에서는 ‘유가론’의 전래를 계기로 유식학이 점점 융성하게 되었다. 원효가 앞에서 이끌고 태현(太賢)이 계승해서 발전시켰다. ‘유가론’을 연구한 신라의 학승으로는 원측(圓測),현일(玄一),원효(元曉),경흥(憬興), 행달(行達),도륜(道倫),태현(太賢) 등이 있다. 원효는‘유가초(瑜伽抄)’5권 및‘유가론중실(瑜伽論中實)’4권을 저술했을 뿐만 아니라, 그의 현존 저서 중 15종의 저서에‘유가론’은 118회나 인용하고 있다. 이는 42회를 인용하고 있는‘섭대승론(攝大乘論)’이나 37회를 인용하고 있는 ‘대지 도론(大智度論)’에 비해서도 매우 많은 인용이다. 물론‘유가론’은 100권이나 되는 방대한 분량일 뿐 아니라,그 내용 또한 여러 방면의 교리를 폭넓게 담고 있음을 유의할 필요는 있지만 신라의 유식학을 원효가 앞에서 끌었다는 표현은 과장이 아니라고 하겠다. 8세기 초 흥륜사의 승려 도륜(道倫)이 705년경에 저술한‘유가론기’48권은 지금까지 도 전해지는데,‘유가론’에 대한 중요한 연구 업적으로 평가되고 있다. ‘유가론’에 대한 심도 있는 연구는 원효가 견인하고 태현이 계승했다. 어디 이 뿐인가. 신라 중대 초기의 대표적 고승인 원효와 경흥은‘유가론’중의 정치사상에 주목하기도 했다. ‘유가사지론’ 제61권의 결택분 중의 심사지(尋伺地)의 내용은 왕법(王法)에 관한 것 인데,이를 별도로 분리하여 번역·간행한 것이 ‘왕법정리론(王法正理論)’이다. 원효와 경흥은 국왕이 나라를 다스리는 일에 관한 주석에 ‘왕법정리론’을 많이 참고 했다.
    원효는 그의 ‘금광명경소(金光明經疏)’에서 ‘출애왕경(出愛王經)’을 인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금광명경’의 정론품(正論品)에는 국왕이 악을 따른다면 화를 초래하여 나라가 패망하게 된다는 것을 밝히면서 국왕이 악을 막을 것 을 권하는 대목이 있다. 원효는 이 부분의 주석에서, “대왕은 마땅히 알아야 한다. 과실에는 대개 열 가지가 있다. 만약 왕이 이와 같은 과실을 저지르면, 큰 창고가 있고 많은 보좌관이 있으며,많은 군사가 있다고 하더라도 우러러 귀의하지 않을 것이다.”라고 한‘출애왕경’을 인용하며 국왕의 열 가지 과실을 구체적으로 나열하기도 했다. ‘유가론’이 신라 정치사상사에 끼친 중요한 영향의 하나라고 하겠다.
    법보신문 Vol 1097         김상현 전 동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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