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7세기 한반도

16. 자장(慈藏)

浮萍草 2013. 7. 13. 07:00
    “계 지키며 하루 살지언정 파계하며 백년 살지 않겠다” 
    명문가 출신…조실부모 눈물 흘리는 꿩보고 출가
    중국 각지서 7년간 수행 황제도 비단하사 등 예우

    신라의 삼국통일과 불교 토착화에
    큰 기여를 했던 자장 스님의 진영.
    장(慈藏)은 7세기 전반 선덕여왕과 진덕여왕 때에 주로 활동했던 대표적인 고승이다. 그는 무림(茂林)의 아들로 성은 김씨,속명은 선종랑(善宗郎)이었다. 무림은 진골 출신으로 높은 요직을 지냈으나 늦게까지 아들이 없음에 불교에 귀의하여 천부 관음(千部觀音)을 조성하고 아들을 낳으면 불교계의 중요한 인물로 삼겠다고 축원하였다. 어느 날 어머니가 별이 떨어져 품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사월초파일에 자장을 낳았다. 그는 천성이 맑고 슬기로워 학문을 깊이 닦아 익혔다. 자장의 출가 동기에 대해서는 ‘속고승전’이나 ‘삼국유사’에는 양친을 일찍 여윈 때문이라고 했다. 그러나 ‘황룡사구층탑찰주본기(皇龍寺九層塔刹柱本記)’에 의하면 자장은 어려서 사냥을 좋아 하여 매를 놓아 꿩을 잡았는데,그 꿩이 눈물을 흘리며 우는 모습에 감동하여 출가하게 되었다 고 한다. 자장은 홀로 깊은 산으로 들어가 고골관(枯骨觀)을 닦았다. 고골관이란 앙상하게 뼈만 남기고 썩어버리는 시체 모습을 관함으로써 욕망을 벗어나 인생의 무상(無常)을 터득하고자 하는 수행 방법이다. 간혹 권태롭고 피곤할 때 조그만 집을 지어 가시덤불로 둘러막고 벗은 몸으로 그 속에 앉아서 움직이기만 하면 곧 가시에 찔리도록 하는 한편,끈으로 머리를 천정에 매달아 정신의 혼미함 을 물리치곤 했다. 이처럼 수행하고 있을 때 조정에서는 그를 불러 재상에 취임하라고 했다. 문벌로 보아 자장이 그 후임자에 가장 적합했지만 그는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 국왕은 엄중한 명을 내렸다. “취임하지 않으면 곧 목을 베라.”
    자장은 칙명을 듣고 말했다. “내 차라리 계(戒)를 지키고 하루를 살지언정 파계하고 백 년 살기를 원하지 않는다.” 이 말을 전해들은 왕은 어쩔 수 없이 출가를 허락하였다. 그 뒤 그는 더욱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 수행하였는데 이상한 새가 과일을 물고 와서 공양하였고 천인(天人)이 와서 5계(戒)를 주는 꿈을 꾸었다. 그가 산에서 나오자 각처의 사람들이 찾아와서 다투어 계를 받았다. 이때부터 그의 이름은 널리 알려졌지만 그럴수록 그는 당나라로 가서 보다 더 깊이 공부하고 싶은 구도심에 사로잡혔다. 선덕여왕 5년(636)에 자장은 승실(僧實) 등 제자 10여명과 함께 당나라로 갔다. 그는 먼저 오대산의 문수보살상에 은밀한 감응을 기도하였다. 7일 동안의 기도 후 꿈에 대성(大聖)이 나타나 4구게(四句偈)를 주었다. 그 게송이 범어였으므로 뜻을 알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한 승려가 왔다. 금점(金點)이 있는 가사 한 벌과 부처의 바루 한 벌 그리고 부처의 머리뼈 한 조각을 가지고서 그리고 범어 게송을 번역해 주었다. “일체의 법은 모두가 자성(自性)이 있는 바 없다. 법성(法性)을 이렇게 이해하면 곧 노사나불(盧舍那佛)을 보게 되리라.” 또 그는 자장에게 말했다. “신라의 동북방 명주(溟州) 경계에 있는 오대산은 1만 문수보살이 항상 거주하는 곳이니 친견하도록 하라.” 뒤에 자장은 장안(長安)으로 갔는데 태종은 사신을 보내 그를 위로하고 승광별원(勝光別院)에 머무르게 하였으며 후한 대접을 했다. 어느 날 장님이 설법을 듣고 참회하자 곧 눈을 뜨게 된 일이 있었다. 이 소문이 퍼지자 그를 찾아와 계를 구하는 사람이 매일 1000여명에 이르렀다. 그는 태종에게 글을 올리고 장안의 남쪽에 있는 종남산(終南山) 운제사(雲際寺)의 동쪽 산속으로 들어갔다. 그곳에 바위를 의지하여 집을 짓고 3년 동안 수도하다가 다시 장안으로 갔다. 황제로부터 비단 200필을 받는 등 여전히 극진한 예우를 받았다. 선덕여왕 12년(643)에 신라에서는 당 태종에게 글을 보내 자장을 보내줄 것을 요청했다. 선덕여왕 11년에 신라는 백제에게 40여성을 빼앗기고 대야성을 함락당하는 등 매우 위급한 상황에 처했기 때문이다. 태종은 신라의 요청에 응하고 자장을 불러 비단 등의 많은 예물을 주었다. 자장은 본국 신라에 불상,불경 등이 미비함을 생각하고 대장경 한 질과 번당(幡幢)·화개(華蓋) 등을 골고루 마련한 뒤에 귀국하였다. 신라를 떠난 지 7년만이었다. 나라의 모든 사람들이 그의 귀국을 환영했고, 왕은 그를 대국통(大國統)에 임명하였다. 여왕이 통치하던 이 무렵 신라는 대내외적으로 매우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처럼 어려운 시기를 맞아 자장은 불교로 교화하는 한편 정치 외교적인 자문도 해서 신라가 위기를 극복하고 삼국을 통일하는 데 크게 기여했다. 여왕에 대한 비판적인 여론이 대두하자 자장은 신라 왕실이 찰리종(刹利種)이라는 설을 유포하여 왕실 혈통의 신성함을 강조하는 한편 황룡사에 구층탑을 세우도록 건의함으로써 왕권의 강화에 주력했다. 고구려와 백제 두 나라의 공격을 받아 고립무원의 상태에 빠진 신라는 외교로써 이를 극복하려고 했다. 그러나 김춘추의 고구려 및 일본 방문 외교는 모두 실패했고 친선 관계에 있던 당나라까지도 청병(請兵)에 쉽게 응하지 않음으로써 신라의 위기는 계속되었다. 당 태종은 여왕폐위론을 제기했고 신라의 독자적 연호 사용까지도 문제 삼았다. 자장은 당의 복장제도(服章制度)와 연호(年號)를 받아들이면서라도 대당외교의 성공이 필요함을 국왕에게 건의했고 국왕은 이를 허락했다. 신라 조정에서는 김춘추를 당에 파견하여 나당군사동맹을 맺게 되었다. 이처럼 신라의 대당외교 성공 배경에는 자장의 자문이 있었다. 나당군사동맹이 신라 삼국통일의 중요한 토대가 되었음과 아울러 황룡사 구층탑의 역사적 의미에 유의할 때 자장의 정치·외교적 역할이 갖는 의미는 크다. 귀국 후 대국통으로 활약 신라 왕실의 신성함 강조
    계율로써 교단 기강 확립 통도사 등 10여 사찰 창건

    지장 스님이 계율 정립을 위해 세운 통도사 금강계단.

    그의 생애에서 중요한 것은 불교의 홍통(弘通)을 통한 대중 교화와 불교교단의 기강 확립이었다. 어느 해 여름 자장은 궁중에서 대승론(大乘論)을 강하였고, 황룡사에서 7일 동안 ‘보살계본(菩薩戒本)’을 강하였다. 그러나 당시 신라불교는 기강이 서있지 못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자장에게 대국통(大國統)이라는 높은 직위를 주어 그로 하여금 전국의 승려들을 관장하도록 했다. 그는 전국의 모든 승려에게 불경을 공부하게 하여 매년 봄·가을 두 차례에 걸쳐 시험을 보도록 하였다. 또한 한 달에 두 번씩 계를 설하게 하고 순검사(巡檢使)를 전국에 파견하여 지방의 사찰을 살펴 승려들의 과실을 징계하며 불경과 불상 등을 정중히 모시도록 하는 등 교단의 기강을 바로잡는 데 전력을 다했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 계를 받고 불교에 귀의하는 사람이 10명 중 8~9명은 되었다. 그래서 자장은 출가 승려가 될 것을 원하여 모여드는 사람들을 입문시키기 위해 통도사(通度寺)를 창건하고 계단(戒壇)을 쌓았는데, 현재의 금강계단(金剛戒壇)이 그것이다. 재가신자에게는 주로 오계(五戒)로써 수계했다. 물론 출가자나 재가자 모두에게 적용되는 보살계를 강의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자장은 보살계를 수용하고 있지만 아무래도 그의 계율사상의 기반은 소승계(小乘戒)인 사분율(四分律)에 있었다. 자장은 수계를 통한 불교의 홍포와 정율(定律)을 통한 교단의 통제를 동시에 주도했다. 자장은 원녕사에서 ‘화엄경’을 강하여 화엄교를 천명하기도 했다. 원녕사는 일찍이 자기 집을 절로 바꾼 바로 그 절이었다. ‘화엄경’을 강의할 때 52명의 여인이 나타나 법을 듣고 깨닫자 문인들이 그 수만큼의 나무를 심어 이적(異蹟)을 기념하였는데, 그 나무를 지식수(知識樹)라고 불렀다. 이로 보면 신라에 화엄사상을 최초로 소개한 것도 자장이라고 하겠다. 자장은 불교의 토착화를 위해서 노력했는데 이를 위해 신라불국토설(新羅佛國土說)을 유포했다. 자장이 중국 오대산(五臺山)에 갔을 때 문수보살이 감응(感應)하여 나타나서 비결(秘訣)을 주면서 부축(咐囑)했다. “그대 나라 황룡사는 곧 석가와 가섭불이 강연했던 곳이므로 연좌석(宴坐石)이 아직도 있다. 그러므로 인도의 아육왕이 황철(黃鐵) 약간을 모아 바다에 띄웠는데 1300여년이 지나서 그대 나라에 도착되어 불상으로 조성되어 절에 봉안되었던 것이다.” 황룡사의 장육상은 진흥왕 35년(574)에 주성된 것으로 인도의 아육왕도 주성에 실패했던 불상이 신라에서는 훌륭하게 이루어졌다는 내용의 설화를 갖고 있다. 가섭불연좌석(迦葉佛宴坐石)이 있는 곳은 전불시대(前佛時代)의 절터며 황룡사지역 또한 칠처가람(七處伽藍) 중의 하나였다고 한다. 오대산의 문수보살이 자장에게 준 비결 중에 황룡사는 석가와 가섭불이 강연하던 곳이기에 연좌석이 있다고 했던 것으로 보면, 황룡사가 전불시대의 절터였다는 설도 자장에 의해서 비롯되었거나,아니면 자장이 이 설을 더욱 강조했을 것이다. 또한 중국의 오대산신앙이 신라로 이식된 것도 자장에 의해서다.
    김상현 전 동국대
    사학과 교수
    그는 중국 오대산을 순례하고 그곳의 문수보살로부터 여러 기별(記莂)을 받았는데,그 중의 하나가 신라의 오대산에도 문수보살이 상주한다는 것이었다. 즉 문수보살의 화신(化身)인 한 노승(老僧)이 나타나서 말했다. “그대 나라의 동북방 명주(溟州) 경계에 오대산이 있는데 1만 문수보살이 언제나 그곳에 거주하고 있으니 가서 뵙도록 하라.” 이에 자장은 귀국 후에 오대산을 방문했고 이로부터 신라의 오대산신앙이 비롯되었다. 이처럼 자장은 오대산은 문수보살이 항상 머무는 곳이라는 설을 유포했는데 이는 황룡사 장륙존상의 조성 연기설화와 더불어 신라가 불교와 매우 깊은 인연이 있다는 것을 강조키 위한 것이었고 이것은 곧 불교의 토착화를 위한 것이었다. 자장의 이와 같은 노력으로 신라의 국민 중 8~9활은 모두 불교에 귀의하는 성과를 이룩할 수 있었다. 자장은 통도사, 월정사, 태화사 등 10여 사찰을 창건했다.
    자장의 저서로는‘아미타경소(阿彌陀經疏)’ 1권,‘아미타경의기(阿彌陀經義記)’ 1권,‘사분율갈마사기(四分律羯磨私記)’ 1권,‘십송률목 차기(十誦律木叉記)’ 1권,‘관행법(觀行法)’ 1권 등이 있었지만, 전해오는 것이 없기에 그의 교학이나 사상을 자세히 알기는 어렵다. 다만 이들 저서명과 그의 수행과 교화의 특징으로 보아 그의 계율 중시 경향을 짐작할 수 있다.
    법보신문 Vol 1094         김상현 전 동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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