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7세기 한반도

19. 군사암호 해독한 원효

浮萍草 2013. 8. 3. 07:00
    소정방이 보낸 암호문 해독으로 신라군 위기 모면
    당 고종 661년 평양으로 출병 신라도 북벌군 편성해 당 지원 고구려 강력한 저항으로 고전 당 퇴각하며 신라에 암호 전달
    원효가 당시의 신라왕실이나 귀족
    들과 유대가 있었다고 해서 그들의 권
    력을 비호하고 비위를 맞추었다고 보
    기는 어렵다. 원효는 궁중이나 귀족들
    의 집을 드나들기보다는 오히려 어려
    운 사람들의 벗이 됐지만 그렇다고 왕
    실이나 귀족을 굳이 멀리할 필요도 없
    었다. 그림은 분황사 소장 원효대사
    진영.
    효(617~686)는 삼국통일을 전후한 시기에 살았다. 한반도는 전쟁의 와중에 휩싸여 있었고 지루한 전투는 끝없이 계속되고 있었다. 이러한 풍진 세상에서 일생을 보냈던 원효,그는 비록 출가 수행자였다고 하더라도 당시의 국가 사회의 현실과 등지고 살 수는 없었을 것이다. 서당화상비문에는 광국광가(匡國匡家), 즉 국가를 도왔다는 표현이 보인다. 뿐만 아니라 그는 요석공주와 만남으로써 신라 왕실과 깊은 인연을 맺고 있었고,왕비의 병을 고치기 위해 왕실에서 부탁한‘금강삼매경’을 주석한 뒤에 이를 강의하기도 했던 구체적인 예 로 보더라도 원효는 국가적 현실 문제에 무관심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당나라 소정방이 보내온 군사 암호를 원효가 해독함으로서 신라 군사를 위기로부터 구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 것도 우연은 아닐 것이다. 백제 정벌에 성공한 당나라는 그 여세를 몰아 고구려까지도 정벌하고자 했다. 660년 12월15일 당 고종은 고구려 원정을 공표했다. 백제의 포로를 바치는 헌부의식을 치룬지 한 달 만이었다. 661년 정월 4만4000명을 평양으로 출병시키고,또 이 달에 소사업(蕭嗣業)을 부여도행군총관 으로 삼아 여러 유목민 집단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진격하게 했다. 4월에는 계필하력을 요동도행군대총관,소정방을 평양도행군총관,임아상을 패강도행군대총관 을 삼아 35도 병력을 동원하여 고구려를 정벌하게 하였다. 그리고 6월에는 신라의 출병도 요구했다. 이에 따라 문무왕은 7월에 김유신을 대장군으로 북벌군을 편성했고,8월에는 제장을 거느린 문무왕이 남천주로 나아갔다. 그리고 소정방은 8월에 평양성을 포위했다. 9월에 계필하력은 철군했는데,당에서 일어난 철륵의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서였다. 평양성은 좀처럼 쉽게 함락되지 않았다. 날씨는 점점 추워졌고 당군에게는 군량도 조달할 길이 없어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10월29일 평양의 당군에게 군량을 수송해 주기를 요청하는 당 고종의 칙서를 가지고 함자도 총관 유덕민이 신라로 왔다. 그런데 적지를 지나 평양까지 군량을 수송하는 일이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문무왕이 여러 신하들에게 물었다. “어찌하면 좋을까?” 신하들은 다 같이 말했다. “적의 경계 내에 깊이 들어가 식량을 수송하는 것은 형편상 이룰 수가 없습니다.”
    대왕은 걱정하며 한숨을 쉬었다. 이때 김유신이 앞으로 나서며 아뢰었다. “신은 지나치게 은혜로운 대우를 받았고, 무거운 책임을 맡았으니, 비록 죽는 한이 있더라도 나라의 일을 피하지 않겠습니다. 오늘이야말로 노신(老臣)이 절의를 다할 때입니다. 마땅히 적국에 가서 소(蘇)장군의 뜻에 부응하겠습니다.” 대왕은 김유신의 손을 잡고 눈물을 흘리면서 말했다. “공의 어진 보필을 얻었으니 걱정이 없습니다. 만약 이번 일에 어긋남이 없으면 공의 공덕을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67세의 노장군 김유신은 지극히 어려운 일을 스스로 맡고 나섰던 것이다. 김유신,김인문(金仁問),김양도(金良圖),진복(眞服) 등 9명의 장수는 수레 2000여 척에 쌀 4000석과 벼 2만2250석을 나누어 싣고, 12월10일에 평양성을 향했다. 장차 이들이 떠나려 할 때 국왕은 손수 쓴 글을 김유신에게 주었는데, 내용은 이랬다. “국경을 벗어난 후에는 상벌을 마음대로 해도 좋다.” 평양의 당나라 군사는 패수(대동강)가 얼어붙는 추위 속에서 고전하고 있었다. 얼어붙은 패수를 건너 평양성을 공격해 보았지만 오히려 고구려군의 역습으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고구려군에게 진지 2개를 빼앗겼다. 단지 2개의 요새만 남았는데 이것마저 함락될 위기에 처했다. 이에 당의 군사들이 무릎을 끌어안고 울었다. 이것을 목격한 고구려군은 날카로움이 무디어져 빼앗지 못했다. 이처럼 당군은 신라의 군량 지원을 기다리면서 근근이 버티고 있었다. 12월에는 웅진의 당군 또한 군량이 떨어졌다. 신라에서는 어쩔 수 없이 웅진과 평양의 당군에게 군량을 다 같이 수송했다. 웅진으로 군량을 수송했던 노약자들은 중도에서 눈을 만났다. 사람과 말이 다 죽어 백명 중 한 명도 돌아오지 못했다. 김유신이 이끄는 신라군이 예측조차 할 수 없는 적지로 들어선 그해 겨울 따라 비와 눈과 바람과 추위는 계속되고 있었다. 큰길에서는 고구려군이 지킬 것을 염려하여 험하고 좁은 길로 행군했다. 얼음과 추위에 병사와 우마는 쓰러져 죽어 갔고 달려드는 고구려군과 전투를 하기도 했다. 1월18일에는 풍수촌(風樹村)에서 잤다. 이때부터 길은 험하고 얼음은 미끄러워 쌀과 벼를 모두 마소에 실었다. 임진강을 건너, 662년 2월1일에 장새(獐塞)에 도착했다. 장새는 평양에서 3만6000보 떨어진 곳이었다. 눈보라와 심한 추위로 사람과 말이 넘어졌다. 김유신이 소매를 걷어 어깨를 들어내 놓고 말을 채찍질하며 앞에서 달려갔다. 이를 본 여러 사람들이 힘을 다해 달려가니 땀이 나서 춥다는 말을 못했다. 고구려군은 도중에서 기다려 공격하려 하니 당나라 진영에서 3만여 보 떨어진 곳에서 더 이상 앞으로 나갈 수가 없게 되었다. 이때 김유신은 열기(烈起)와 구근(仇近) 등 15명을 선발하여 당나라의 병영에 먼저 보내 소식을 알리기로 했다. 이에 김유신은 열기를 불러 말했다. “젊은 날 내가 그대와 놀 때 그대의 뜻과 절의를 알았다. 지금 소장군에게 소식을 전해야겠는데, 적당한 사람을 찾기가 어렵다. 네가 가지 않겠는가?” 열기는 말했다. “장군님이 시키신다면 비록 죽는 날도 살아 있는 때와 같다고 여기겠습니다.” 열기는 군사 15명을 데리고 활과 칼을 겨눈 채 말을 타고 달렸다. 마침 눈보라가 휘몰아치던 이 날은 사람과 말들이 많이 얼어 죽을 정도로 추운 날이었다. 열기 등은 이틀을 달려 소정방에게 소식을 전했다. 말을 휘몰아가는 이들의 기세에 눌린 고구려인들은 바라만 볼 뿐,막을 엄두조차 내지 못했다. 2월6일 양오(陽懊)에 도착하여 진영을 설치하고, 김인문,김양도,김군승 등이 800명의 군사를 이끌고 군량을 당의 진영에 보낼 수 있었다. 소정방에게는 특별히 은 5700푼[分],가는 실로 곱게 짠 베 30필,두발(頭髮) 30량,우황(牛黃) 19량을 주었다. 신라를 출발하여 두 달 가까이나 악전고투한 신라군의 보람도 없이 군량을 확보한 소정방은 대설(大雪)을 핑계로 즉시 철군,당으로 돌아가고 말았다. 김인문,김양도 등도 군사와 함께 바다를 건너 신라로 돌아왔다. 소정방의 송아지와 난새 그림 원효 “군사 속히 귀환” 풀이 원효 암호해독 사실유무 떠나 신라사회에서 원효 비중 반증
    철군이라는 중요한 군사 작전상의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소정방은 송아지와 난(鸞)새를 그린 암호를 신라군에게 전했다. 당군이 철수한다면 신라군도 급히 적지를 벗어나야 했다. 이 점에서 소정방이 그림으로 그려 보낸 암호의 해독은 매우 중요한 일이었다. 그러나 암호의 해독은 쉽지 않았다. 이에 사람을 시켜 원효에게 암호의 해독을 부탁했다. 원효는 그것을 해독하여 말하기를,“군사를 속히 귀환시키라는 뜻이다. 화독화란(畵犢畵鸞)의 반절음을 이른 것이다”라고 했다. 그는 송아지와 난새의 그림을 ‘화독화란(畵犢畵鸞)’의 반절음으로 읽고 ‘속환(速還)’의 의미로 해석했다. ‘화독(畵犢)’의 반절음은 ‘혹’이 되고, ‘화란(畵鸞)’의 반절음은 ‘환’이 된다. 합하면‘혹환’이 되는데 ‘속환’과 음이 비슷하다. 물론 ‘혹’과 ‘속’은 음에 문제가 없지 않다. 그러나 당시 신라 음에는 ‘혹’과 ‘속’이 통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무튼 원효가 암호를 해독해 주었기에 많은 신라군이 위기를 면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김유신이 군사를 돌이켜 패강(대동강)을 건너려 할 때 명령을 내렸다. “뒤에 건너는 자는 목을 벨 것이다.” 군사가 앞을 다투어 반쯤 건넜을 때,고구려군이 공격해와 미처 건너지 못한 자들을 죽였다. 다음날 김유신은 고구려 병을 도리어 추격 수만 명을 사로잡거나 참살하였다. 신라군은 파주의 임진강을 건널 때 뒤쫓는 고구려군과 또 한 차례 싸워야 했다. 신라군은 지쳐 있었지만 소형(小兄) 아달혜(阿達兮)장군과 군사 5000명을 포로로 잡고,무기 1만여점을 노획했으며,고구려군 1만명 을 참살하는 전과를 올리기도 했다. 추위와 굶주림과 피로가 겹친 몸을 이끌고 퇴군하던 신라 병사들 또한 길 위에서 죽어간 자 이루 다 셀 수 없을 정도였다. 원효가 군사 암호를 해독해서 신라군을 도왔다는 일이 실제로 있었던 것인지에 대해서는 의문이 없는 것도 아니다. 위급한 상황에서 평양 근교로부터 원효에게까지 자문을 구하기 위해 과연 사자가 적지를 오고갔을까 하는 의문 등이다. 원효가 어려운 암호를 해독해 줌으로서 위기에 처한 신라군을 왔다는 이야기를 통해서 당시 신라 사회에서의 원효의 비중을 짐작 하게 해준다. 이때 원효의 나이는 46세, 요석공주와 만난 이후로 신라 왕실과도 관련되어 있을 때고 또한 불법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을 때다. 이 무렵 원효의 명성은 신라 사회에 두루 퍼져 있었던 것 같다. 비록 원효가 당시 신라 왕실이나 귀족들과 유대를 가지고 있었다 해서 그들의 권력을 비호하고 비위를 맞추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는 궁중이나 귀족들의 집을 드나들기보다는 오히려 어려운 사람들의 벗이 되었다. 그렇다고 왕실이나 귀족을 굳이 멀리할 필요도 없었다. 설사 그가 지배층에 도움을 주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비판적이고 원칙적인 문제를 제시하는 입장에 있었을 것이고,자문에 응하는 정도였을 것이다. 그가 국통(國統)이나 국사(國師) 등의 승직을 탐했을 리도 없다.
    법보신문 Vol 1098         김상현 전 동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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