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7세기 한반도

15. 백제의 멸망

浮萍草 2013. 7. 6. 07:00
    나당연합군 파죽지세 공격에 백제 무너지다 
    나당연합군 660년 7월 동과 서에서 각각 진격 계백결사대 신라와 대치 화랑 앞세운 신라가 승리
    백제가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자 백제 궁녀들이 백마강에 뛰어들어 자결했다는 낙화암.
    자왕은 하늘의 뜻은 고사하고 충신의 간언도 듣지 못했다. 그는 신라를 공격하여 여러 차례 승리했다. 642년 7월 왕은 친히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의 미후성 등 40여 성을 함락시켰고 8월에는 대야성을 불태웠다. 649년 8월에는 석토성 등 7성을,그리고 655년 8월에는 신라의 30여 성을 빼앗았다. 계속된 승전보로 의자왕은 신라를 주머니 속의 물건인양 생각했다. 655년 2월 태자궁을 극히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수리하였다. 656년 3월 왕은 궁녀와 더불어 주색에 빠져 마음껏 즐기며 술 마시기를 그치지 않았다. 좌평 성충(成忠)이 극간했다. 왕은 분노하며 그를 옥에 가뒀다. 다시는 간하는 사람 없었다. 657년 정월에 왕의 서자 41명을 좌평으로 삼고 각각에게 식읍을 주었다. 의자왕 즉위 19년인 659년 무렵부터 불길한 일들이 자주 터졌다. 이 해 5월 사비하에 길이 30척의 고기가 죽었다. 9월 궁중의 홰나무가 사람이 곡하듯 울었다. 밤에 궁궐의 남쪽 길에서 귀신이 울었다. 660년 봄 사비하의 물이 핏빛처럼 붉었다. 4월에는 수만 마리의 두꺼비와 개구리가 나무 위로 모였다. 5월 천왕사와 도양사 두 절의 탑과 백석사 강당에 벼락이 쳤다. 6월 왕흥사 승려들은 보았다. 큰물을 따라 배의 돛과 같은 것이 절 문으로 들어오는 것을. 모두 망국의 조짐이었다. 그래도 주색에 빠진 왕은 몰랐다. 6월에 귀신이 궁궐에 나타나 외쳤다. “백제가 망한다. 백제가 망한다.” 그리고는 땅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곳을 파보니, 거북 한 마리가 있고, 등에는 백제는 둥근 달과 같고 신라는 초생 달과 같다고 씌어있었다. 무당은 말했다. “둥근 달은 가득 찼기에 곧 기울 것입니다.” 노한 왕이 그를 죽였다. 어떤 아첨꾼이 말했다. “우리나라는 왕성하게 되고 신라는 장차 미약해진다는 뜻입니다.” 왕은 기뻐했다. 660년 7월 동쪽과 서쪽에서 신라군과 당나라 군사가 공격해 왔다. 백제는 이에 대응할 전략을 논의했지만,혹은 피곤한 당군을 먼저 치자고 하고 혹은 약한 신라를 치자고 하는 등 의견이 분분했다. 왕은 주저하며 결단하지 못하는 사이에 당군은 이미 백강 왼쪽 언덕에 상륙하고 신라군은 대전 동쪽 탄현(炭峴)을 넘어서고 있었다. 의자왕은 장군 계백을 보내 싸우게 했다. 계백은 출진에 앞서 가족을 모두 죽였다. 그리고 결사대 5천명을 이끌고 황산벌에서 신라의 5만 군사를 맞았다. 7월9일이다. 대장군 김유신, 우장군 김흠춘, 좌장군 품일 등이 이끄는 신라군은 세 길로 나누어 공격했다. 그러나 네 차례의 격돌에도 전세는 불리했다. 사기가 꺾인 신라 병사들은 힘이 빠졌다. 열 배나 더 많은 군사로도 죽음을 각오한 백제군을 당하기란 힘겨웠던 것. 이때 우장군 김흠춘이 나섰다. 그는 아들 반굴을 불러서 말했다. “신하에게는 충성이 중하고, 자식에게는 효도가 중하다. 위급함을 보고 목숨을 바치면 충성과 효도를 온전히 하는 것이다.” 이에 반굴은 대답은 간단했다. “알겠습니다.” 반굴은 적진에 뛰어들어 힘써 싸우다가 죽었다. 다음에는 좌장군 품일이 아들 관창을 불러서 말 앞에 세우고 여러 장수들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 아들은 나이 겨우 열여섯이나 의지와 기백이 자못 용감하니,오늘의 싸움에서 능히 삼군의 모범이 될 것이다.” 관창은 “예”라고 답하면서 말에 올라 적진으로 달려갔다. 한 자루 창을 들고. 사로잡힌 관창이 계백에게 끌려갔다. 계백이 투구를 벗기게 했다. 계백은 그의 나이 어리고 용감함을 아껴 차마 해치지 못했다. 그리고 탄식하며 말했다. “신라에는 뛰어난 병사가 많구나. 소년이 오히려 이와 같은데 하물며 장병들이랴.” 계백은 관창을 살려 보냈다. 관창이 돌아와 아버지에게 말했다. “제가 적진으로 들어가 장수를 베지도 깃발을 뽑아오지도 못한 것은 죽음이 두려워서가 아닙니다. 다시 들어가면 반드시 성공할 수 있습니다.” 그는 손으로 우물물을 떠서 마신 다음 다시 적진으로 가서 날쌔게 싸웠다. 계백이 사로잡아 머리를 베어 말안장에 메달아 보냈다. 품일이 그 머리를 붙잡고 흐르는 피에 옷소매를 적시며 말했다. “내 아이의 얼굴은 살아 있는 것 같구나. 나라 위해 죽을 수 있으니 다행이다.” 이 광경을 본 병사들이 강개하여 죽기를 결심하고 싸워서 신라는 승리할 수 있었다. 계백은 죽고 좌평 상충(常忠)과 상영(常永) 등 20여명은 사로잡혔다. 소정방의 전횡·우유부단 김유신이 기개로서 압도 7월18일 의자왕 항복 백제 백성 당으로 압송
    백제가 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자 백제 궁녀들이 백마강에 뛰어들어 자결하는 모습을 그린 부여 고란사 벽화

    김흠춘은 김유신의 동생이다. 그리고 이들 형제는 진평왕 때 함께 화랑이었다. 관창 또한 화랑이었다. 우장군과 좌장군은 경쟁이라도 하듯, 그들의 아들을 희생의 제물로 바쳤다. 사랑하는 자신들의 아들을. 7월11일 김유신 등이 이끄는 신라군이 당나라 군대의 진영에 이르렀다. 백제 도성으로부터 약 30리쯤 되는 곳으로 부여 남쪽 석성면(石城面) 부근이었다. 원래 약속은 7월10일에 만나는 것, 그러나 황산벌 전투의 치열함으로 해서 하루가 늦었다. 소정방은 김유신 등이 약속 기일보다 늦었다는 이유로 신라의 독군(督軍) 김문영(金文潁)을 군문에서 목 베려고 하였다. 김유신이 외쳤다. “대장군은 황산 싸움을 보지도 않고 약속 날짜에 늦은 이유만으로 죄로 삼으려 한다. 나는 죄 없이 모욕을 받을 수 없다. 반드시 먼저 당나라 군사와 결전한 후에 백제를 깨뜨리겠다.” 이에 큰 도끼를 잡고 군문(軍門)에 서니 그의 성난 머리털이 곧추서고 허리에 찬 보검이 저절로 칼집에서 튀어나왔다. 소정방의 우장 동보량(董寶亮)이 그의 발을 밟으며 말했다. “신라군사가 장차 변란을 일으킬 듯합니다.” 소정방이 곧 문영의 죄를 풀어주었다. 660년 7월12일 당나라 군사와 신라 군사는 백제 왕경을 공격하기 위해서 소부리벌로 나아갔다. 그러나 소정방은 꺼리는 바가 있어서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김유신이 이를 달래어 두 나라 군사가 용감히 싸워 사면에서 함께 사기를 떨쳤다. ‘삼국사기’의 이 기록만으로는 소정방은 왜 진격을 꺼렸으며,김유신은 어떻게 소정방을 설득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삼국유사’의 다음 기록으로 이 의문은 풀린다. 당나라 군사와 신라 군사가 합세해 전진하여 진구(津口)에 이르러 강가에 군사를 주둔시켰다. 이때 갑자기 새 한 마리가 소정방의 진영 위를 맴돌았다. 소정방은 사람을 시켜서 점을 치게 하니, 반드시 원수가 상할 것이라고 했다. 정방이 두려워하여 군사를 물리고 싸움을 중지하려고 했다. 김유신이 소정방에게 말했다. “어찌 나는 새의 괴이함으로써 천시(天時)를 어긴단 말이오. 하늘의 뜻에 응하고 민심에 순종해서 극히 어질지 못한 자를 치는데 어찌 상서롭지 못한 일이 있겠소.” 이에 신검(神劍)을 뽑아 그 새를 겨누자 새는 몸이 찢어져 그들의 자리 앞에 떨어졌다. 이에 소정방은 백강(白江) 왼쪽 언덕으로 나와서 산을 등지고 진을 치고 함께 싸우니 백제군이 크게 패했다. 결국 소정방이 두려워하며 진격을 꺼렸던 것은 진영 위를 맴도는 새를 불길한 징조로 믿었기 때문이고,김유신이 신검으로 그 새를 처리한 뒤에 함께 공격했다는 것이다. 소정방을 압도할 정도로 김유신은 확신에 찬 장수였던 것이다. 7월12일. 나당연합군 사비성 공격. 강 건너에 진을 친 당나라 군사. 이상한 일이었다. 당나라 군사가 강을 건너려고 하면, 구름과 안개가 피어올라 방향을 알 수 없었다. 이러기를 몇 차례, 사람을 시켜 강을 살펴보도록 했다. “강에는 여울돌(磯石)이 있고, 그 밑에 용혈(龍穴)이 있어서 백제를 호위하는 때문입니다.” 소정방은 술법(術法)하는 자의 계교(計巧)를 써서 낚시 밥을 던져 용을 낚으려 했다. 백마(白馬)를 미끼로 사용했다. 미끼를 물어버린 용, 다시는 안개와 구름을 피우지 못했다. 백제를 지키던 백마강의 호국용, 그 용이 결정의 순간에 낚시 밥에 홀리고 말다니. 도성을 향해 진격해 오는 연합군 18만, 이에 맞서 싸우던 백제군 1만명 전사. 7월13일 밤. 의자왕은 웅진성으로 피했다. 의자왕의 아들 융이 대좌평 천복(千福) 등과 함께 나와서 항복했다. 18일 웅진성의 장군 예식(禮寔)이 의자왕을 사로잡아서 항복했다. 이로써 백제는 망했다. 나당 연합군의 공격을 받은 지 겨우 10일 만에 예식은 예식진(禮寔進, 614~672)과 동일인으로 그는 훗날 당 나라에서 좌위위대장군 정3품 벼슬을 지냈다. 의자왕을 잡아서 당군에 넘긴 공으로. 백제의 멸망을 두고 이렇게 말하는 사람도 있었다. “백제는 스스로 망하였다. 임금의 대부인(大夫人)이 요사스럽고 간사한 여자로서 무도하여 마음대로 권력을 빼앗고 훌륭하고 어진 신하들을 죽였기 때문에 이러한 화를 불렀다. 삼가지 않을 수 있는가? 삼가지 않을 수 있는가?” 대부인은 의자왕의 비인 은고(恩古)였다. 8월2일. 나당연합군은 전승 축하연을 열었다. 무열왕과 소정방 및 여러 장수들이 대청마루 위에 앉고 의자왕과 그 아들 융은 마루 아래 앉혀서 때로 의자왕으로 하여금 술을 따르게 했다. 백제의 여러 신하들이 모두 목메어 울었다. 소정방은 의자왕과 왕비 은고(恩古),태자 효(孝),왕자 태(泰),융(隆),연(演),그리고 좌평 천복(千福),국변성(國辨成),손등(孫登),또 장사 88명과 백성 1만2천여명을 당나라 서울 장안으로 보냈다. 11월1일 당 고종이 측천문의 문루에 행차하여 백제 포로를 바치는 헌부의식(獻俘儀式)을 행했다.
    법보신문 Vol 1093         김상현 전 동국대 사학과 교수

      草浮
    印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