萍 - 창고 ㅈ ~ ㅎ/7세기 한반도

13. 김춘추의 외교

浮萍草 2013. 6. 22. 07:00
    절체절명 위기를 삼국통일로 뒤바꾼 외교 달인
    아름답고 쾌활한 성격 지혜와 용기 두루 갖춰 신라 고립 타개 위해 고구려·일본사신 자청
    신라 제29대 왕인 태종무열왕의 능 앞에 세워진 석비. 태종무열왕(김춘추, 재위 654∼661)은 김유신과 함께 당나라를 후원세력
    으로 삼아 삼국통일의 기반을 다진 인물이다. 문화재청 제공
    642년 대야성의 함락으로 신라는 심각한 위기에 처하게 되었다. 이 상황을 타개하기 위해 김춘추가 팔을 걷고 나섰다. 그는 국왕에게 자신이 고구려에 사신으로 가서 군사를 청해보겠다고 했고 왕이 이를 허락했다. 당시 고구려는 신라와 적대 관계에 있었다. 638년 10월과 11월에도 고구려가 신라의 칠중성을 공격해 와서 양국 사이에 전쟁이 있었다. 642년 8월에도 백제는 고구려와 모의하여 당나라로 가는 길목인 당항성을 점령하려 했다. 더구나 이해 10월 고구려에서는 연개소문이 왕을 죽이고 실권을 장악하고 무단적인 독재정치를 시작했다. 642년 겨울 김춘추는 사간 훈신(訓信)과 함께 고구려로 갔다. 고구려 보장왕은 태대대로 연개소문을 보내 객사를 정해주고 잔치를 베풀어 우대했고 식사 대접을 특별히 했다. 보장왕은 평소에 춘추의 명성을 들었던 터라 호위를 엄중히 한 다음 그를 만나 보았다. 춘추가 말했다. “지금 백제는 무도하여 긴 뱀과 큰 돼지가 되어 우리 강토를 침범하므로 우리나라 임금이 대국의 군사를 얻어 그 치욕을 씻고자 합니다. 그래서 신하인 저로 하여금 대왕께 명을 전하도록 하였습니다.” 고구려왕은 무리한 질문으로 대답하기 어렵게 함으로서 그를 욕보이게 하려고 말하였다. “마목현(麻木峴)과 죽령(竹嶺)은 본래 우리 땅이오. 만약 죽령 서북의 땅을 돌려준다면 군사를 내보낼 수 있지만 돌려주지 않으면 돌아갈 수 없을 것이오.” 춘추가 대답했다. “신은 임금의 뜻을 받들어 군사를 청하는데 대왕께서는 어려운 처지를 구원하여 이웃과 친선에는 뜻이 없고 단지 사신을 위협하여 땅을 돌려줄 것을 요구하십니다. 국가의 땅은 신하가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신은 죽을지언정 감히 명령을 쫓을 수 없습니다.” 보장왕이 노하여 그를 가두고 죽이려 했다. 춘추가 청포(靑布) 300보를 은밀히 왕이 총애하는 신하 선도해(先道解)에게 주었다. 도해가 술을 준비해 와서 함께 마셨다. 술이 올랐을 때 도해가 농담조로 거북과 토끼 이야기를 하였다. 춘추가 그 이야기를 듣고 뜻을 깨달아 왕에게 글을 보내 말하였다. “두 영(嶺)은 본래 대국의 땅입니다. 신이 귀국하면 우리 왕에게 청하여 돌려 드리겠습니다. 저 밝은 해를 두고 맹서하겠습니다.” 보장왕이 기뻐하였다. 김춘추는 몰래 본국 왕에게 사정을 알렸다. 이에 신라에서는 대장군 김유신에게 결사대 1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구하게 했다. 고구려 간첩 승려 덕창(德昌)이 사람을 시켜 이 사실을 본국에 알렸다. 고구려왕은 김춘추를 돌려보냈다. 춘추는 국경을 벗어나자 그를 바래다 준 사람에게 말했다. “엊그제 대왕에게 서신을 올린 것은 죽음에서 벗어나려는 뜻이었을 뿐이다.” 이렇게 고구려에 대한 군사 요청은 거절당했을 뿐만 아니라 사신 김춘추가 옥에 갇히는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이로부터 5년이 지난 647년에 김춘추는 다시 일본으로 갔다. ‘일본서기’에 의하면, 춘추는 용모가 아름답고 쾌활하게 담소하였다고 한다. 김춘추는 일본을 방문하여 백제의 침략을 방어하는데 필요한 원군을 요청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김춘추의 일본 사행은 실패로 끝난 것 같다. 이로부터 신라는 일본을 더 이상 외교 대상으로 생각하지 않게 되었고,몇 년 뒤인 656년경 일본은 백제와 고구려의 군사 연합에 접근하게 된다. 대야성 함락 이후 신라는 고립무원의 상태가 지속되고 있었다. 6년 동안이나. 사직의 보존마저도 위태롭게 된 급박한 상황은 어떻게든 타개해야 했다. 이에 김춘추는 648년 진덕왕 2년 겨울 사신이 되어 그의 아들 문왕을 데리고 당나라로 갔다. 당 태종은 신라 사신 김춘추를 특별히 환대했다. 김춘추가 도착하자 광록경(光祿卿) 유형(柳亨)을 시켜 교외에서 위로해 맞이했고 태종 자신은 김춘추에게 가벼운 수레, 좋은 말, 아름다운 옷, 좋은 음악 등으로 하루에도 몇 차례씩 특별히 대접했다. 또한 주연(酒宴)으로 대접하며 담소했다. 김춘추가 국학(國學)의 강론을 참관하고자 함에 이를 허락했고,자기가 지은 온탕비(溫湯碑) 및 진사비(晋祠碑)와 새로 지은 ‘진서 (晋書)’ 등을 비롯하여 금과 비단을 후하게 주었다. 그리고 김춘추가 돌아올 때 특별히 벼슬을 주고 삼품 이상의 관리에게 명해서 송별연까지 베풀어 주었다. ‘삼국사기’에는 “태종은 김춘추의 외모가 영특(英特)함을 보고 후하게 대접했다”라고 했지만, 이것은 피상적인 설명일 뿐이다. 하루는 모든 외국의 왕자를 불러 잔치를 벌였는데 크게 술을 베풀고 온갖 보화를 쌓아놓은 뒤에,그들에게 마음껏 마시고 가지고 가라고 했다. 김춘추는 이에 술 드는 것은 예의를 지켜 난망(難忘)함을 방지하셨고 화려한 비단은 지혜를 써서 많이 얻었다. 하직하고 나올 때 태종은 멀리 갈 때까지 바라보면서 탄복하여 말했다. “국기(國器)로다!” 태종은 어느 날 춘추를 불러 사사로이 만나 금과 비단을 매우 후하게 주며 물었다. “경은 무슨 생각을 마음에 가지고 있는가?” 춘추가 아뢰었다. “신의 나라는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으면서도 천자(天子)의 조정을 섬긴 지 이미 여러 해 되었습니다. 그런데 백제는 강하고 교활하여 여러 차례 침략을 마음대로 하였습니다. 더욱이 지난해에는 군사를 크게 일으켜 깊숙이 쳐들어 와 수십 개 성을 쳐서 함락시켜 조회할 길을 막았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당나라 군사를 빌려주어 흉악한 것을 잘라 없애지 않는다면 우리나라 인민은 모두 사로잡히는 바가 될 것이고 산 넘고 바다 건너 행하는 조공마저 다시는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 당, 춘추에 ‘國器’ 탄복 나당연합 성사 이끌어내 외교로 군사압박 탈피 일통삼한의 초석 마련
    이렇게 춘추는 당 태종에게 군사를 청했고 군사 문제를 함께 논의함에 그 뜻이 맞았는데 마치 물고기가 물을 만난 것과 같았다고 한다. 그리고 기일을 정하여 응원하기로 분명히 함이 돌이나 쇠에 새긴 것과 같았다고 한다. 당 태종과 김춘추 사이에는 나당연합군이 고구려와 백제를 병합하려는 의도를 분명히 했고 또한 그 이후의 영토 분할 문제까지 논의했다. 당시에 당 태종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짐이 지금 고구려를 치는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그대 신라가 양국에 핍박되어 매양 그 침해를 입어 편안할 때가 없음을 애달프게 여김이니,산천과 토지는 나의 탐하는 바가 아니며,옥금(玉帛)과 자녀도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양국을 평정하면 평양 이남과 백제 토지는 다 그대 신라에게 주어서 길이 편안하게 하려 한다.” 이처럼 태종과 김춘추 사이에 합의된 내용은 나당연합군이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정벌한 뒤에 평양 이남의 땅을 신라가 차지한다 는 것이었다. 당나라 측에서 고구려 정벌에 앞서 백제 정벌을 계획했던 것은 고구려를 후방에서 공격할 수 있는 거점의 확보와 아울러 군량의 확보라는 군사전략에 기초한 것이었다. 당의 입장에서 신라로부터 군량을 확보하는 일은 구체적으로 절실한 요구였다. 그리고 고구려 공격을 위한 교두보를 확보하는 일은 전략적으로 매우 중요한 것이었을 뿐만 아니라 신라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은 더욱 중요한 것이었다. 신라의 입장은 고구려와 백제의 침략으로부터 나라를 지켜야겠다는 것이었지만,당과의 군사 동맹을 게기로 삼국통일의 전망까지도 가능하게 되었다. 김춘추는 복장(服章)을 고쳐서 중국의 제도를 따르고,정삭(正朔)을 받들도록 청했다. 그의 이러한 요청은 대당외교에 대한 신라 조정의 기본 정책이나 지침에 의해 것이었을 것이다. 신라 조정에서는 당나라 군사의 출병을 보장받기 위한 특별한 외교정책을 결정하게 되었는데,그것은 당의 복장제도(服章制度)를 받아들이고,당의 연호(年號)를 사용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자장(慈藏)이 상소하자 국왕이 허락한 것이었다. 자장은 수년간 당나라에서 생활한 바 있을 뿐 아니라,당 태종과의 개인적인 친분도 있었는데,이러한 경험은 당시 당나라의 정치 상황이나 태종의 정치노선 등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을 것이다. 당 태종은 신라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는 것을 문제 삼기도 했음에 유의하면, 자장은 당나라의 환심을 살 수 있는 조건을 제시 해서라도 당나라와의 군사 동맹을 이끌어낼 수 있게 하자는 건의를 했던 것 같다. 신라가 당의 복장제도와 연호를 사용한 것은 당나라 중심의 천하 질서에 귀속하겠다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방한 것이라는 해석이 있을 정도로 획기적인 것이었다. 춘추가 복장을 고쳐 중국의 제도에 따를 것을 청하니,이에 내전에서 진귀한 옷을 꺼내 춘추와 그를 따라 온 사람에게 주었다. 신라에서는 진덕왕 3년(649) 정월부터 중국의 의관(衣冠)을 처음으로 착용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진덕왕 4년(650)부터 당나라의 영휘년호(永徽年號)를 사용했으며,이해 4월에는 작위가 있는 진골로 하여금 아홀(牙笏)을 잡게 하였다. 그리고 김춘추는 귀국하기 전에 동반했던 셋째 아들 문왕(文王)을 당경(唐京)에 머물러 숙위(宿衛)토록 요청하기도 했는데 태종은 조칙으로 문왕을 정3품인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으로 삼았다. 김춘추의 아들 문왕이 당 조정에 숙위하게 됨으로서 신라의 대당 교섭에 거점을 확보하게 된 것이었다. 그리고 춘추에게는 조칙으로 정2품인 특진(特進)관작을 주었는데 이는 김춘추에 대한 특별한 배려였다. 김춘추는 신라와 당과의 동맹을 이끌어냄으로 해서 그의 정치적 위상은 더욱 높아졌고 신라와 당 관계는 더욱 긴밀하게 되었다. 신라와 당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기 위한 신라의 노력은 계속되었다. 650년에 신라는 김춘추의 아들인 법민(法敏)을 당에 파견하여 진덕여왕이 지은 태평송(太平頌)을 당 태종에게 보내기도 하였고, 이듬해에는 김춘추의 아들 인문(仁問)을 숙위로 파견하기도 했다. 신라는 당제국의 힘을 이용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군사적 압박을 벗어났을 분만 아니라 두 나라를 병합함으로서 일통삼한(一統三韓) 했는데, 여기에 김춘추의 외교적 성공이 돋보인다.
    법보신문 Vol 1091         김상현 전 동국대 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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